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23)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22화(223/412)
#222. 172㎞
[시즌 초반 돌풍, 시애틀 매리너스 4승 1패로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선두!] [타이 존슨과 한수혁의 합류로 몰라보게 탄탄해진 타격, 그리고 불안감을 해소해낸 수비력] [3경기에서 홈런 세 개 기록한 한수혁, 이제 남은 건 빅리그 마운드 적응 여부뿐] [에인절스에 2연승 거둔 매리너스, 3차전 선발로 한수혁 예고]“편하게 던지라고 친구, 부담 안 가져도 돼. 어차피 시즌은 이제 막 시작됐으니까. 음, 그건 그렇고 내가 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지. 혹시 지금 시간 좀 괜찮을까?”
이상할 정도로 내게 들러붙는 놈이 또 하나 늘어났다.
메이저리그 첫 선발, 아니, 내 기준으로 한다면 두 번째 선발 데뷔전을 앞둔 라커룸.
얼마 전부터 내 주변을 빙빙 맴도는 중견수 데릭에 이어 이번에는 유격수 조쉬 올리버가 자꾸 친한 척 말을 걸어온다.
나이를 기준으로 하면 나보다 몇 살이 많은,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풋내기로밖에 안 보이는 녀석들이다.
“너희들, 그만 적당히 하고 물러나. 오늘 선발투수에게 무슨 짓이야?”
“라이언, 그게 아니라…….”
타이 존슨이 입단하기 전만 해도 명실상부한 팀의 리더였던, 이곳 시애틀에서 나고 자라 결국 매리너스의 에이스로 올라선 라이언이 두 녀석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라이언 티보우와 나 사이의 관계는 아직 서먹하다 말해야 할 것 같다.
저 녀석 입장에서는 지난 WBC에서 내게 당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을 것이고, 나야 뭐 굳이 녀석에게 친한 척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색한 게 당연한 거겠지.
언제고 저 녀석이 먼저 다가온다면 억지로 밀어낼 생각은 없지만, 내가 먼저 친해지자고 나설 일도 없을 거 같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라이언, 저 녀석의 몫이다.
“돌아가. 할 말이 있거든 나중에 경기 끝나고 하든지.”
“좋아, 알았어.”
투수라는 존재는 예민하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나 선발 투수는 더더욱.
그렇기에 보통 라커룸의 리더는 타자가 맡게 마련이다.
하지만 지난 시즌까지 애송이들로 가득했던 시애틀에는 그런 리더의 자리를 책임질 타자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실력, 나이, 성격, 정통성, 리더로서의 책임감.
결국 모든 면에서 팀 내 독보적 존재였던 라이언은 라커룸 리더의 역할을 받아들였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런 라이언의 위치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라이언이 내게 슬쩍 눈짓을 보낸 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제 딴에는 빅리그 투수로서 첫 데뷔전을 치르게 된 나를 배려한 모양인데…….
고맙기는 하지만 사실 딱히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고작 이런 걸로 긴장을 하기에 나는 너무 오래 야구를 해온 것 같다.
* * *
“피치컴 사용법은 확실히 익힌 거지?”
“물론.”
“음, 그런데 구종은… 9개… 이걸 다 사용할 건 아니겠지?”
“일단 세팅은 해두자고. 던질지 안 던질지는 나중에 판단하고 말이야.”
“흐으음… 아무리 그래도… 좋아, 일단 알았어. 그럼 준비해 보자고.”
오늘 나와 호흡을 맞출 포수 브루스 매튜스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렉가드 위에 부착된 검은색 단말기가 유독 눈에 띈다.
2030년 기준 메이저리그와 KBO리그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바로 이 피치컴일 것이다.
미국의 국기인 프로야구의 인기가 계속 하락하자 사무국이 칼을 뽑아 들고 나섰다.
그들은 야구 인기 하락의 원인이 갈수록 늘어지는 경기 시간과 정적인 분위기, 비신사적인 행동 등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몇 가지 규정과 시스템이 있는데 피치컴도 그중 하나였다.
그 어떤 전자기기의 사용도 불허되던 그라운드 위에 이런 우스꽝스러운 장비가 도입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빅리그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사인 훔치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야구장 내 구석구석에 설치된 카메라와 여기에 연결된 AI가 선수들, 그리고 공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시대다.
홈팀에서 마음만 먹으면 포수와 투수 간의 사인을 훔치는 건 일도 아니란 뜻이다.
물론 사인 훔치기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KBO와 달리 메이저리그에서 사인 훔치기 자체는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니다. 즉, 2루에 나간 주자가 능력껏 포수의 사인을 훔쳐 타자에게 전달할 경우 그것만으로는 규정 위반이 아니라는 뜻이다.
문제는 현대 야구에서 거의 모든 사인 훔치기는 전자기기를 이용해 이뤄진다는 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전자기기를 이용한 사인 훔치기는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다.
그런 규정 위반 행위가 계속되자 빅리그 각 팀들은 사인을 이중삼중 복잡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고, 가짜 사인과 진짜 사인을 전달하느라 경기 시간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게 바로 이 피치컴이다.
“안 되겠어. 너희 리그에서는 피치컴을 사용 안 한다며? 불안한데 한 번만 더 체크해 보자고.”
“브루스.”
“음?”
“걱정 말고, 가서 공 받을 준비나 해. 완벽하게 숙지했으니까.”
“흐음… 이것 참.”
피치컴은 쉽게 말해 포수가 찬 단말기, 그리고 거기서 송신된 내용을 음성으로 전달받을 수 있는 여러 개의 수신기로 구성된 통신 시스템이다.
포수가 단말기에 구종과 코스를 선택해 입력하면 그것이 음성으로 변환되어 송신기를 착용한 투수, 그리고 수비수들에게 전달된다.
그 지시에 따라 투수는 공을 던지고, 수비수는 수비 위치를 잡는다.
사인 훔치기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또한 포수와 투수, 그리고 수비수들 간의 의사소통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좋아, 그럼 일단 믿고 가보지. 뭔가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말하고.”
포수의 얼굴에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다.
당연한 일이다.
이제 막 빅리그 데뷔전을 치르는, 피치컴이 없는 리그에서 뛰던 내가 못미더운 것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다.
지난 삶에서 나는 피치컴의 혜택을 가장 크게 누리던 투수 중 하나였다.
타자가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승부를 가져가는 걸 즐기던 내게 피치컴은 날개를 달아주었다.
사실 KBO에서 뛸 때 내가 가장 아쉬워했던 게 바로 이 피치컴의 부재였다.
슈웅
퍼엉
연습투구가 끝나고, 송수신기의 상태를 체크하고,
“플레이!”
주심의 입에서 경기 개시 사인이 나오며, 드디어 내 두 번째 빅리그 투수 데뷔전이 시작되었다.
* * *
시애틀 매리너스의 안방을 4년째 책임지고 있는, 그리고 하위타선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브루스 매튜스는 생각했다.
‘일단 한두 점은 내줄 생각을 해야겠군.’
한수혁이라는 투수가 지난 두 번의 국제대회에서 얼마나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는지, 그리고 KBO에서 어떤 투수였는지는 영상을 통해 충분히 확인했다.
하지만 미국인 중에서도 특히 보수적인 편에 속하는 그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은 건 잘 믿지 않는 타입이었다.
지난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제대로 된 투구를 하지 않았던 한수혁은 시범경기에서도 고작 1이닝만을 소화했다.
물론 그가 투구 연습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체중을 늘리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밸런스를 조절하기 위해 개인 트레이너, 그리고 전담 불펜 포수와 함께 비공개 연습에 전념했다는 게 문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브루스 매튜스는 이 팀의 주전 포수이지만 투수 한수혁의 공을 거의 받아보지 못했다.
자신을 대신해 스프링 트레이닝 내내 한수혁을 전담했던 불펜 포수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깜짝 놀라겠군. 빌어먹을, 올해까지만 하고 이 짓도 때려 치려고 했는데 조금 더 해봐야겠어.’
나이가 제법 많은, 틈만 나면 불펜 포수를 때려치고 고향에 돌아가 술집을 차리겠다고 주절거리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에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입 투수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치레 같은 거라 생각했다.
술주정뱅이의 허풍 같은 거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몸쪽 낮은 코스 포심.’
피치컴을 통해 투수에게 사인이 전달되고, 그걸 들은 투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침내 한수혁이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그저 공을 던지기 위한 준비 자세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동작이 시작된 것만으로 뭔가 느낌이 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미안한 말이지만 이 팀의 에이스인 라이언 티보우에게서조차 느낄 수 없었던 압도적인 위압감이 한수혁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타앗
투수의 손끝에서 하얀 공이 발사되었다.
포수 미트를 움직일 필요조차 없었다.
그가 처음 의도했던 몸쪽 가장 낮은 코스, 그곳을 향해 총알같이 날아온 공이 그대로 미트로 파고 들었다.
퍼어어어엉!
“스트라이크!”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빠르기는 둘째 치고 미친 듯한 제구력이었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사인을 내고 그곳으로 포수 미트를 가져다 댄 게 전부였다.
프레이밍은커녕 미트를 움직일 필요조차 없는 공이었다.
브루스가 얼빠진 표정으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107마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숫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우아아아아아!”
“107! 107! 미친! 107마일이라고!”
지난 20년간 깨지지 않았던, 메이저리그 최고 구속 기록이 경신되던 순간이었다.
* * *
“172㎞/h! 172㎞/! 으아아아아! 고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여기 한수혁 선수가 기존 최고 구속이었던 170을 가볍게 뛰어 넘는 172㎞/h, 세계 신기록을 달성했습니다! 한수혁! 한수혀어어억!”
입에 허연 거품을 물고 눈이 회까닥 뒤집힌 채로 한수혁의 이름을 연호하는 고동식을 보며 아나운서는 생각했다.
누가 보면 한수혁이 나라를 구한 줄 알겠다고.
‘음.’
가만히 생각해 보니 WBC와 올림픽에서 나라를 구한 적이 있긴 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아나운서가 고동식의 멘트를 받아주었다.
“대단합니다! 구속 혁명 시대를 지나면서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났지만 106마일, 그러니까 170㎞/h의 벽을 넘어선 투수는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었죠. KBO에서 기록한 170㎞/h로 세계 최고 구속 역대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던 한수혁 선수가 마침내 1위 기록인 170.3㎞/h를 훌쩍 넘어선, 172㎞/h를 던지며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되었습니다.”
“우아아아아아아!”
해설자인지 관중일지 모를 정도로 흥분한, 지금 이 상태로는 도저히 말이 안 통할 거 같은 고동식을 보며 아나운서가 생각했다.
그가 이렇게 자세한 자료를 준비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한수혁 덕분이었다.
오늘 경기 전 라커룸 인터뷰에서 한수혁이 말했다.
‘위원님, 아나운서님, 혹시 세계 최고 구속 기록에 대해 아시나요?’
‘최고 구속이요? 당연히 알죠. 음, 한수혁 선수가 170㎞/h로 2위이고… 1위가 그러니까… 170…….’
‘170.3㎞/h죠. 2010년에 기록된’
‘아, 네, 맞네요. 맞아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음, 그냥요. 갑자기 그 생각이 들어서. 아무튼 혹시 모르니 그 기록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체크해 두세요.’
이제 와 생각하니 자신들에게 힌트를 준 것이었다.
오늘 스스로 그 기록을 깨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110마일 가즈아아아!”
이제는 완전히 유행이 지나버린, 대한민국이 코인 열풍에 뒤덮였던 당시 쓰였다던 유행어를 들으며 아나운서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중계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야구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정말 야구, 아니, 한수혁이 없는 세상은 재미가 없어 못 살 것 같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