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3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35화(236/412)
#235. 빚을 갚을 차례
내가 예전 삶에서 투수로서 어려움을 겪던 당시, 나를 도와준 두 명의 베테랑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지금 워리어스에서 뛰고 있는 월터 스미스다.
빅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던 백업 포수였던 그는 내게 투수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마인드와 동료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려 애썼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시애틀에서의 생활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점점 떨어지는 구속에 고민하던 내게 다가와 너클볼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권유했던 은퇴 직전의 베테랑 투수.
자신이 은퇴하고 나면 빅리그에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가 하나도 남지 않을 것 같아 아쉽다던 그가 그때보다 훨씬 젊은 얼굴로 내 앞에 서 있다.
“잘 왔어요, 마이크. 그리고 고마워요.”
“음? 고맙다니? 뭐가?”
시애틀에서 보냈던 마지막 시즌, 나는 결국 마이크에게 너클볼을 전수받았다.
포심의 구속과 위력이 점점 떨어져가던 나는 너클볼에서 뭔가 새로운 해답을 찾으려 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강속구 투수에서 너클볼 투수로 전향하려던 찰나 팀을 옮겼고, 옮기자마자 어깨가 터져 마운드에서 완전히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너클볼은 내가 회귀 후 맞이한 첫 번째 한국시리즈에서 드디어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난 내 삶에서 야구와 관련해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월터와 마이크일 것이다.
내게 투수의 마인드에 대해 가르쳐준 월터, 그리고 너클볼을 전수해준 마이크.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우리 팀에 잘 왔어요. 다 잘될 거예요.”
“응?”
예전 삶에서 다저스에서 쫓겨나 한동안 독립리그를 전전하던, 그리고 말년이 되어서야 시애틀 유니폼을 입게 되었던 그는 내 회귀로 인해 조금 일찍 이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가 앞으로 야구선수로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다.
바뀐 운명으로 인해 예전보다 나은 투수가 되길 바라지만, 인생이란 원래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그에게 빚을 졌다는 거고, 지금 내게는 그걸 갚을 능력이 있다는 거다.
나는 그에게 받은 걸 돌려줄 생각이다.
* * *
[다저스에서 시애틀로 유니폼 갈아입은 너클볼 투수 마이크 워렌, 이적 후 첫 선발 등판에서 5이닝 7실점 부진으로 패전투수 기록] [난타 당한 너클볼, 과연 시애틀의 선택은 틀렸던 것인가?] [단독! 밀워키의 젊은 에이스 샤킬 레너드, 양키스 유니폼을 입다] [유망주 셋을 내주고 샤킬 레너드를 품에 안은 양키스 “우리는 언제나 최고의 팀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걸 할 각오가 되어 있다”] [뉴욕 양키스의 선수가 된 샤킬 레너드 “시애틀로의 트레이드 설이 나돌았을 때는 조금 절망스러웠지만 다행히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게 되어 기쁘다”] [시애틀 다니엘 미첼 단장 “샤킬 레너드의 경솔한 발언에 심히 유감을 표한다. 우리는 그와 마이크 워렌을 놓고 고민했지만 돈과 상관없이 우리 팀에 마이크가 더 필요할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양키스 유니폼 입고 첫 선발 등판한 샤킬 레너드, 7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 달성 “유니폼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기쁘다.”] [전날 5이닝 7실점으로 부진했던 마이크 워렌과 대비되는 샤킬 레너드의 이적 후 첫 등판, 시애틀은 돈을 아끼지 말았어야 했다]“젠장!”
전날 오클랜드 타자들에게 난타당하며 5이닝 7실점 패전투수가 된 마이크 워렌이 자신의 라커에 얼굴을 박고 괴로워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방금 전 끝난 오클랜드와의 3차전에서 라이언이 9이닝 3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팀의 연패를 끊었다는 거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인터넷을 통해 자신과 샤킬 레너드에 대한 비교 기사가 나는 것에 대해 마이크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떤 놈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누군가 이번 트레이드에 대한 뒷 이야기를 풀어버렸다.
마이크 워렌과 샤킬 레너드가 동시에 트레이드 매물로 나왔고, 당초 샤킬에게 접근했던 시애틀이 갑자기 마이크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말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한동안 두 사람을 비교하는 기사가 계속 나올지도 모른다.
기자 놈들이야 당사자들이 괴로워하건 말건 대중의 흥미를 자극해 조회수로 먹고 사는 놈들이니 말이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마이크, 괜찮아. 그렇게 기죽을 필요 없어.”
“죄송합니다, 보스.”
이번 원정 9연전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오클랜드전에서 1승 2패로 밀리긴 했지만 시애틀 선수단의 분위기 자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5선발로 뛰게 될 마이크 워렌이 어떤 성적을 기록하느냐에 따라 시애틀의 전반기 성적이 달라질 것이다.
괴로워하는 마이크의 어깨를 감독이 툭툭 두드려주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예린아.”
“네?”
“미안하다.”
“네에?”
“그리고 항상 고맙고.”
“헤에…….”
지난 열흘간의 원정기간 동안 한수혁이 단 한 번도 자신의 메시지에 답변을 안 한 것에 대해 따지려던 민예린이 얼굴이 벌개진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얼마 전까지 뉴욕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지내던 그녀는 한수혁이 원정을 나가 있는 사이 이곳 시애틀에 새로운 집과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걸 자랑하고 싶어서 한수혁에게 사진과 메시지를 한 가득 보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쌓여온 서운한 감정과 답답함이 지금 한수혁의 말 한 마디에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단순히 미안하고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었다.
한수혁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며 민예린은 그에게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뚝뚝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뭔가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지난 몇 년간 그를 지속적으로 관찰한 민예린은 마침내 뭐가 이상한지 깨닫게 되었다.
한수혁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너무 인색했다. 아니, 인색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런 걸 해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큰 마음먹고 그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오빠, 아직 제가 그 여자분을 찾지는 못했지만… 찾게 되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 뭔데? 그냥 지금 바로 들어줄게.’
‘아니, 바로 들어주실 필요는 없고…….’
‘아냐, 그 정도는 해줘야지. 뭔데?’
‘음… 이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그냥 말하라니까?’
‘저는 오빠가 좀 더 솔직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힘들면 힘들다고, 좋으면 좋다고, 혹은 슬프면 슬프다고, 고마운 일이 있으면 고맙다고, 반대로 섭섭한 일이 있으면 섭섭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라요.’
‘응?’
‘적어도 오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제 부탁이에요.’
그런 민예린의 부탁에 대해 한수혁은 결국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애초에 대답 따위는 필요 없었던 것 같다.
오늘 그가 자신에게 한 말.
미안하고 고맙다는 그 말 안에 모든 대답이 담겨 있었으니까.
“오빠.”
“응?”
“오늘도 107마일, 기대해도 되겠죠?”
민예린의 말에 한수혁이 슬쩍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그녀는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늘은 조금 다른 공을 던져보려고.”
“네?”
* * *
시애틀 매리너스의 주전포수로서 지난번 마이크 워렌의 등판 경기에서도 큰 실수 없이 너클볼을 잡아낸 브루스 매튜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뭘 하겠다고?”
“오늘은 너클볼 위주로 던져볼까 하고.”
“너클볼?”
“맞아.”
“107마일 포심을 두고 너클볼은 왜?”
“혹시나 어깨에 부하가 걸렸을 때에 대비하고 싶어서?”
“응?”
“아무튼 감독님하고 코치님한테는 내가 말해 둘 테니 미트만 준비해줘. 아, 피치컴에 너클볼도 입력해놔야겠군. 그럼 부탁해.”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2연전, 그 첫 번째 경기에 선발 등판할 예정인 한수혁이 난데없이 너클볼을 던지겠다고 선언했다.
녀석이 한국에서 한 차례 너클볼을 던졌다는 말을 듣긴 했다. 하지만 다시 던질 일은 없을 거란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걸 모두 떠나 107마일짜리 포심을 던질 수 있는 놈이 너클볼을 던질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 일이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브루스의 머릿속에 지난번 마이크 워렌과 첫 호흡을 맞췄던 그 경기가 떠올랐다.
대학 이후 처음, 근 10년 만에 잡아본 너클볼은 역시나 괴랄하고 까다로웠다.
경기 내내 주구장창 너클볼만 던진 마이크의 공도 그랬는데, 107마일짜리 포심을 던지는 녀석의 너클볼은 또 얼마나 잡기 어려울까.
‘젠장, 내일 잘하면 스포츠신문 1면에 내 얼굴이 올라가겠군.’
너클볼을 잡기 위한 소프트볼용 미트를 챙기며 브루스가 투덜거렸다.
* * *
슈웅
부웅
퍼엉
“스윙!”
“뭐야, 저 자식, 우리를 갖고 노는 건가?”
“70마일? 70마일 너클볼이라고?”
“저놈, 107마일 포심이 주무기라고 하지 않았나? 저건 대체 뭐야?”
시애틀 매리너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 간의 2연전 첫 경기.
1회초 마운드에 올라온 한수혁이 두 개 연속 느린 너클볼을 던지자 토론토 덕아웃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107마일에 달하는 포심을 존 구석구석에 꽂아 넣을 수 있는, 메이저리그에 새로 등장한 강속구 투수를 상대하기 위해 오늘 오전 내내 피칭 머신과 씨름을 했건만.
슈웅
퍼엉
“스윙! 아웃!”
“또 너클볼이라고? 공 세 개 전부 다?”
“젠장, 뭐야. 코치, 이러면 어떻게 하죠? 뭘 노려야 하는 겁니까?”
70마일 너클볼 2개에 이어 이번에는 60마일 너클볼이 허공에서 춤을 추며 날아들자 토론토 1번 타자의 방망이가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삼구 삼진.
당황한 건 토론토 선수들만이 아니었다.
한수혁의 시원시원한 광속구를 보기 위해 구장을 찾았던 시애틀 팬들 역시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 선발투수가 바뀐 건가? 70마일? 60마일? 뭐야, 설마 전광판이 고장 난 건 아니겠지?”
“샘, 이 자식아. 술 좀 그만 마셔. 너 그거 알코올성 치매인 거 알아, 몰라? 투수가 바뀌긴 뭘 바껴? 한수혁이잖아.”
“빌어먹을,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군. 대체 뭐야? 왜 저런 공을 던지는 건데? 갑자기 우리 팀에 너클볼 바람이라도 분 거야?”
시즌 초반, 한수혁을 의심 반 기대 반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시애틀 팬들은 이제 완전히 그의 팬이 되었다.
아직은 경기수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가 타자로서, 그리고 투수로서 리그 최고의 선수가 될 재능을 가졌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시애틀 팬들에게 오늘 한수혁이 보여주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슈웅
부웅
“스윙! 아웃!”
“뭐야? 이번에도 너클볼 3개? 혹시 어깨가 고장이라도 난 거야? 아니, 그걸 떠나서 원래 너클볼을 던질 줄 알았던 거야?”
“젠장,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라고! 좀 더 화끈한 공을 던져 봐!”
한수혁의 너클볼에 맥을 못 추는 토론토 타자들이나,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중들이나, 모두 지금 상황이 어리둥절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수혁은 그런 건 아무 관심없다는 듯 계속 너클볼만을 던져댔다.
그렇게 이닝이 계속 진행되었다.
1회, 2회, 3회, 4회, 그리고 5회.
한수혁이 오직 너클볼 하나로 5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을 때,
그에게 불만을 표하던 관중들이 입을 꾹 닫은 채 한수혁의 공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