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07)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06화(207/412)
#206. 언젠가는
202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한국에서는 소위 ‘국뽕’을 담은 컨텐츠들이 대세를 이루던 때가 있었다.
경제 규모나 국가 경쟁력 같은 객관적 지표에 비해 외국인들에게 다소 생소했던 한국 문화가 K-POP 열풍을 타고 세계로 퍼지며 너도 나도 ‘두유 노우 김치’를 외치게 된 것이다.
외국인을 데려다 한국음식을 먹이고, 반대로 해외로 나가 현지 외국인에게 한국음식을 먹이고,
먹이고, 먹이고, 또 먹이고, 맛있냐고 물어보고.
뭐, 그걸로 먹고산 유튜버들이 꽤 됐으니 나름 하나의 산업이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어쨌든 우리가 유난히 호들갑을 떤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국뽕에 있어 세계 최고는 미국이다.
인종과 상관없이 유치원 때부터 성조기 아래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시키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세계 최고로 올라선 미국의 역사와 사상을 주입 받고,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미국의 영웅들이 지구를 구하는 만화와 영화를 보고.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프로 스포츠 개막식에 전투기가 축하공연을 하고, 군인들을 초청해 미국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만든다.
그런 말이 있다.
미국에 사는 외국인이 영어를 못하면 ‘저놈은 뭔데 영어를 못해?’라고 차별을 받고, 반대로 미국인이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저놈은 뭔데 영어를 안 써?’라는 소리를 듣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그렇게 국가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미국인들이 자신의 국기인 야구 종목에서 개박살이 나고 있다.
슈웅
파앙
“스윙! 아웃!”
“우우우우!”
“죽어! 죽어버리라고!”
“젠장! 저놈 연봉이 2천만 달러라고? 저딴 놈이?”
8회말 미국의 공격이 또 한 번 삼자범퇴로 끝났다.
스코어는 여전히 3 대 0, 한국이 석 점 앞선 가운데 한수혁이 8회 미국 타자 셋을 삼진 2개와 범타 1개로 막아냈다.
야구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렇기에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고 경기장을 찾은 미국 야구팬들은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8회말까지 25명의 미국 타자를 상대한 한수혁은 삼진 15개를 기록하며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을 이어가고 있었다.
만약 6회말 유격수 안태규의 실책에 가까운, 하지만 안타로 판정받은 그 타구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퍼펙트가 이어졌을 것이다.
“개만도 못한 헛스윙 그만하고 점수를 좀 내보란 말이야!”
“빌어먹을! 이 따위로 할 거면서 왜 올림픽에 출전한 건데?”
“차라리 대학생들을 내보내지 그랬어? 그럼 지고도 변명할 거리는 있었을 거 아냐!”
전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규모를 가진, 하지만 국뽕에 가득 찬 미국인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마이너리그에도 못 미치는 변방리그에 불과한 한국.
그런 한국팀에게 빅리거들이 총출동한 자국 대표팀이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걸 그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 불만이 폭동으로 이어지지 않은 건 앤드류 데이비스의 뒤를 이어 등판한 투수들이 8회까지 한국에 추가점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1회 피홈런은 실수였겠지. 아무리 좋은 투수라도 홈런을 맞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
이제 곧 따라가겠지. 멋진 홈런으로 저 건방진 아시아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겠지.
그렇게 애써 위안하며 경기를 지켜보았지만 아니었다.
8회말이 끝난 현재 미국은 여전히 단 한 점도 내지 못한 채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이런 좆 같은 경기를 보려고 내가 그 돈을 냈다니!”
“뒈져! 다 뒈져버리라고!”
9회초, 미국팀의 주전 마무리가 마운드에 올라 한국팀의 하위타자들을 차례로 잡아냈다.
이제 석 점 차로 뒤진 미국의 마지막 공격만이 남은 상황.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한수혁을 보며 타이 존슨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경기에 앞서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선발로 예고된 한수혁을 상대하기 위한 준비, 그리고 그 뒤에 이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류한결에 대한 분석, 한국 수비진의 약점 등.
하지만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밸런스 면에서 역대 최고라 불러도 무방할 미국 대표팀을 한수혁은 끝까지 혼자 상대하고 있었다.
9회말을 앞둔 가운데 투구 수 105개.
투구 수 제한이 없는 올림픽 결승전에서 한수혁은 최대한 효율적인 승부를 이어가고 있었다.
담담한 듯하면서도 그 안에 강한 승부욕을 내포한 얼굴.
그런 한수혁의 얼굴을 보며 타이 존슨은 생각했다.
오늘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어떻게든 삼진을 먹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친 게 다였다.
앞뒤 타자들이 너도 나도 삼진을 당하는 통에 그래도 나는 뭔가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중견수 플라이, 2루수 땅볼, 그리고 1루수 직선타.
목표한 대로 삼진은 하나도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정말 옳은 길이었을까?
지금 저 녀석은 고작 트리플A 수준이 될까 말까 한 동료들을 이끌고 이렇게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있는데 자신은 삼진을 먹는 게 두려워 그런 멍청한 스윙을 했다니.
“하아… 이거 참.”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8번부터 시작되는 미국 팀의 마지막 공격.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4번 타순까지 차례가 올 일은 없을 거 같다.
미국을 대표하는 슈퍼스타의 머릿속에는 이미 패배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 * *
야구는 기록과 확률, 그리고 통계의 스포츠다.
다른 스포츠에는 한두 해 반짝하고 사라진 스타들이 레전드 취급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야구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최소 10년, 길게는 20년 넘게 쌓아 올린 커리어.
한 선수의 인생, 그리고 그를 응원하며 함께 나이를 먹어간 팬들의 역사가 담긴 그 커리어 앞에서는 그 어떤 것들도 함부로 이름을 내밀지 못한다.
하지만 가끔은 예외가 있는 법이다.
자국의 리그, 그리고 선수들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미국 야구팬들이 2027년 WBC에 이어 2028년 올림픽에서 두 번 연속 좌절을 맛보았다.
그것도 리그 최고 스타들이 출전한 대회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여기, 그 두 번 연속 미국을 좌절시킨 최고의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환하게 웃고 있다.
“우아아아아!”
“한수혁!”
“멋지다! 최고다! 진짜 네가 최고야!”
“오빠아아아!”
한수혁을 선두로 태극기가 박힌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차례로 단상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메달 한국, 은메달 미국, 동메달 도미니카.
최선을 다해 싸운 선수들이 메달을 목에 걸고 팬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이번 올림픽 경기 내내 단 한 번도 그라운드 난입을 하지 않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한국팀의 금메달 획득보다 더 기적적인 결과를 이뤄낸 민예린을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어준 한수혁이 천천히 수상대에서 내려왔다.
“이게… 이게 바로! 금! 메! 달!”
“우아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진짜 금메달이야? 이거 도금이지? 금은 아니지?”
“야야, 그거 순금 맞고, 그보다 도둑질 안 당하게 조심해라. 귀국하면 협회에 반납해야 하는데 잊어버리면 자비로 물어내야 해.”
“…정말요?”
“그럼, 예전에 2008년에 성수 형이 그거 잊어버려서 꽤 큰 돈 물어줬지, 아마. 아무튼 조심해라. 연봉도 얼마 안 되는 신인들이 내기엔 좀 부담스러울 테니까.”
“야, 안치욱. 안 되겠다. 우리 이거 김 대리님한테 맡기자.”
“그럴까? 그래, 그게 낫겠다.”
사상 첫 성인 국가대표 경기 출전, 금메달, 그리고 병역 혜택이라는 달콤한 과실 덕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대표팀 막내들을 고참들이 살살 놀려 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누구도 한수혁을 향해 장난이나 농담을 거는 선수는 없었다.
한수혁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거나, 혹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거나, 갑자기 다가와 안아주는 선수들도 있었다.
금메달이 걸린 미국과의 결승전에서 3점 결승 홈런, 그리고 9이닝 1피안타 완봉.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올림픽 금메달은 한수혁이 혼자 따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혹자는 말한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와 달리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종목이라고.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건 개인이 아닌 팀이며, 그 어떤 선수도 팀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고.
그래, 맞는 말이었다.
타자, 수비수, 그리고 투수까지,
세 가지 일을 혼자서 다 해내는 한수혁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늘 경기 전까지 애써 한수혁의 존재를 부정했던 일부 전문가들, 그리고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농구 드림팀처럼 미국 야구팀이 올림픽을 박살 낼 거라 철썩같이 믿고 있던 보수적인 야구팬들.
그런 이들조차 이제는 한수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헤이, 꼭 이런 것까지 바란 건 아니고요, 타이.”
“흐흐, 괜찮아. 제임스, 너도 이쪽으로 와. 한수혁하고 직접 얘기를 해보고 싶다며.”
“오, 노! 괜찮아요. 그건 그냥 한 말이고…….”
“무슨 사내 자식들이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아. 입 닥치고 따라와. 헤이, 한. 잠깐 나 좀 볼 수 있을까?”
시상식이 끝난 후 수상대를 내려오던 한수혁을 누군가 불렀다.
이번 미국 대표팀의 간판스타이자 주장인 타이 존슨이 양쪽 팔에 사람 하나씩을 꽉 끌어안은 채 한수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적어도 피지컬 면에서는 타이 존슨의 상대가 될 수 없는, 마치 품에 안긴 것처럼 보이는 두 녀석의 이름은 오늘 선발로 나섰던 앤드류 데이비스와 3번 타자로 출전했던 제임스 테일러였다.
각각 투타에서 미국을 대표하게 될 차세대 스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린 한수혁이 먼저 타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타이.”
“오, 그래. 나도 즐거웠어. 가만, 그런데 우리 어디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가? 내 기억에는…….”
“아뇨, 없어요.”
“음, 그렇군. 이상하네. 왜 이렇게 익숙한 기분이……. 아무튼 좋아. 다른 건 아니고, 이 자식들이 너랑 꼭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그제야 타이 존슨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두 사람이 어색한 표정으로 한수혁을 향해 악수를 청했다.
“젠장, 앤드류. 내가 먼저야.”
“삼진 3개나 당한 놈이 뻔뻔하군.”
“뭐? 그럼 결승 홈런을 얻어 맞은 놈은 뻔뻔해도 되고?”
“…제길.”
엄연히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어린 핏덩이로만 보이는 두 녀석의 손을 차례로 잡아주었다.
“역시 투수의 손이네.”
“이게 어디 투수 손이야. 타자 손이지.”
“이런 무식한 놈.”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꽉 찬 멍청이.”
대학 시절부터 계속 저렇게 티격태격해 왔다는 차세대 스타들을 뒤로하고 타이 존슨이 내게 물었다.
“이봐.”
“뭔지 모르겠지만 빨리 말해봐요. 아직은 선배들 눈치를 봐야 하는 막내라서.”
한수혁이 저 멀리 한데 모여 있는 한국 선수단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한수혁의 반응에 타이 존슨이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런 빌어먹을, 이제야 실감이 나네. 내가 이제 고작 스무 살짜리 애송이에게 이 망신을 당했다는 거지?”
“글쎄요, 애송이라는 표현은 저기 저 두 놈한테 더 적합할 거 같은데.”
한수혁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앤드류와 제임스가 여전히 옥신각신하며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타이 존슨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혁의 말이 맞았다.
저렇게 혼자서 경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괴물에게 나이나 연차를 들이미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이 존슨이 한수혁에게 진정으로 굴복한 건 아니었다.
비록 지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단기전 승부였다.
시즌 162경기를 치르는 빅리그에서 1년, 아니, 적어도 몇 년은 함께 구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승부를 논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같은 팀에서 뛰든, 혹은 다른 팀에서 뛰든 말이다.
그런 마음을 담아 타이 존슨이 물었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지?”
“거기?”
“네게 그곳은 너무 좁아. 넘어와. 내가 단장에게 말해두지. 무슨 수를 써서든 널 데려오라고. 네가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미국으로 와. 기다리지.”
한수혁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아예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이미 한 번 해본 일이기에, 그리고 그 끝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기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 생각했건만,
세계 최고 레벨의 선수들과 경쟁을 하며 떠오른 짜릿한 감각이 한수혁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수혁은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당초 동메달을 목표로 출발했던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한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