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27)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26화(227/412)
#226. 팀보다 위대한 선수
“저놈이군.”
“맞아,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거절한 놈.”
“거기에 우리의 귀중한 휴식 시간을 빼앗아간 놈이기도 하지.”
시애틀 매리너스와 뉴욕 양키스 간의 2차전이 오후 경기에서 저녁 경기로 갑자기 변경되었다.
전국 중계를 위한 ESPN의 요청 때문이었다.
계절에 따라 오후, 혹은 저녁으로 시간대가 고정되는 KBO와 달리 메이저리그의 경기 시간은 매번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경된다.
이동일이 겹치는 날에는 빨리 경기 끝내고 비행기 타라고 오전 이른 시간에 경기를 하기도 하고, 지금처럼 미 전역으로의 중계가 잡히는 날에는 저녁으로 시간대가 밀리기도 한다.
오후 2시로 예정되었던 경기가 갑자기 저녁 시간으로 미뤄진 것에 대해 양키스 선수들이 불만을 내뱉았다.
“저 녀석, 저번 경기도 전국 중계였다며?”
“빌어먹을, 아시아 시장이 크긴 큰가 보군.”
“뭐, 중국 인구가 30억이라고 하니까.”
“30억이 아니라 15억이야. 그리고 너희들, 방금 그 발언은 조금 위험했어.”
“인종 차별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시장 크기를 말한 거야. 아시아 마케팅 때문에 우리 휴식 시간이 줄어든 건 사실이잖아. 이건 중국 시장을 겨냥한 게 확실하다고.”
“바보 같은 놈들, 너희 세계사 시간에 뭘 배운 거야? 저 녀석은 코리안이라고. 차이니즈가 아니고.”
“그게 뭐? 바로 옆에 붙은 나라 아냐?”
“쯧쯧, 한국, 일본, 중국, 저 세 나라는 역사적으로 절대 가까워질 수 없… 휴, 됐다. 뇌 속까지 근육만 가득 찬 이 바보들을 데리고 내가 무슨 말을.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몸이나 풀어.”
“흠, 캡틴. 애인하고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왜 이렇게 저기압…….”
“닥치고, 얼른!”
미국 내 야구의 인기가 점점 하락세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이곳 뉴욕에서만큼은 예외다.
이곳에는 레알 마드리드, 댈러스 카우보이스, FC바르셀로나 등과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가치 높은 프로 스포츠 구단으로 손꼽히는 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메츠를 말하는 게 아니다.
뉴욕 양키스, 일명 악의 제국이라 불리는 미국, 아니, 전 세계 최고의 야구 명문 구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난 겨울, 한수혁이 미국 진출 의사를 밝혔을 때 뉴욕 양키스 역시 그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막강한 자금력과 리그 최고 수준의 팜 시스템으로 인해 매년 우승 후보로 꼽히기는 하지만 막상 양키스가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지 벌써 20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뉴욕의 영원한 캡틴 데릭 지터를 필두로 앤디 페티트와 호르헤 포사다, 마리아노 리베라 등이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고 있던 2009년이 마지막 우승 시즌이었다는 뜻이다.
사실 외부적으로 알려진 이미지, 그러니까 돈으로 선수를 사 모은다는 그런 이미지와 달리 양키스는 자체적인 팜 시스템을 통해 스타를 만들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팀이었다.
2009년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 당시 주역 멤버인 데릭 지터, 호르헤 포사다, 마리아노 리베라, 앤디 페티트가 그랬고, 잦은 부상으로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택한 애런 저지 역시 양키스 팜이 길러낸 슈퍼스타였다.
‘망할 자식, 그냥 우리 팀으로 올 것이지.’
선수들을 그라운드 위로 올려 보내고 홀로 덕아웃을 지키고 있는 양키스의 캡틴 루카스 앤더슨은 한수혁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난 포스팅 경쟁에서 한수혁에게 파트너십 계약 포함 가장 많은 돈을 약속한 것은 양키스였다.
한수혁 영입을 위해 사장이 직접 한국으로 건너가 프리젠테이션을 했으니 정성이 모자랐다고 보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그가 조건으로 내세웠다는 미국 최상급 타자의 존재 여부에서도 양키스는 전혀 밀릴 게 없었다.
지난 시즌 3/4/5의 슬래시 라인에 45홈런 40도루 125타점을 기록한 자신이 있지 않은가?
비록 커리어 면에서 타이 존슨에게 밀리기는 하지만 대신 자신에게는 미국, 아니, 세계 최고 팀의 캡틴이라는 명예가 존재하지 않는가?
‘어차피 용모 규정에 걸릴 것도 없는 놈이 대체 왜…….’
때문에 양키스 사장은 한수혁의 영입을 자신했었다. 무조건 그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오겠다고 구단주에게 호언장담했었다.
한수혁을 데려옴으로써 이번 시즌 양키스의 약점으로 꼽히는 투수력 부족과 내야 수비 불안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거기 아직도 선수들 턱수염이나 헤어스타일 관리하죠?’
‘네? 아, 뭐… 그렇기는 한데 한수혁 선수는 어차피 그런 쪽하고는…….’
‘알았어요. 일단 돌아가세요. 에이전트 통해서 연락드리죠.’
그것이 양키스 구단과 한수혁 간의 마지막 대화였다.
구단의 역사, 그리고 전통에 대한 소개를 하는 중에 한수혁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용모 규정에 대해 물었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서도 장발이나 턱수염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한수혁 아닌가?
갑자기 머리가 기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강인해 보이기 위해 턱수염을 기르려고 했던 걸까?
당황한 사장이 한수혁에게는 그런 규정을 적용시키지 않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결국 그런 변명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한수혁의 시애틀 계약 소식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설마 내가 타이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루카스 앤더슨이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데릭 지터에서 애런 저지, 그리고 현재 루카스 앤더슨으로 이어지는 양키스 캡틴 계보.
하지만 루카스는 실력에 비해 항상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자신보다 커리어 면에서 한 발 앞서 가고 있는 타이 존슨과의 비교 때문에 그랬고, 내부적으로는 역대 양키스 주장들에 비해 실력과 인지도 면에서 조금 부족하다는 평가가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매년 3할 30-30, 혹은 40-40까지도 가능한 공수 겸장, 호타 준족의 대명사인 그이지만, 루카스에게는 전임 주장들만큼의 카리스마와 인지도가 없었다.
때문에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항상 루카스 앤더슨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미국 최고 명문 야구팀의 주장이 그 모양이니 야구 인기가 이 지경이다 뭐 그런 논리였다.
‘젠장, 모든 야구선수가 데릭 지터처럼 될 수는 없는 거라고.’
데릭 지터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풍미하며 뉴욕의 황제, 혹은 뉴욕의 연인이라 불릴 수 있었던 건 그의 야구 실력 외에도 잘생긴 외모와 능수능란한 언변, 그리고 구단의 지원, 거기에 시대적 배경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줄 호르헤 포사다, 마리아노 리베라, 앤디 페티트, 버니 윌리암스 같은 최고의 동료들이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루카스의 곁에 있는 동료들은 그 정도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올 시즌에도 양키스는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우승 후보지만 팀 전력만 놓고 보면 그때 그 화려했던 멤버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한수혁의 입단을 원했다. WBC에서 자신이 직접 확인한 한수혁의 기량이라면 자신과 함께 양키스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 놓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두고 봐라. 내가 그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동료들이 한수혁에 대한 험담을 하는 걸 말리기는 했지만 사실 그에 대한 반감이 가장 큰 건 다름 아닌 루카스 자신이었다.
양키스를 거절하고 시애틀을 선택한 한수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양키스의 캡틴인 그는 생각했다.
미국 야구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이곳 양키스타디움에서 한수혁을 박살 내 주겠다고, 시애틀을 선택한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깨닫게 해주겠다고 말이다.
* * *
“자, 제군들. 오늘 스타팅 라인업 확인하고, 선발에서 빠졌더라도 언제 경기에 투입될지 모르니 정신 놓지 말고 계속 긴장하도록. 그럼 이상.”
벤자민 감독이 작성한 스타팅 라인업 용지가 덕아웃 한쪽 벽면에 붙었다.
양키스타디움에서 치르는 경기는 언제나 부담스럽다.
전력은 둘째 치고,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세계 최고 도시에서 양키스 같은 명문 구단과 맞붙는 건 여러 모로 심적인 소모를 불러오게 된다.
하지만,
오늘 선발투수인 한수혁은 그런 것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덕아웃에 앉아 있었다.
1번 중견수 데릭 플레밍
2번 투수 한수혁
3번 1루수 타이 존슨
4번 우익수 척 클락
5번 좌익수 짐 브라운
6번 포수 브루스 매튜스
7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
8번 3루수 로니 몬타릭
9번 2루수 조나단 오웬스
오늘 시애틀 매리너스의 선발 라인업이다.
선발로 등판하는 날에는 비교적 부담이 적은 하위 타선에 배치되던 한국에서와 달리 빅리그에서 그는 2번 타자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등 뒤에 타이 존슨을 두고 경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빅리그로 넘어온 후 한수혁이 가장 만족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고의사구에서의 해방이었다.
시즌 초반인 데다가 아직 한수혁에 대한 경계심이 심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역시 바로 뒤에 미국 최고의 타자 타이 존슨이 버티고 있는 효과였다.
자신이 야구선수로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빅리그로 건너온 한수혁에게 그건 가장 큰 선물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오늘 한수혁은 2번 선발투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빠진 3루수 자리에는 만능 백업요원인 로니 몬타릭이 투입되었다.
한수혁의 첫 번째 선발 등판 경기에서 에러를 저질렀던, 그래서 퍼펙트 게임을 무산시켰던 바로 그 백업요원이었다.
아직까지도 그때의 일이 마음에 남은 걸까.
로니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한수혁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헤이, 한.”
“음, 로니.”
“네 덕분에 가끔 이렇게 선발로 뛰게 되었군. 좋아, 고마워.”
“쓸데없는 소리를.”
“아니, 정말이야. 작년까지 저 팀에서 뛸 때는 선발로 나오는 경기가 일 년 중 손에 꼽을 정도였거든.”
로니 몬타릭이 저 멀리 양키스 덕아웃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때 양키스 팜에서 꽤나 유망주 취급을 받던 그는 결국 빅리그에서 주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백업을 전전하다가 올 시즌 전 시애틀로 트레이드 되었다.
그래서일까, 로니의 표정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참 동안 뭔가를 생각하던 로니가 한수혁에게 물었다.
“그런데 한,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좋아. 양키스에서도 제안을 받았다고 들었어. 심지어 금액 차이도 엄청났다지. 그런데 그걸 거절한 이유를 물어도 될까?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라면 그냥 듣고 잊어버려도 좋아.”
로니의 말에 한수혁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별 거 아니야. 그냥 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
“건방진 태도?”
“구단의 역사, 전통을 들먹이면서 용모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데… 그거 사실 역사와 전통이 아니라 예전 구단주, 그 꼰대 영감이 멋대로 정해 놓은 거잖아. 그걸 그런 식으로 포장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고…….”
“아아, 그랬군. 그리고?”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느니 하면서 유니폼에 선수 이름을 생략하는 것도 우습고.”
“그게 왜?”
양키스에서 야구를 배우고 데뷔한 로니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가 없다는 말, 그것이야말로 야구의 로망을 담은 멋진 문장 아닌가?
하지만 한수혁의 생각은 그것과 조금 다른 듯했다.
로니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경기 준비를 마친 한수혁이 벤치에서 엉덩이를 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팀보다 위대한 선수가 되는 게 목표라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