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3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31화(232/412)
#231. 떠오르는 기억
“음, 라이언. 아까부터 뭔가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봐. 오늘 선발투수의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할 정도로 내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니까.”
“네? 아, 아닙니다, 감독님. 그게 아니라…….”
“아니긴, 확실히 뭔가 있구만. 왜? 6선발 로테이션에 맞추는 게 힘든가?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아니, 확실히 그럴 거야. 하지만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그 부분은 시즌을 진행하면서…….”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감독님.”
“음?”
“제 로테이션이 문제가 아니라…….”
“그럼 뭐가 문제인 거지?”
“…후, 아닙니다. 저는 그럼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좋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다시 찾아오라고. 감독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
경기 전 감독과의 대화를 마친 오늘의 선발 투수 라이언 티보우가 감독실을 나와 그라운드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에 오늘 아침 있었던 부인, 그리고 딸과의 전화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 오늘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길 바랄게요, 여보.
‘그래, 고마워, 미아. 아, 라일리는? 유치원에서 아직 안 돌아왔지?’
– 돌아왔어요. 자기 방에서 책 보고 있을 거예요. 아직 파티에 참가할 친구들이 도착 안 했거든요.
‘미안해. 라일리 생일에 매번 함께해 주지 못해서.’
– 아니에요. 메이저리거를 남편으로 뒀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라일리 생일 파티는 걱정하지 말고 양키스 놈들, 꼭 혼내주세요.
‘알았어. 최선을 다해서 던져볼게. 사랑해.’
– 저도요, 그럼 이따가 라일리 생일 파티 영상 찍어서 보내드릴게요.
고등학교 후배였던 부인과 일찍 결혼한 라이언은 이미 여섯 살이 된 딸 아이를 둔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런 그가 일 년 중 가장 힘들어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딸의 생일.
지난 몇 년간 원정 경기가 계속 겹치며 딸의 생일을 한 번도 챙겨주지 못한 게 너무나도 마음에 걸린다.
라이언은 알고 있다.
딸이 얼마나 자신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함께하지 못하는 날에는 아빠의 경기 중계를 보며 얼마나 열심히 응원을 하는지.
그렇기에 파티에 참석은 못 하더라도 딸에게 자신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운이 없게도 오늘 상대가 뉴욕 양키스다.
라이언이 데뷔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승리를 따내지 못한 팀.
지난 7년간 양키스전에 총 12번 선발 등판한 라이언의 통산 기록은 0승 6패, 거기에 평균자책점은 무려 6점대에 육박했다.
양키스의 타선이 강하기는 하지만, 이건 단순히 그런 문제만은 아니었다.
공격력만 놓고 보면 양키스보다 한 발 앞서는 레드 삭스 같은 팀을 상대로도 라이언은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냥 징크스 같은 거다. 뭔가 첫 단추를 잘못 꿰다 보니 계속 꼬이고 꼬이게 된 징크스.
“헤이, 라이언. 오늘 컨디션은 어때?”
“음, 괜찮아. 너는?”
“어제 그놈 공을 받느라 좀 지쳤지만… 흐흐, 맥주를 실컷 마시고 푹 잤더니 한결 나아졌어. 지금은 아주 좋아.”
“맥주라… 젠장, 실책이 나오면 벤치에 포수 교체를 요청할 거야, 브루스”
“젠장, 농담도 못 하겠군. 맥주는 무슨, 호텔에 가자마자 그대로 뻗었다가 일어나니 오늘 아침이더라고. 후, 어제는 내 생애 제일 힘든 날 중 하나였어.”
맥주를 마셨다는 말이 농담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던 라이언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워낙 대단한 경기를 치러서 그런지 다들 피곤해 보이기는 하지만 마주치는 동료들의 표정이 어제까지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얼굴 가득 들어차 있던 절망감, 어차피 우리는 안 된다는 무기력감 대신 오늘 경기에서도 이기겠다는 각오가 들어차 있었다.
라이언은 알고 있다.
저런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팀의 4연패를 끊어내는, 아니, 그걸로도 모자라 혼자 사이클링 히트와 퍼펙트 게임을 동시에 이뤄낸 말도 안 되는 존재.
그라운드에 서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이곳 양키스타디움의 공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슈퍼 루키.
한수혁.
언젠가는 자신과 에이스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될 라이벌이자 동료.
‘젠장, 역시 감독에게 말을 해볼 걸 그랬나.’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 라이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단 하나,
이기고 싶다. 오늘 저 양키스 놈들에게 이기고 싶다.
딸 아이에게 아빠가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 생각뿐이었다.
지난 수년간 자신을 괴롭혀 온 징크스를 끝내고 싶고, 인터넷으로 자신의 경기를 지켜볼 딸아이에게 승리를 선물하고 싶었다.
딸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친구들 앞에서 딸이 울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왜 하필 등판 순서가 이 모양이냐고!’
시즌 초반에 한정한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6선발 체제가 가동되며 한수혁은 선발 등판 다음 날, 그러니까 1선발인 라이언이 등판하는 날에는 라인업에서 완전히 빠진 채 휴식을 갖고 있다.
수비도 물론 문제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가 빠진 타선이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한수혁이 2번에 서고, 그 뒤에 타이 존슨이 서는 게 얼마나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오는지 말이다.
어떤 수를 써서든 오늘 경기에 이기고 싶은 라이언으로서는 한수혁이 하필 자신의 등판일에 휴식을 취한다는 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결국 이것 역시 1선발이 짊어져야 할 운명일 것을.
라이언의 애타는 마음과 상관없이 시간은 흘렀고, 결국 시애틀과 양키스 간의 3차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타임!”
“후… 빌어먹을.”
7회말까지 단 2점만 내주며 역대 양키스전 중 가장 좋은 페이스를 보이던 라이언이 8회말 선두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하자 투수 코치가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에 올랐다.
“좋아, 라이언, 혹시 지쳤나? 참고로 제이크가 완전히 몸을 푼 상태야.”
“아뇨, 코치. 아직 멀쩡합니다. 조금 더 던지고 싶습니다.”
딸 아이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던진 덕분일까, 7회까지 라이언이 기록한 투구 수는 고작 90개에 불과했다.
팔의 악력도, 몸에 에너지도, 그리고 정신력도, 아직 충분하다.
문제는 지금 두 팀이 2 대 2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는 것과, 다음 타자가 다름 아닌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루카스 앤더슨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라이언이 양키스전에서 이상하리만치 약했던 건 루카스와의 대결에서 일방적으로 밀린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통산 상대 타율 0.605, 이 정도면 천적을 넘어 거의 저승사자 수준이다.
다행히도 오늘 라이언은 그 루카스를 3번 상대해 3번 모두 범타로 처리했다.
머릿속으로 이런 상황들을 차분하게 정리한 투수코치가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는지 덕아웃으로 시선을 돌렸다.
감독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조금 더 믿고 가보자는 뜻이었다.
이번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시애틀로서는 자신들의 에이스가 양키스 징크스에서 벗어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가을야구에 진출한다면 높은 확률로 양키스를 상대해야 할 테니 말이다.
“플레이!”
결국 벤치의 허락을 받은 라이언은 조금 더 마운드를 지키게 되었다.
무사 주자 1루 상황, 타석에 선 루카스 앤더슨이 진중한 표정으로 라이언을 노려보았다.
언제 봐도 재수 없는 얼굴이다.
경기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 건방진 얼굴을 일그러뜨려 주고 싶다.
지쳐가는 몸을 쥐어짜 현재 그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을 뿌렸다.
투수의 손끝에서 공이 떠나갔다.
슈웅
그리고 다음 순간,
따아아아악!
시애틀의 에이스가 그대로 마운드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2 대 2, 팽팽하던 경기를 4 대 2로 만드는 루카스 앤더슨의 투런 홈런이었다.
* * *
“히잉… 히이잉, 대디!”
“라일리! 이런, 제롬. 미안한데 이만 컴퓨터를 꺼야겠구나. 괜찮겠지?”
“네? 네, 네, 전 괜찮아요.”
“고마워. 그럼 다들 야구는 그만 보고 정원에 나가서 재미있는 놀이라도 할까?”
주방에서 쿠키를 굽고 있던 미아, 방금 전 투런 홈런을 허용한 시애틀 에이스 라이언 티보우의 부인 미아 티보우가 우는 딸 아이를 끌어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차라리 예전이 좋았다.
TV로 중계를 해주지 않으면 원정 경기는 아예 볼 수가 없었던 그때가 좋았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이 된 딸이 어디서 배웠는지 메이저리그전 경기 인터넷 중계 시청권을 결제해 달라고 했을 때 그냥 모른 척했어야 했다.
홈런을 맞고 무너진 아빠,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 딸 아이.
기분 좋게 시작된 아이의 생일 파티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더욱 속상한 건 모니터 화면 속 남편의 모습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남편이 양키스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그리고 팀의 에이스로서 얼마나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그래서 더 속상하고, 슬프고, 남편이 안쓰러웠다.
‘여보… 힘내요.’
* * *
어제 내가 기록한 퍼펙트 경기, 그리고 오늘 라이언의 분전으로 활활 타오르던 덕아웃 분위기가 순식간에 장례식장처럼 가라앉았다.
7회까지 잘 버티던 라이언은 결국 8회 루카스 앤더슨이라는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다행히 다음 세 타자를 범타로 잡아내며 8회말을 마무리하긴 했지만, 순식간에 스코어가 4 대 2로 벌어져 버렸다.
오늘 경기 내내 양키스의 투수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던 시애틀 타자들이 마지막 남은 단 한 번의 공격에서 역전을 하길 기대하는 건 솔직히 조금 어려워 보였다.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오래 입은 유니폼은 다름 아닌 이 시애틀 매리너스의 것이다.
예전 삶을 포함한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 팀의 선수들과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
그것이 내 잘못인지, 아니면 저 녀석들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내가 라이언 저 녀석의 울상 짓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거다.
“라이언, 괜찮아.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
“젠장, 아직 안 끝났다고.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니까?”
방금 전까지는 나 역시 이유를 몰랐다.
오늘 라이언이 왜 저렇게까지 양키스 타자들과의 승부에 집착하는지, 월드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등판한 투수처럼 열심히 공을 던지는지 말이다.
하지만 방금 전 덕아웃에서 누군가 수근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잊고 있던 사실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오늘이 바로 저 라이언 녀석의 딸 생일이라는 것 말이다.
이제는 너무나 오래전 이야기이지만 라이언을 쏙 빼 닮은 어떤 아이의 얼굴이 생각난다.
그때만 해도 아이를 어떻게 다루는지 잘 몰랐기에 그냥 거리를 둔 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항상 나를 보면 손을 흔들며 웃던 착한 아이였던 것 같다.
음…….
따아아악!
“좋았어! 나이스!”
“안 끝났어! 아직 안 끝났다고!”
9회초 매리너스의 마지막 공격.
4번, 5번 타자가 연속 삼진으로 물러나며 그대로 끝날 것 같던 경기 분위기가 브루스 매튜스의 안타와 함께 다시 한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투 아웃이기는 하지만 큰 것 한 방이면 동점도 가능한 상황.
시애틀 벤치가 바빠졌다.
“타임! 대타!”
오늘 세 번 연속 삼진으로 물러났던 유격수 조쉬 올리버를 대신해 대타가 선언되었다.
순간 벤치에 앉아 있던 코치, 그리고 선수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저 멀리 타격 코치와 배터리 코치가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을 내보내면 안 될까? 여기서 가장 믿을 만한 카드는 저 친구잖아?”
“안 돼.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더군. 선발 투수 등판 다음 날에는 경기 출전 명령을 거부할 권한이 있다고 말이야.”
맞다.
분명 내 계약서에는 그런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내 요청으로 삽입된 것이다.
100개가 넘는 공을 던진 다음 날이면 충분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달아오른 육체를 냉각시킬 필요가 있다. 괜히 수비나 공격을 하다가 근육이 손상될 수도 있다.
물론 지금 당장이야 내게 협조적인 감독과 단장이 있기에 상관없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황병호 같은 영감이 갑자기 감독으로 와서 나를 자기 멋대로 주무르는 건 방지해야 할 것 아닌가. 물론 진짜 그런 상황이 오면 나는 미련 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지만.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내게로 향했던 관심이 사라지고, 왼손 전문 대타가 타석에 들어섰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미국을 대표하는 투수 중 하나인 그가 아이싱을 한 채 다리를 달달 떨며 그라운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예전 삶에서 결국 미국 최고 에이스의 자리에 올라섰던 녀석이건만, 이렇게 보니 아직 얼굴에 앳된 끼가 남아 있다.
음,
저 녀석도 벌써 스물아홉인데 앳되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 정신 연령은 그보다 훨씬 많으니 말이다.
슈웅
부웅
“스윙!”
“아아!”
“마이크! 괜찮아! 별 거 아니야! 힘내라고!”
큰 헛스윙을 한 대타가 헬멧을 탁탁 두드리며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진다.
이 팀에서 꽤 오랜 시간을 전문 대타로 살아남은 선수다.
배트 스피드는 느려지고, 동체 시력도 영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이런 중요한 순간 자신의 스윙을 할 수 있기에 빅리그에서 저렇게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거다.
기적을 바라는 선수들이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응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동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데 성공했다.
따악!
“오오오!”
“좋아! 젠장! 빌어먹을! 멋졌어!”
비록 유격수에게 잡히기는 했지만 1루에서 살아남기에는 충분한 깊숙한 내야 안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베테랑이 세상 밝은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팔을 쫙 들어 올렸다.
4 대 2 두 점 차, 투 아웃 주자 1, 2루.
이제는 2루타 한 방이면 동점, 큰 것이 나오면 역전도 가능한 상황.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라이언을 쳐다보았다.
평소 여자 연예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손톱 관리에 신경을 쓰던 녀석이 미친 듯한 속도로 손톱을 물어 뜯고 있었다.
피식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던 녀석의 딸이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에게 걸어갔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감독님.”
“음?”
순간 덕아웃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라이언의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져 있었다.
“빨리 경기를 끝내지 않으면 우리 에이스 손톱이 엉망이 될 것 같아서요.”
라이언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눈가에 살짝 습기가 맺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임! 타임!”
내 갑작스러운 말에 살짝 놀란 감독이 서둘러 타임을 요청했다.
배트를 들고 덕아웃을 나와 그라운드에 발을 디뎠다.
“뭐야, 저 자식… 오늘 쉬는 거 아니었어?”
“빌어먹을, 또 저 자식이야?”
코 앞까지 다가온 승리를 예감하며 한껏 달아올랐던 양키스 팬들이 숨을 죽인 채 나를 바라보았다.
좋다.
아무래도 내게는 빌런의 DNA가 흐르나 보다.
나 때문에 누군가 환호하는 것보다 이렇게 나 때문에 누군가 침묵하고, 절망하는 것이 미치도록 즐겁다.
부웅
배트를 몇 번 더 휘두른 후 곧바로 타석에 들어섰다.
투아웃까지 잘 잡아 놓고 순식간에 주자 두 명을 내보내 위기를 자처한 양키스의 마무리 투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플레이!”
사인이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 고개를 흔들어 대던 투수가 결심을 마쳤는지 천천히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양키스의 주전 마무리답게 흠잡을 데 하나 없이 깔끔한 셋업 모션.
그리고 투수의 손 끝에서 하얀 공이 떠올랐다.
순간 그 공이 커브라는 걸 직감한 나는 그 속도와 궤적에 맞춰 스윙을 시작했다.
따아아아아악!
공과 배트가 한 점에서 만나는 순간,
갑자기 라이언의 딸 아이의 이름이 떠올랐다.
라일리 티보우, 그래,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우우우우!”
“뭐 해! 이 빌어먹을 자식아! 빨리 뛰어! 뛰라고!”
“죽여! 저 개자식을 죽여!”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1루로 뛰는 걸 잊었다.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려 보니 양키스 놈들의 얼굴에서 당장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다음에 이 녀석들과 경기를 해야 할 때는 머리를 조심…….
젠장,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하다 못해 동료 선수의 딸 이름까지 기억나는 판국에 대체 왜 그 여자의 이름은…….
휘릭
솟구쳐오르는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배트를 허공으로 휙 던져버리고 1루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 미친놈을 죽여! 죽여버리라고!”
“빌어먹을 자식아! 넌 머리통을 조심해야 할 거다!”
관중들의 야유 소리가 더 커졌다.
1루, 2루, 3루,
스쳐가는 양키스 야수들의 표정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그래, 암만 봐도 그냥 넘어가기는 틀린 것 같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 머리로 100마일이 날아오면 녀석들 머리에 107마일을 꽂아주면 그뿐이니까.
“개자식, 넌 다음에 만나면 죽…….”
“입 닥치고 불만 있으면 그냥 지금 덤벼. 머저리 새끼들아.”
덤비지도 못하면서 계속 입만 나불대는 양키스 포수를 눌러주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우아아아! 이런 미친! 한! 젠장! 이 미친놈! 네가 최고야!”
“알아, 내가 최고인 거.”
“흐흐, 흐흐, 흐흐흐흐흐!”
환호하는 동료들 사이 감격스러운 얼굴을 한 라이언이 뻘쭘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을 향해 말해주었다.
“라일리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전해줘.”
“뭐? 네가 우리 딸 이름을 어떻게… 내가 말한 적이 있던가?”
“있지. 아주 오래전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미국에서 야구를 하며 예전의 일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잊고 있는 그녀의 이름도 떠올릴 수 있게 될까?
모르겠다.
다만 조금 늦어도 좋으니 언젠가는 꼭 그렇게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