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1화(22/412)
#21. 같이 걷는 법
“그러니까··· 옆집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런 걸 주고 갔다 이거지?”
“응.”
수상한 이웃들이 다녀가고 몇시간 후, 오랜만에 내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온 성훈이 형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자연산 송이부터 시작해 최고급 로열제리에 절인 장뇌삼 등등 뭔가 보기만 해도 비싸 보이는 건강식품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게··· 집들이 선물이라고? 이런 고급 아파트에서는 보통 이런 걸 주고받나?”
“글쎄··· 나도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그런데 너 이거 먹을 수는 있어?”
“제이콥한테 물어보니까 거기 몇 가지는 먹어도 된다네. 나머지는 형이 가져가서 먹든지.”
“진짜?”
“어, 기왕 받은 건데 누가 됐든 먹어야지. 버릴 수는 없잖아.”
고작 스물 중반밖에 안 된 양반이, 그렇다고 현역 운동선수도 아닌 양반이 건강식품이라는 소리에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제이콥에 의해 복용불가 판정을 받은 것들을 쇼핑백에 담아 성훈이 형에게 건네주었다.
“그나저나 어제 통화할 때는 목소리가 축 쳐져 있더니 오늘은 괜찮네?”
“나? 아아, 진짜 골 아프던 문제가 싸악 해결됐거든.”
“골 아픈 문제?”
“어, 연예인 시구랑 인플루언서 마케팅이랑 응원가 등등 예산 들어갈 일이 한가득이었는데··· 그게 방금 전 한 방에 해결됐어. 그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크크.”
“그래? 다행이네.”
“하아, 내가 그것 때문에 박 단장한테 시달린 걸 생각하면··· 야, 부르지도 않은 민예린이 구단 사무실로 먼저 찾아와서 자기가 시구 하겠다고, 그거 말고도 연예인 마케팅 필요한 거 있으면 무조건 자기가 다 하겠다는데 깜짝 놀랐다. 야.”
“민예린? 그게 누구인데?”
“민예린을 몰라? 나는 너의 뒷모습이 좋은데~ 이 노래를 모른다고?”
“몰라 그런 거.”
“하아, 이거 진짜··· 예나 지금이나 야구 말고는 아는 게. 너 일상생활은 가능하냐? 아, 사진 보면 알려나? 누군가 하면···”
“그건 됐고, 구단 일은 형이 알아서 하고 그보다 오타니 룰 적용문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으음, 일단 이번 스토브리그 사장단 회의에서는 결론이 안 날 것 같네. 일단 너 외에는 투타겸업 할 선수 자체가 없는 데다가 당장 너도 올 시즌은 타자로만 뛸 거니까.”
“그렇지.”
“거기 사장들 얼마나 꼬장꼬장한지 휴, 아무튼 기다려봐. 내가 올 한 해 동안 열심히 여론 만들어서 어떻게든 내년에는 적응이 되도록 할 테니까.”
당장 올해는 필요 없을지 몰라도 오타니 룰 적용은 내게 반드시 필요한 숙제다.
현재는 메이저리그에만 적용되어 있는, 투수 겸 타자로 나선 선수가 다른 투수로 교체되더라도 지명타자로 계속 뛰게 허용하는 오타니 룰을 꼭 관철시켜야 한다.
뭐, 아주 급한 건 아니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흠, 근데 형. 캠프 가기 전보다 얼굴이 좀 좋아진 거 같은데?”
“그래? 내가 좋은 상담선생을 만나서.”
“다행이네. 아무튼 그럼 나중에 구장에서 보자. 나 샤워 좀 하고 제이콥 만나러 연습장 나가봐야 하니까.”
“야, 근데 넌 저녁도 안 먹어?”
“샤워하고 닭가슴살이랑 야채즙 대충 먹으면 돼.”
“그럼 나는? 너랑 먹으려고 밥 안 먹고 나왔는데.”
“나가면서 사 먹든지 해. 어차피 우리 집에 먹을 거 하나도 없어.”
“하아··· 그래, 알았다. 가면서 김밥이나 사 먹어야겠네. 그럼 나 간다. 쉬어.”
“어, 가. 그리고 이거 쇼핑백 갖고 가야지.”
“아, 맞다. 고마워. 잘 먹을게.”
성훈이 형을 배웅한 나는 다시 거실 쇼파로 돌아와 몸을 기댔다.
수상한 옆집 이웃이 주고 간 선물, 그리고 남자가 건넨 명함.
골드만삭스 부사장 민태현이라는 명함에 시선이 간다.
언제든 자기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꼭 불러 달라고 했지.
그러고보니 내 통장에 500억이라는 돈이 잠들어 있다.
구단을 위해 투자한 천억이 엄청난 거액이기는 하지만 사실 장기적으로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돈을 마저 야구단에 넣지 않은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 인간이 남긴 천 오백억의 유산 중 적어도 이 정도는 어머니의 몫으로 남겨 놓고 싶었다.
만약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이 돈을 어디에 쓰셨을지 짐작할 수 없었기에, 혹시나 다른 곳에 쓸 일이 생길까 해서 일단은 그냥 남겨 두기로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머니라면 이 돈마저 내 앞으로 밀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다.
아들아,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렴. 그게 뭐든지 엄마는 응원하마.
예전에는 몰랐다.
스무 살 철부지였던 나는, 어머니를 잃고 세상과 홀로 싸워야 했던 나는 그저 내가 성공하는 것만이 어머니에 대한 보답이며, 우리를 버린 그 인간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렸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성훈이 형이 병에 걸려 죽어갈 때조차 나는 내 자신의 성공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렇게 모든 걸 버리고 혼자 달려간 길의 끝에는 지독한 허무함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보셨으면 많이 슬퍼하셨을, 부와 명예를 가졌으되 옆에 아무도 남지 않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을 보고 계시다면 좋겠다.
이제는 정말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릴 자신이 있는데.
* * *
“음, 좋아. 몸 상태는 퍼펙트해.”
“그래요? 하체 밸런스가 살짝 미묘하게 틀어진 거 같은데.”
“그건 아마 성장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그런 걸 거야. 그나저나 연습 투구도 한 번 했다고? 연습중인 투구 폼 느낌은 어땠지?”
“음··· 어찌어찌 구속은 나오는데 아직 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없더군요. 힘 전달도 제대로 안 되는 것 같고.”
“그럴 거야. 지금 그 몸은 타자를 하기에 좀 더 적합하게 셋팅되어 있으니까. 뭐, 아직 시간이 1년이나 남았으니 천천히 준비해보자고.”
“어쩌면 6개월 후가 될 수도 있어요.”
“음? 아아, 한국시리즈 7차전? 풋, 내가 한국야구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이 팀은 메이저리그의··· 말하자면 템파베이 같은 팀이더군. 돈이 없어서 선수들 팔아먹고, 탱킹해서 선수 모으고. 그런 팀이 올해 월드, 아니 한국시리즈에 올라간다고?”
“···말이 너무 심하네요. 제이콥. 템파베이라니.”
“크크, 난 그저 현실을 얘기한 것뿐이야. 아무튼 난 1년의 기간에 맞춰서 자네의 몸을 만들어 나갈테니 그 즐거운 공상은 일단 접어두자고.”
“좋아요, 모든 걸 결과로 말하는 법이니까.”
내 개인 트레이너가 된 제이콥은 업무를 위해 꼭 필요한 몇 가지 기계들의 구매를 요청했다.
계좌에 있던 돈 중 적지 않은 돈이 그 기계들을 구매하는데 들어갔다.
쓸 만한 선수 하나 정도는 영입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돈이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내 몸만 제대로 만들어지면 그런 선수 한두 명 영입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역시 생각대로다.
오늘 체크한 내 공식적인 바디 프로필은 192cm에 95kg, 체지방 17%.
타자를 하기에는 딱 적당한 수치였지만 투수 겸업을 위해서는 체지방을 20%까지 올려야 한다는 게 제이콥의 의견이었고, 나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문제는 내 신체가 아직도 미세하게나마 성장중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성장기의 육체에는 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제이콥은 하루 세끼 철저하게 관리하던 내 식단 중 한 끼를 자유롭게 먹도록 변경했다.
최대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라는 말과 함께.
여하튼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물론 나는 지금의 이 육체로도 충분한 성적을 거둘 자신이 있었다.
빅리그에서 15년간 최상위 단계에서 놀던 몸이다.
아무리 회귀 때문에 밸런스가 엉망진창이 됐다 해도 그래봐야 KBO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뭐든지 말이다.
오늘 꿈에서 느낀 그 무력감, 내 눈앞에서 어머니와 성훈이 형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또 한 번 보고 나니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해진다.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조차도.
‘저벅저벅’
연습장을 나오니 어느새 거리가 네온사인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미국에서 야구를 할 때는 이런 여유를 조금도 갖지 못했다.
그 시절 나는 오로지 메이저리거로서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저 야구하는 기계나 다름없었다.
집과 경기장을 오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던,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오직 나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아가던 이기주의자.
뚜벅뚜벅
길을 걸으며 생각해 보니 성훈이 형한테 저녁도 안 먹이고 보낸 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밥을 같이 먹는 게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보니 나도 모르게 쫓아내듯 보내 버리고 말았다.
섭섭했으려나.
그래, 오늘은 그 형하고 같이 저녁이라도 먹어볼까.
“반반으로 한 마리 주세요. 음··· 감자 튀김도 추가해주시고 생맥도 한 잔. 포장해가겠습니다.”
“네, 반반 치킨 한 마리, 감자튀김 추가, 생맥주··· 어머, 한수혁 선수 아니세요?”
“아, 네. 맞습니다.”
“어머,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여보! 이리 나와봐요! 우리 가게에 한수혁 선수 오셨어!”
“뭐? 이 여편네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우리 가게에 누가 와··· 커헉!”
“봐봐, 내 말이 맞지? 한수혁 선수, 저희 워리어스 팬이에요! 잠실야구장 앞에서 치킨 팔아 돈 모아서 여기에 가게 냈거든요.”
“그러시군요. 저도 어릴 때부터 잠실야구장 많이 다녔으니 먹어 봤을 수도 있겠네요.”
“진짜요? 와··· 아무튼 저희 가게 찾아주셔서 가문의 영광···”
“여보! 일단 가서 치킨부터 올려. 빨리, 빨리!”
“아,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한수혁 선수. 내가 최대한 맛있게 해올께요!”
“빨리 해와. 저기··· 근데 한수혁 선수, 뭐 하나만 좀 물어도···”
“말씀하세요.”
“올해 워리어스··· 가을야구 가능할까요?”
성훈이 형의 오피스텔로 향하는 도로변, 작고 허름한 치킨집에서 만난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가을 야구가 가능하겠냐고.
한때 포스트시즌 진출 정도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시절 워리어스를 기억하는 올드팬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당연하죠. 제 목표는 우승입니다.”
“하하! 그래요, 한수혁 선수가 그렇게 말하니까 믿음이 확 가네! 어어, 이게 뭐야? 계산? 에이, 우리가 한수혁 선수한테 돈을 어떻게 받아? 이건 그냥 오래된 팬이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맛있게 먹고, 다음부터는 돈 받을게요. 그때는 꼭 받을 테니까 이건 넣어둬.”
가게를 나서는 내 손에는 이름 모를 팬이 건네 준 치킨과 생맥주가 들려 있었다.
봄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 밤공기는 차다. 밖으로 내놓은 손이 살짝 시릴 정도로.
그런데 음식이 든 비닐봉투에서 올라온 따뜻한 기운이 그런 내 손을 훈훈하게 데워주었다.
“성훈이 형, 저녁 먹었어? 뭐? 아직도? 음, 기다려봐. 나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까. 치킨하고 생맥주 샀으니까 한 잔 하자. 어, 한 끼 정도는 이렇게 먹어도 괜찮아. 금방 갈게.”
평생 혼자에 익숙했던 나는 이제야 비로서 다른 사람과 같이 걷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처음에는 혼자 가는 것보다 조금 느릴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이 오히려 훨씬 빠르고, 종국에는 내가 목적했던 그곳으로 인도해준다는 것을 알기에.
먹어 본지 너무 오래 되어 이제는 맛조차 가물가물한 이 치킨 한 마리와 생맥주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이제 난 혼자가 아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