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1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17화(218/412)
#217. 두 번째 데뷔전
결국 나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어떤 것은 예전 그대로였고, 또 어떤 것은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 그대로인 것은 팀의 성적에 분노하고 있는 홈팬들의 야유, 아직까지도 내게 미심쩍은 표정을 보내고 있는 팀 동료들, 그리고 시애틀 정도는 언제나 털어버릴 수 있다 믿는 저 A’S 놈들의 기분 나쁜 히죽거림이다.
그리고 변한 것은 마이너리그에서 갓 올라왔던 애송이였던 나와, 이제 18년 넘게 프로에서 쌓은 경험을 갖고 돌아온 내 눈높이였다.
1회초 오클랜드의 공격이 삼자범퇴로 끝나고 시애틀의 공격 차례가 돌아왔다.
대기 타석에 서서 그라운드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마운드 위 오클랜드의 에이스가 당당한 표정으로 서 있다.
데빈 맥퍼슨, 오클랜드에서 데뷔한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얼마 후면 큰 돈을 받고 빅 마켓으로 이적하게 될 우완 에이스.
마이너에서 벅벅 구르다 처음 빅리그에 올라왔을 때 나는 저 녀석의 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00마일을 훌쩍 넘기는 포심, 그리고 포심처럼 들어오다 바깥쪽으로 휙 꺾여 나가는 강력한 커터.
마이너리그에서는 구경조차 못 해본 그 위력적인 공에 한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슈웅
파앙
“좋아! 공 좋다!”
“데빈! 박살 내버려!”
오늘 경기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시애틀을 마치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도시락처럼 여기고 있는 오클랜드 선수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공을 주고받는다.
그래, 생각났다.
나는 그라운드 위에서 저렇게 이빨을 보이는 양키들을 침묵시키는 걸 가장 좋아했던 거 같다.
삼진을 잡아내거나, 홈런을 치거나, 혹은 펀치를 날리거나 해서 말이다.
음,
생각해보니 KBO에서 뛸 때 나는 꽤나 성격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이렇게 아무런 부담 없이, 책임져야 할 것 하나 없이,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 그라운드에 서 있으니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온다.
뭐랄까, 답답한 도심 빌딩숲에 갇혀 있다가 탁 트인 벌판에 나온 기분이랄까.
흐읍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켜 보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과는 조금 다른 그라운드의 흙, 그리고 잔디 냄새가 느껴진다.
오늘을 위해 지난 겨울 동안 힘들게 만들어온 육체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움찔거린다.
박살 내라고, 저 빌어먹을 자식들을 뭉개 버리라고.
그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진정시키기 위해 또 한 번 크게 심호흡.
흐읍
“이봐, 뭐 하는 거야? 타석 전에 치르는 의식 같은 건가?”
“아뇨, 타이. 그냥 기분이 좋아서.”
“싱겁긴.”
잠시 타석에서 물러서 있던 우리 팀의 1번 타자가 주심을 향해 준비가 다 됐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시애틀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따아악!
“서드!”
턱
“젠장!”
“세이프! 세이프!”
지난 시즌 시애틀 타선은 저 오클랜드의 에이스 데빈 맥퍼슨에게 그야말로 처절할 정도로 농락당했다.
이제 막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시애틀의 타자들에게 그는 난공불락과도 같은 존재였다.
타자 몸 쪽으로 바짝 붙는 100마일 포심으로 얼을 빼놓고, 투심과 커터로 타자의 배트를 유혹하는 저 투수를 상대로 시애틀 타선은 타율 0.150이라는 끔찍한 성적을 기록하고 말았다.
“좋아, 어쨌든 잘했어, 데릭.”
“잘하긴요. 실책 덕분에 간신히 산 건데.”
3루수 실책으로 가까스로 1루에서 살아남은 시애틀의 1번 타자 데릭 플레밍이 코치에게 보호대를 내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수혁과 타이 존슨이 입단하기 전 이 팀 타자들 중 넘버 1, 2를 다투었던 데릭이다.
그렇기에 그의 타선은 주로 2번, 혹은 3번이었다.
하지만 지난 겨울, 팀이 엄청난 돈을 들여 타이 존슨이라는 거물을 영입하고, 거기에 KBO에서 건너왔다는 동양인이 합류하며 데릭은 1번 자리로 강등 아닌 강등을 당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빅리그에서만 15년을 뛰며 3/4/6의 슬래시 라인을 기록한, 매년 40개 가까운 홈런을 날려 대는 타이 존슨에 대해서야 뭐라 할 말이 없었지만…….
‘저 자식은…….’
자신 대신 2번에 배치된, 본래 자신의 것이었어야 할 2번 자리를 빼앗아간 동양인 타자.
저 녀석만큼은 아직 인정할 수 없었다.
KBO라는 하위 리그를 폭격했다고?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홈런 몇 개를 날렸다고?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지금 빅리그에서 뛰는 녀석들 중 그 정도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한 놈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럴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지만 만약 자신이 KBO에서 뛰었다면?
‘최소 4할 50-50.’
이제 막 개화해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오만함이 가득한 이 젊은 빅리거에게 한수혁이 기록한 한국에서의 영광들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차라리 시범경기에서 그 밑천이 드러났다면 본래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었으려만.
저놈은 루키 주제에 감독의 배려 속에 시범경기를 거의 건너 뛰다시피 했고, 결국 데릭은 개막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 상황을 뒤엎을 수 없었다.
‘음, 그래도 펀치는 꽤 쓸 만했지.’
딱 하나 데릭이 한수혁에 대해 인정하고 있는 건 건방진 마이너리그 놈들 셋을 단숨에 때려 눕힌 그 강력한 펀치였다.
안 그래도 라커룸 분위기를 해치던 녀석들에게 경고를 해주려던 찰나, 한수혁이 먼저 그놈들을 박살 내버렸다.
멋진 펀치였다.
동양무술 같은 거라도 배운 걸까?
어쨌든 그걸 감안해도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플레이!”
‘칫.’
하지만 그런 복잡한 속내와 상관없이 지금은 경기에 집중할 때다.
다른 놈들도 아니고 오클랜드, 저 빌어먹을 놈들과의 개막전이다.
한수혁이라는 루키도 마음에 안 들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안 드는 건 바로 저 A’S 놈들이다.
지난 시즌 내내 일방적으로 밀린 팀 성적, 그리고 베테랑이라는 이유만으로 시애틀의 젊은 타자들에게 으름장을 놓는 몇몇 꼰대들.
그런 놈들에게 또 승리를 내줄 수는 없다.
이긴다.
오늘만큼은 무조건 이긴다.
스스슥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래도 한 팀이니까.’
지난 시즌 시애틀 타자들을 처절하리만치 농락했던 저 오클랜드의 에이스가 한수혁을 상대로 어떤 승부를 펼칠지 눈에 훤하다.
아마도 몸쪽 공으로 타석에서 물러서게 한 후 최종적으로는 바깥쪽으로 흐르는 커터로 병살타를 유도하려 할 거다.
우타자를 상대로 던지는 저놈의 커터는 마구에 가깝다.
대부분은 헛스윙, 맞아봐야 1루 땅볼.
그런 사태를 막아내려면 자신이 1루에서 활발하게 움직여줘야 한다.
타닷
“세이프!”
“우우우!”
“빌어먹을! 그냥 승부해!”
도루를 할 듯 스타트를 반복하며 투수의 신경을 계속 건드렸다.
다시 말하지만 팀을 위한 거다. 한수혁, 저 건방진 놈을 위해서가 아니라.
퍼엉
“볼!”
1루 주자와 몇 차례 신경전을 벌인 투수가 이제 본격적인 타자와의 승부에 들어갔다.
예상한 대로 몸 쪽 높은 곳으로 들어온 초구.
일반적인 타자 같으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설 그런 공이었지만, 한수혁은 아무 감흥도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타격 자세를 취했다.
확실히 깡 하나는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하긴 그런 놈이니까 셋이나 되는 덩치들과 싸움을 벌인 거겠지.
하지만 야구선수에게 중요한 건 깡이 아니라 실력이다.
저 무시무시한 오클랜드 에이스의 공을 날려버릴 수 있는 실력.
‘별 수 없지. 내가 더 도와줘야지.’
두 번 세 번 강조하지만 이건 팀을 위한 거다. 결단코 한수혁을 위한 것이 아니다.
슈웅
“세이프!”
1번 타자 역할이 영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베이스 러닝에는 자신이 있다.
데릭 플레밍의 활발한 움직임에 투수의 얼굴에 짜증이 떠올랐다.
‘음, 의외로 내가 1번에 소질이 있는 건가?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버리며 다시 리드 폭을 넓혀갔다.
아무리 주자가 도와준다 해도 결국 투수의 공을 때리는 건 타자의 몫이다.
제발 저 건방진 루키가 병살타만큼은 치지 않기를.
그 빌어먹을 커터를 건드려 맥없는 땅볼 타구를 만들어내지 않기를.
데릭이 마음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한수혁을 위한 기도를 올리던 그때,
슈웅
투수가 자신의 주무기인 바깥쪽 커터를 뿌렸고,
‘치잇.’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눈치챈 주자가 2루를 향해 스타트를 끊으려던 그 순간,
따아아아아아아악!
“커헉!”
어마어마한 타격음과 함께 하얀 물체 하나가 데릭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지난 시즌 시애틀 타자들의 방망이 수십 자루를 부러뜨리며 땅볼 타구를 양산해냈던 그 커터를 한수혁이 그대로 밀어 쳐버렸다.
“우오오오오……?”
“뭐야? 어디까지 솟는 건데?”
일직선이 아닌 포물선에 가까운, 다른 타자들과는 전혀 다른 한수혁의 타구 궤적에 관중들이 함성을 잠시 멈춘 채 그 공을 계속 눈으로 쫓았다.
이제는 떨어지겠지, 떨어질 때가 됐겠지.
“어, 어, 저거…….”
슬금슬금 타구를 쫓아 뒷걸음질 치던 우익수가 어느새 펜스 앞에까지 밀려났다.
하지만 타구는 여전히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지난 겨울 동안 늘어난 한수혁의 파워가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뚫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터엉
타구가 구장 우측을 가로막고 있는 개폐식 지붕을 강타했다.
만약 일반적인 구장이었다면 장외홈런이 되었을 타구.
홈런을 맞은 투수도, 타구를 쫓아 끝까지 따라갔던 우익수도, 그리고 팬들도,
모두 입을 쩍 벌린 채 아무것도 못 하고 있던 그때,
휘릭
타석에 선 채 그대로 타구를 감상하던 한수혁이 배트를 뒤로 휙 집어 던지고 1루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와아아아아!”
“말도 안 돼! 저게 저기까지 날아간다고!”
“미친! 뭐야! 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홈 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대 루키가 빅리그에서 금기시되는 홈런 타구 감상, 배트 플립을 골고루 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오클랜드 선수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한수혁을 노려보았다.
“데릭, 뭐 해? 홈으로 가야지.”
“아, 아, 네, 코치.”
그 말도 안 되는 홈런에 놀란 건 상대 선수들뿐만이 아니었다.
병살타를 막기 위해 1루에서 죽을 힘을 다했던 데릭이 얼빠진 표정으로 2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홈런이라고? 그게 넘어갔다고?’
한수혁에 대한 반감 같은 건 어느새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날아가버렸다.
1회가 시작되자마자 저 꼴 보기 싫은 오클랜드 놈들에게 한 방을 먹여줬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하늘을 날아오를 것처럼 느껴졌다.
“후우!”
2루를 돌아, 3루로, 다시 홈으로.
투런 홈런을 맞은 게 기분이 나쁜 것인지, 아니면 배트 플립을 당한 게 열받은 것인지 몰라도 2루수와 3루수가 그를 향해 욕설을 내뱉았다.
하지만 못 들은 척 넘겨버렸다.
괜히 시비라도 붙었다가 이 좋은 흐름이 깨질 수도 있고, 베테랑에 싸움꾼이 즐비한 저 오클랜드 녀석들을 상대하기에 자신을 포함한 시애틀 선수들은 아직 어리고 부족하니까.
‘참자. 지금 중요한 건 우리가 2점을 선취했다는 거지.’
하지만 상황은 참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아무것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 눈과 귀를 닫고 홈플레이트를 밟는 데릭의 귓가에 오클랜드 포수의 욕설이 날아들었다.
“저 건방진 루키에게 분명히 전해. 다음 타석에서는 머리통을 터뜨려버릴 거라고.”
“뭐?”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지난번에 내가 말했지? 한 번만 더 눈에 거슬리면 죽여버릴 거라고. 애송이, 각오하라고.”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이…….”
“열받아? 아니, 무서워? 그럼 당장 너희들의 그 냄새 나고 더러운 고향으로 돌아가. 아, 돌아갈 차비는 있나? 없어? 없으면 저놈하고 네 차비 정도는 내가 마련해주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지만 자신의 고향인 베네수엘라에 대한 긍지를 잊지 않고 있는 데릭에게 그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데릭이 발끈했고, 포수가 콧방귀를 끼며 또 한 번 욕설을 내뱉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캐치한 주심이 둘을 떼어 놓기 위해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만, 그만!”
“아니, 방금 저 자식이 한 말 못 들었나요? 이봐요! 지금 저 녀석이 내 고향을 모욕했다고요!”
“알았으니 일단 물러서!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면 퇴장이야!”
아직까지 확실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주심이 오히려 데릭을 향해 경고를 줬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판의 말처럼 여기서 더 이상 일을 키워봐야 자신만 퇴장을 당할 뿐이다. 일단 경기부터 끝내고 구단을 통해 정식으로 항의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데릭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아내던 그때,
터억
천천히 다이아몬드를 돌아온 한수혁이 드디어 홈을 밟았다.
심판의 신경이 흥분한 데릭에게 온통 쏠려 있는 것을 확인한 포수가 한수혁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이 건방진 루키 자식, 다음 번 타석에서는 머리통을 날려버릴 거다. 아예 박살을 내서 네 그 더러운 고향으로…….”
하지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주전 포수이자 리그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던 데스몬드 킹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퍼어어어억!
한수혁의 강력한 어퍼컷이 놈의 턱을 날려버렸다.
입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가는 100㎏이 넘는 거구.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양팀 선수들과 팬들이 얼빠진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주먹 한 방으로 데스몬드의 턱을 박살 내버린 한수혁이 쓰러진 녀석의 몸에 올라탔다.
퍼어억!
퍼억!
“다시 한번 말해봐. 내 고향이 어쨌다고?”
“그만! 그만!”
양팀 선수들이 뒤늦게 홈플레이트를 향해 우르르 달려 나왔고, 대기타석에 있던 타이 존슨이 달려들어 간신히 한수혁을 떼어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수혁에게 세 방을 얻어맞은 데스몬드 킹은 입에 거품을 문 채 기절한 상태였다.
“빌어먹을! 그래! 다 죽여버려!”
“속이 다 시원하군! 좋아! 내가 간다! 내 펀치 맛을 보여주지!”
“망할 놈의 오클랜드 촌놈들, 죽여버릴 거다!”
분노한 양팀 선수들이 그라운드 이곳저곳에서 충돌을 벌이고, 앰뷸런스가 들어와 기절한 데스몬드 킹을 실어 나르고, 주심이 한수혁을 향해 퇴장 명령을 내리고.
선수들 이상으로 흥분한 관중들 일부가 그라운드로 난입하고, 거기에 작은 체구의 동양인 여자 하나가 입에 거품을 물고 사방으로 날뛰고.
그렇게 한수혁의 빅리그 두 번째 데뷔전이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