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2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20화(221/412)
#220. 사는 게 뭘까
‘어이구야… 이거 미치겠네, 정말.’
선두 타자 홈런으로 기분 좋은 1점을 선취하며 에인절스의 1회초 공격이 끝났다.
팀이 선취점을 따냈지만 오늘 에인절스의 마운드를 책임지게 될 선발투수 류한결의 가슴은 터질 듯이 답답했다.
그의 시선이 전광판에 새겨진 시애틀 매리너스의 라인업으로 향했다.
1번 중견수 데릭 플레밍
2번 3루수 한수혁
3번 1루수 타이 존슨
4번 우익수 척 클락
5번 좌익수 짐 브라운
6번 지명타자 안토니오 가르시아
7번 포수 브루스 매튜스
8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
9번 2루수 조나단 오웬스
선발투수 조나 버로우
‘돌겄구먼.’
지난 시즌 류한결은 매리너스를 상대로 세 번 선발로 등판해 2승, 평균 자책점 2.01의 성적을 기록했다. 쉽게 말해 호구를 잡았다는 뜻이다.
2027시즌 리그 최하위로 떨어졌던 에인절스는 류한결의 활약에 힘입어 2028시즌 매리너스를 밟고 4위로 올라섰고, 그 다음 해에는 두 번째 한국 선수인 이찬호를 영입하며 또 한 번 순위가 상승했다. 물론 시애틀 덕분이었다.
오클랜드 정도는 아니었지만 에인절스에게도 매리너스는 아주 손쉽게 뽑아 먹을 수 있는 주머니 속 사탕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특히나 KBO부터 멘탈로 유명했던 류한결에게 시애틀의 혈기왕성한 타자들은 너무나도 쉬운 상대들이었다.
하지만,
고작 2명, 타이 존슨과 한수혁, 두 명이 추가되었을 뿐이건만.
지난 시즌까지 말랑말랑한 마쉬멜로처럼 느껴지던 시애틀 타선이 단단한 화강암처럼 느껴진다.
숨이 턱턱 막힌다. 한수혁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KBO 시절 한수혁에게 언제나 정면 승부를 걸었던 임준영과 달리 류한결은 굳이 그를 상대하지 않고 다른 타자에게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나는 소년 가장에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대부분 좋은 결과로 돌아오곤 했다.
문제는 이제 그런 좋은 시절은 다 갔다는 거다.
한수혁을 거른다고?
그 뒤 타자가 지난 시즌 타율 3할, 출루율 4할, 장타율 6할에 47홈런 140타점을 기록한, 미국 최고 타자 타이 존슨이다.
그럼 타이 존슨까지 거르면?
주자 두 명을 루상에 두고 혈기왕성한 시애틀의 젊은 거포들을 상대해야 한다.
‘어이구야…….’
안 된다.
이곳은 조금만 실수해도 곧바로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빅리그다.
한수혁을 거르고, 다음 타자에게 병살타를 기대했던 KBO와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제야 한수혁이 왜 시애틀을 고른 건지 십분 이해가 되었다.
저 녀석은 자신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무대를 원했던 거다.
‘우쩐디야… 우쩐디야…….’
그렇게 류한결이 이도 저도 못하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 사이,
“플레이!”
그 속도 모르는 주심의 원망스러운 경기 개시 사인이 구장에 울려 퍼졌다.
* * *
“저 질척질척한 놈하고 같은 국적이라고 했지?”
“맞아.”
“젠장, 2년을 봤는데도 저 녀석 체인지업 타이밍은 도저히 모르겠어. 혹시 뭔가 팁 같은 건 없을까?”
“글쎄, 나도 상대한 지 오래 돼서.”
“흠, 좋아. 딱히 해답을 기대한 건 아니니까. 그보다… 손가락은 괜찮은 거겠지?”
“손가락? 손가락은 왜?”
“펀치를 날린 후유증은 없는지 궁금해서.”
“전혀, 그런 유리 턱을 때렸다고 망가질 손가락은 아니라서.”
“다행이군. 좋아, 그럼 내가 최대한 저 녀석의 공을 많이 보게 해줄 테니. 잘 지켜보라고.”
개막전 벤치 클리어링 이후 이상할 정도로 내게 친근하게 구는, 우리 팀의 리드오프 데릭 플레밍이 비장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류한결의 약점이라…….
글쎄, 지난 2년간 그가 빅리그에서 뛴 영상을 확인해본 결과 KBO 시절 갖고 있던 버릇들은 깨끗이 고쳐진 상태였다.
우리 팀 타자들이 2년 연속 류한결에게 당한 건 경험 부족 때문일 것이다.
빅리그 3년 차에 불과하지만 그에 앞서 대전 팔콘스라는 막장팀을 혼자서 7년 동안 책임져온, 닳고 닳은 투수가 바로 류한결이니 말이다.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Fuck!”
뻔히 알고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체인지업이 존 안으로 들어왔다.
KBO 시절 체인지업을 주로 승부구로 사용하던 류한결은 빅리그로 넘어온 후 그 비율을 조금 더 높인 모양이다.
하긴 내가 봐도 류한결이 던지는 구종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게 체인지업이다.
한창 때보다는 조금 떨어진 포심 구속에도 불구하고 그가 에인절스의 2선발을 맡고 있는 건 바로 저 체인지업 덕분이었다.
슈웅
따악
“아웃!”
흠,
이것 참…….
“공 오래 보겠다며?”
“젠장. 미안해, 친구.”
그렇게 데릭이 2구 만에 내야수 뜬공으로 물러나고, 오랜만에 류한결과 나의 승부가 시작되었다.
KBO에서 우리 둘 사이의 대결은 단순히 타자와 투수 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든 내 뒤 타자, 그러니까 맥스라든지, 조성오 선배, 안치욱을 키워서 류한결이 나를 거르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고, 반대로 류한결은 불안한 수비 때문에 내게 마음대로 공을 던지지 못했다.
뭐… 생각해보면 우리 둘 다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
류한결의 뒤에는 빅리그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팔콘스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비진이 버티고 있고,
“어떻게든 나가봐. 내가 홈으로 불러들여주지.”
“그냥 홈런 치고 빨리 들어가서 쉬려고요.”
“흠,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언제나 볼넷을 걱정해야 했던 나는 타이 존슨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만나 이렇게 마음껏 배트를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오늘 이 타석이 류한결과 나와의 진정한 첫 번째 대결일지도 몰랐다.
“플레이!”
두 번째 삶이 반복되며 어떤 것은 변했고, 또 어떤 것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전 내가 졸업 후 곧바로 미국으로 진출하고, 마이너리그를 거쳐 마침내 빅리그에 올라왔을 때도 리그 전체에 한국 선수라고는 류한결과 이찬호가 전부였다.
그건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건 그때도 에인절스 선수였던 류한결과 달리, 샌프란시스코를 선택했던 이찬호가 뜬금없이 에인절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는 거다.
저 선수의 운명이 바뀐 게 꼭 나 때문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영향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또 너무 양심 없는 짓일 것이다.
이렇게 나는 회귀 전과 회귀 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죄책감, 혹은 부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닌 걸 알지만,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냥,
그냥 그런 거다.
이 세상에서 어디 하소연할 곳 하나 없는 나만의 고민 같은 거다.
슈웅
파아앙!
“볼.”
내가 민예린에게 그녀의 행방을 찾아 달라 부탁한 지도 벌써 2년이 흘렀다.
가장 중요한 이름을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몇몇 정황들만 가지고 사람을 찾는 게 쉬울 리 없다. 그것도 이 드넓은 미국 땅에서.
그래서 가끔은 마음이 조급해진다.
또 한편으로는 어느 순간 그녀를 찾았다는 연락이 올까 가슴이 철렁할 때도 있다.
만에 하나 그녀가 예전 내가 알고 있는 그 모습이 아니라면,
어릴 적 데뷔해 오랜 시간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아티스트가 아닌, 그보다 못한, 어쩌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면?
슈유웅
파아앙!
“스트라이크!”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당신의 운명은 그게 아니라고, 지금이라도 음악을 시작하라고 말해줘야 할까?
아니면 그것 역시 그녀의 운명일 거라 생각하며 못 본 척 뒤돌아서야 하는 걸까?
슈웅
파앙!
“볼.”
젠장, 기분이 또 이상해졌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닌데, 승부에 집중할 때인데.
자꾸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고 승부에 집중했다.
볼 카운트 2볼 원 스트라이크.
체인지업 둘, 그리고 포심 하나.
내가 공 세 개를 미동조차 않고 그대로 흘려버리자 류한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마치 내가 포심이나 체인지업이 아닌 다른 공을 노리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는데.
음,
사실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을 한 것뿐인데.
어쨌든 이렇게 되면 류한결의 선택 폭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내가 커브나 커터를 노린다고 생각할 테니, 더더욱 체인지업과 포심 위주로 던질 수밖에.
둘 중 하나, 참으로 고르기 힘든 문제이지만 내 직감이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포심, 다음 공은 포심일 거라고.
100마일이 넘는 공을 쳐내기 위해 조정했던 슬라이드 스텝을 원래대로 돌리고,
예전 류한결의 공을 쳐냈던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하나, 둘, 셋,
슈웅
따아아아아악!
* * *
“형, 인생 다 산 것 같은 표정 하지 말어. 아직 경기 안 끝났어.”
“…찬호야.”
“어.”
“산다는 건 뭘까?”
1회말, 한수혁과 타이 존슨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한 류한결이 넋이 빠진 표정으로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이찬호가 위로해주려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
저러는 이유가 십분 이해가 간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타이 존슨에게 맞은 백투백 홈런은 그렇다 치고, 솔직히 한수혁이 친 타구는 홈런이 될 만한 공은 아니었다.
바깥쪽 존에 정확하게 걸치는, 류한결이 빅리그 선수가 될 수 있게 만들어준 완벽하게 제구 된 포심.
미국에 진출한 후 약간 오픈 스탠스가 된 한수혁의 타격폼을 생각하면 힘을 싣기 상당히 어려운 그런 공이었다.
그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우익수인 자신이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타구가 계속 날아가 펜스를 훌쩍 넘겨버렸다.
빅리그 데뷔 후 두 타석 연속 홈런을 쳐낸 괴물이 싱긋 웃음을 짓더니 얌전히 배트를 내려놓고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배트 플립을 자제한 걸 보니 나름 같은 국적 선배라고 배려를 한 모양인데 솔직히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보였다.
“찬호야.”
“어.”
“아까 내 공 어땠냐?”
“좋았지.”
“그치?”
“맞어. 그걸 친 저놈이 정상이 아니야.”
“젠장…….”
“왜, 또 형.”
“저놈이 시애틀로 올 줄 알았으면 그냥 다른 팀으로 가는 건디.”
“나도, 하아… 대체 왜 쟤는 시애틀 같은 팀으로 온 거야? 양키스랑 다저스가 돈 보따리 싸들고 쫓아다녔다는데.”
“팀 규율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 했다가 그 뒤로는 아예 만나지도 못한 모양이던디.”
“미친, 바보 같은 놈들이네. 저런 녀석 앞에서 규율을 들먹였다고?”
“원래 미국 놈들이 더 꽉 막혔자녀.”
“아우… 그 머저리들 때문에 괜히 우리가 고통을…….”
“찬호야.”
“왜, 괜찮아. 어차피 여기 누가 한국말 알아듣는다고.”
“그게 아니라 너 타격 안 할겨? 대기 타석 들어가야지.”
“아차차, 나 그럼 다녀올게, 형. 아무튼 너무 기 죽지 말고!”
오늘 경기 6번 우익수로 출전한 이찬호가 배트를 들고 대기타석으로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류한결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네가 지옥을 맛볼 차례겠구먼.”
* * *
– 아! 정말 대단한 경기입니다. 1회, 양팀이 세 개의 홈런을 주고받으며 스코어 2 대 1, 시애틀 매리너스가 한 점을 앞서갑니다. 고동식 위원님, 과연 빅리그네요. 확실히 다릅니다. 선수들의 배트가 거침없이 나오네요?
– 네, 물론 메이저리그라고 해서 무지성, 흠, 죄송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배트를 휘두르는 건 절대 아니지만 아무래도 1회부터 타자들이 거리낌없이 풀스윙을 하는 건 국내 팬들에게는 조금 낯선 풍경이겠죠. 어쨌든 오늘 정말 재미있는 경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 한수혁 선수가 뛰고 있는 시애틀 매리너스, 그리고 류한결과 이찬호 선수가 뛰고 있는 LA에인절스 간의 시즌 1차전. 자, 일단 1회초 한국 선수들 간의 첫 번째 대결은 한수혁 선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 맞습니다. 정말 멋진 홈런이었죠. 아까도 설명드렸다시피 저게 넘어가?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제대로 맞은 타구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한수혁 선수라고 해도 작년이었다면 우익수 플라이로 끝났을 타구였죠.
– 역시 빅리그에서 뛰기 위해 체급을 올린 게 유효했던 거겠죠?
– 그렇죠. 거기다가 바로 뒤에 타이 존슨 선수가 버티고 있는 만큼 류한결 선수가 함부로 볼넷을 줄 수 없었던 것도 한몫을 했을 테고요.
– 음, 그래서일까요? 방금 전 한수혁 선수의 표정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 어떤 생각이요?
– 한국에서는 뭐랄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항상 뭔가에 쫓기는 듯하던 한수혁 선수의 얼굴에서 그런 그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 으음.
– 물론 야구에 대해서는 저보다 고동식 위원님이 훨씬 전문가이시지만 아무래도 사람 눈치를 보는 건 직장인인 제가… 흠, 죄송합니다. 어쨌든 한수혁 선수의 밝아진 얼굴을 보니 저 역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럼 류한결 선수와 한수혁 선수 간의 대결을 봤으니 이번에는 이찬호 선수의 타격을 볼 차례죠?
– 네, 이닝 2회초 두 번째 타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볼거리라면 한수혁 선수의 3루 수비 모습이겠죠.
– 그러고 보니… 한수혁 선수가 빅리그 데뷔 후 아직 타구를 처리한 적이 한 번도 없네요?
– 네, 첫 경기에서는 그 머저… 음, 한 이닝밖에 뛰지 못했고, 오늘 1회초 수비에서도 3루 쪽으로는 한 번도 공이 가질 않았죠. 자, 그럼 시청자 여러분. 한수혁 선수의 수비를 마음껏 감상하시죠. 여기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홈구장 T모바일파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