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0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05화(206/412)
#205. 미국의 선택
– 한수혁 선수, 혹시 취미가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취미요? 흐음… 특별한 건 없고, 가끔 시간이 남으면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를 보곤 합니다.
‘다큐라고?’
지난 WBC 우승 당시 어떤 미국 기자의 쓸데없는 질문에 한수혁이 그렇게 대답했다.
가는 곳마다 여자를 만들거나 혹은 슈퍼카를 수집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취미활동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푸는 다른 빅리그 스타들과 달리 타이 존슨의 생활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집과 야구장을 오가는 단순한 일상의 반복.
그런 타이 존슨의 귓가에 한수혁의 인터뷰 내용이 날아와 꽂혔다.
‘혹시 그걸 보면 야구에 뭔가 도움이 되는 걸까?’
지난 스토브리그 기간, 따뜻한 LA에 개인 캠프를 차린 타이 존슨은 훈련 시간 외 대부분의 시간을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며 보냈다.
별로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계속 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야구와는 아무 연관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웃!”
3회말, 한수혁에게 여섯 번째 삼진을 헌납한 타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덕아웃에 들어와 앉았다.
“…Fuck!”
울분을 집어삼키는 소리.
그런 녀석의 주변으로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은 선수들이 하나둘 모여 들었다.
1회초 서형주와 이찬호의 연속 출루, 그리고 한수혁의 홈런으로 한국팀이 3점을 선취했다.
그리고 이어진 한수혁의 삼진 쇼.
3회까지 아홉 명의 미국 타자들이 타석에 들어섰고, 그중 여섯 명이 삼진을 당했다.
물론 타이 존슨은 거기서 예외였다.
그는 무려 ‘중견수 정면으로 가는 플라이’로 아웃되었으니까.
“괜찮아, 울지 마, 존. 네가 못한 게 아니라 저놈이 괴물인 거야.”
“빌어먹을, 어디서 저런 놈이…….”
한 곳에 모여 들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어찌 보면 인간미 넘치고, 또 어찌 보면 불쌍해 보이는 모습.
타이 존슨은 저 모습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다큐멘터리에서 본 게 확실하다.
암사자 두 마리와 그 새끼들을 하이에나 떼가 둘러싸고 공격했다.
그 전부터 먹잇감을 놓고 갈등이 있었는지 하이에나 떼는 바싹 독이 올라 있었고, 숫자에서 밀린 암사자들은 새끼들을 지키느라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바로 그때, 어딘가로 외출을 나갔던 무리의 우두머리, 숫사자가 돌아왔다.
겨우 사자 한 마리가 더해졌을 뿐이다.
그런데 그 숫사자 한 마리가 등장하자마자 수십 마리에 달하는 하이에나 떼들이 쏜살같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절대 무적이라는 말은 바로 그 숫사자를 위해 준비된 표현이었다.
무리 뒤에 뒤처진 하이에나를 발로 깔아 뭉개고, 그대로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어버리고.
자신이 없는 틈에 암사자들을 건드린 게 괘씸했는지 숫사자는 그 하이에나들을 끝까지 추격해 기어코 박살 내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카메라가 하이에나 잔당이 모여 있는 소굴로 향했다.
그곳에는 겁도 없이 암사자들을 습격했다가 박살이 난 하이에나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고 있었다.
‘흠.’
타이 존슨이 보기에 지금 미국 덕아웃의 분위기가 딱 그랬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만 해도 혈기가 흘러 넘치던 빅리거들이 한수혁 하나에게 박살이 난 채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1회 시작하자마자 석점 홈런을 얻어 맞은 미래의 빅리그 에이스는 뭔가 알아들 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고, 불과 3회 만에 6개의 삼진을 헌납한 타자들은 서로 네 잘못이 아니라며 상처를 보듬어 주고 있었다.
타이 존슨은 생각했다.
자신은 항상 스스로를 숫사자라 생각했다.
세인트루이스라는 최강팀, 아니, 메이저리그를 이끄는 우두머리.
하지만 만약 저 녀석이 미국으로 진출한다면?
과연 그때도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뭔가 등골이 오싹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순간이 기다려질 지경이었다.
무리의 우두머리에 도전한 어린 숫사자, 그리고 기나긴 혈전 끝에 그 도전을 물리친 늙은 숫사자.
그것은 타이 존슨이 가장 좋아하는 다큐멘터리였다.
* * *
슈우웅
파아앙
“스트라이크!”
구속 106마일, 회전수 3,000RPM에 달하는 강력한 포심이 타자의 몸쪽 가장 가까운 존에 틀어박혔다.
“Holy shit……!”
이번에 대표팀에 합류한 젊은 선수들 중 최고의 투수가 앤드류 데이비스라면 타자 중 최고는 제임스 테일러였다.
지금 타석에서 연신 욕설을 내뱉고 있는 타자 말이다.
전체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로 템파베이의 지명을 받은 그는 앤드류와 마찬가지로 불과 1년 만에 마이너리그 도장깨기를 마치고 곧바로 빅리그로 콜업되었다.
3/4/5의 아름다운 슬래시라인과 30-30이 가능한 호타 준족.
미래의 슈퍼스타로서 부족함이 없는 선수였다.
그런 제임스가 우상으로 삼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번 대표팀의 주장 타이 존슨이었다.
오늘 경기가 시작되기 전 그가 제임스에게 말했다.
‘한수혁이 던진 공을 치려면 생각보다 조금 높게 타점을 잡아야 할 거야. 공이 떠오르거든.’
‘떠오른다고요?’
물론 진짜로 떠오르는 건 아니다. 아무리 빠르다 해도 투수의 손을 떠난 모든 공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가라앉게 되어 있다.
다만 한수혁이 던진 무지막지한 회전수를 가진 포심은 그 가라앉는 궤적이 다른 투수들의 공보다 훨씬 덜했다.
즉, 덜 가라앉기에 타자의 뇌에 떠오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어쨌든 제임스는 자신의 우상이 던진 조언을 결코 잊지 않았다.
부웅
분명 생각보다 위를 조준했는데 그래도 오차가 컸다.
부웅
이래도 안 맞는다고? 제임스가 다시 한 번 영점을 조절했다.
부웅
“Fuck!”
빌어먹을 놈이 커브를 던지며 순식간에 삼진 아웃.
그렇게 첫 번째 타석에서 삼구삼진을 당한 제임스 테일러는 두 번째 타석에서 어떻게든 그것을 만회하려 했다.
하지만,
슈웅
부웅
“스윙! 아웃!
98마일에 달하는 고속 슬라이더에 꼼짝없이 당하며 또 한 번 삼진 아웃.
4회말 미국의 공격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 * *
‘팀의 승리? 아니면 내 명예? 뭐가 더 중요할까?’
미국 최고 명문구단 양키스의 전 감독이자 WBC에 이어 또 한 번 대표팀을 지휘하게 된 백발의 노감독이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차세대 빅리그 에이스 자리를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는 앤드류 데이비스를 출격시켜 한수혁과 맞불을 놓고 선발투수가 내려간 후 승부를 결정짓는다는, 단순하지만 그만큼 확실한 계획이 1회부터 산산이 부숴졌다.
앤드류 데이비스가 던진 100마일 포심이 에인절 스타디움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한 방으로 정신을 차린 앤드류가 4회까지 추가 득점 없이 한국 타자들을 잘 막아냈다는 점이다.
어쨌든 5회초 한국의 공격, 또 한 번 그 괴물의 타석이 돌아온다.
첫 타석 석점 홈런, 두 번째 타석 유격수 라인드라이브.
사실 두 번째 타석은 운이 좋았다.
앤드류 데이비스를 차세대 에이스로 불리게 만들어준 멋진 커브가 배트에 정확하게 맞아 나갔다.
하지만 미국팀에게 행운이 따랐다. 잘 맞은 타구가 그대로 유격수 정면으로 가고 만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속도의 타구를 받아낸 미국팀 유격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음.’
이제는 정말 선택을 해야 한다.
지난 WBC에서도 미국은 한수혁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벌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큰 것을 허용하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야구 종주국의 명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로버트 감독이 앤드류 데이비스를 불렀다.
“자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좋아. 앞 두 타자와의 승부 결과에 상관없이 한수혁을 거르고 계속 던질 것인지, 아니면 한수혁 타석에서 마운드를 내려올 것인지.”
이번 올림픽 야구 종목에는 자동고의사구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이 볼넷을 지시했다 해도 투수가 그걸 어기면 모든 계획이 무너진다.
지금 로버트 감독은 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슈퍼스타에게 경고한 것이다.
벤치의 지시를 어기면 바로 마운드에서 끌어내리겠다는 경고.
그리고 또 하나,
오늘 미국은 명예보다는 승리를 택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앤드류 데이비스가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좋아.”
* * *
“우우우!”
“이런 비겁한 겁쟁이!”
“투아웃에 고의사구를 준다고? 그러고도 네가 빅리거야?”
“우리 집 개새끼도 네놈보다는 용감할 거다!”
– 아, 5회초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 미국이 한수혁 선수를 고의사구로 내보내는군요.
– 네, 관중석에서도 난리가 났네요. 미국 관중들이 투수를 향해 엄청난 야유를 보내고 있습니다.
– 어휴,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요.
– 사실 감독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죠. 지난 WBC 결승전에서 한수혁 선수가 미국을 상대로 4타수 3안타를 기록했단 말이죠. 단타 하나, 이루타 하나, 그리고 홈런 하나, 삼루타만 하나 더 쳤으면 사이클링 히트네요.
– 이제 와서 생각해도 정말 대단했네요.
– 그렇죠. 거기에 오늘도 벌써 홈런 하나가 있고요. 하지만 미국 팬들 입장에서는 고의사구라는 게 진짜 자존심 상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 네, 그렇군요. 아, 저기 뭔가 그라운드로 날아들기도 하고…….
– 종목 자체의 인기는 미식축구나 농구에 밀린 지 좀 됐지만 그래도 미국의 국기는 여전히 야구거든요. 그리고 이번 올림픽은 그 미국에서 개최되고 있고요. 어떻게든 우승을 하기 위해 빅리거들을 출동시킨 자국 대표팀이 겨우 아시아 변방의 선수에게 고의사구를 준다는 게 자존심 상한다 뭐 그런 겁니다.
– 그런 모든 걸 감수하고 고의사구를 내준다라… 미국도 꽤나 절박하군요.
– 네, 제가 기억하기로 지난 WBC에서도 그랬고, 미국이 고의사구를 내준 건 이번이 처음이지 싶습니다. 자, 이러면 승부는 더 치열해지겠네요. 세계 최강 미국 대표팀이 명예 대신 승리를 선택했습니다.
* * *
부웅
“스윙! 아웃!”
“젠장, 미안하다.”
2사 주자 1루 상황에서 앤드류 데이비스의 커브볼에 속수무책으로 삼진을 당한 베테랑 이수영이 나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안할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 재미있게도 지난 WBC에서 내가 상대했던 슈퍼스타급 선수들, 그러니까 시애틀의 라이언 티보우라든지 클리블랜드의 지미 맥카운 같은 녀석들보다 오늘 상대 중인 앤드류 데이비스의 공이 더 위력적으로 느껴진다.
나한테 1회 홈런을 허용한 게 저 녀석의 뇌관을 건드린 걸까?
그냥 가만히 내버려둬도 몇 년 내에 머리털을 잃고 대신 미국 최고라는 타이틀을 얻게 될 녀석의 재능을 내가 자극한 것일까?
“자, 이번 이닝도 잘 막아보자! 파이팅!”
“파이팅!”
이유가 뭐든 저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후끈 달아오른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며, 그리고 드디어 성장이 끝난 육체를 다시 한 번 조율하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던 워리어스의 우승을 일궈내며,
나는 예전 삶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영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건 내 숙원이었던 워리어스의 우승, 그리고 왕조 건설과는 조금 다른,
그래, 말 그대로 야구선수로서 내 개인의 성취욕과 관련된 일이다.
야구선수로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냐에 대한 도전의식 같은 것이다.
지난 WBC에 이어 또 한 번 세계 최고라는 녀석들과 상대를 하다 보니 자꾸만 성취욕과 도전의식을 자극한다.
피식
맞다.
원래 야구란 게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지.
어릴 적 처음 야구공을 잡았을 때 느꼈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설렘이 떠오른다.
좋아.
이런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 녀석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줘야겠지.
오늘 경기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