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3화(24/412)
#23. 시범경기 (2)
아주 오래전 미국의 한 스포츠 신문에서 현역 야구 감독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질문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당신은 언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가?
일반적으로 예상하기로는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을 때, 좋은 선수를 영입했을 때, 경기에 이겼을 때, 연봉이 올랐을 때 등의 대답을 기대했지만.
총 100여명에 달하는 빅리그 감독과 대학, 고교 야구 감독들 중 절반 이상의 응답자가 이렇게 답했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선발 라인업을 완성하고 가만히 경기 시작을 기다리는 순간이 그나마 유일하게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일단 경기가 시작되면 매 일분일초가 마치 지옥과도 같다고.
“음.”
이제 와서 굳이 예전의 그 케케묵은 기사 내용을 떠올리게 된 건 저 멀리 덕아웃에서 나를 바라보는 이대준 감독의 시선 때문이다.
10여분 전만 해도 당장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하얘졌다 파래졌다 하던 양반이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됐는지 차분한 안색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아마도 자신의 커리어 맨 첫 장에 기록될 오늘의 경기가 부담돼서 일 거다.
이대준을 감독으로 선임한 성훈이 형과 박재철 단장의 선택은 정말 탁월했다.
우리 감독이기는 하지만 참 괜찮은 사람이고 좋은 지도자다.
처음에는 지도자 경력이 전혀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워낙 야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머리도 좋아서 그런지 선수를 보는 눈이 아주 탁월하다.
게다가 한 성격 하는 탓에 카리스마도 있고, 보기보다 섬세한 면도 있어 이래저래 선수들이 감독을 잘 따른다.
경험이 쌓이고 관록이 붙으면 워리어스라는 팀에 썩 잘 어울리는 감독이 될 거다.
“한수혁! 안치욱!”
나와 눈이 마주친 이대준 감독이 나와 안치욱의 이름을 부르며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 눌렀다.
긴장하지 말고 차분하게 하라는 뜻이다.
신인 두 명으로 구성된 3루와 유격수 사이의 공간이 걱정되는 거겠지.
너무 걱정할 필요 없는데.
나는 오늘 이 공간으로 절대 타구가 빠져나가게 두지 않을 생각이니까.
끄덕
내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여주자 감독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올라갔다.
뭐지, 그냥 고개만 끄덕인 것뿐인데 대체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파이팅!”
오늘 데뷔전을 갖는 나와 안치욱, 두 명의 신인을 신경 쓰는 건 비단 감독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1루에 서 있는 최고참 조성오 선배가 아주 큰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음.
그러고 보니 내 진짜 빅리그 데뷔전이 어땠더라.
처음에 스프링캠프에 초청선수로 들어가서··· 맞다, 첫번째 시범경기에 바로 7번 3루수로 선발 출장했었지?
그때 기록이··· 2루타 하나에 안타 하나였나.
아, 타격이 중요한 게 아니구나. 처음 캠프에서 봤을 때부터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던 그 베테랑 유격수 놈.
툭하면 입에 아시안 어쩌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던 그 놈하고 경기중에 말싸움이 붙었었지, 아마.
크크.
그래, 이제야 확실히 기억 난다.
경기 중 타구 처리를 놓고 퍽킹 아시안이라고 하길래 나도 퍽킹 니거라고 맞받아쳤었지.
그랬더니 경기가 끝나자 마자 라커룸에서 나한테 주먹을 날렸고.
어떻게 됐냐고?
그 유격수 놈의 그해 시범경기 출장은 그게 마지막이었지. 나한테 처맞고 앞 이빨 두 개가 날아갔으니까.
아시아 출신 선수들이 얌전하다고 알려져서 그런지 나도 그럴 줄 알았나본데, 그때 나는 진짜 온 몸이 독기로 똘똘 뭉친 상태였으니까.
아무튼 그때 내 데뷔전을 생각해도 이상하게 긴장했던 기억이 하나도 없다.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이미 야구선수로서의 성공을 자신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
젠장,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재수 없기도 하네.
* * *
모두가 기다리던 워리어스의 첫번째 시범경기가 시작되었다.
1회초 우리 팀의 선발투수 라이언 스타크는 부산 타이탄스의 1, 2, 3번 타자를 모두 외야 플라이로 처리했다.
좋은 출발이었다. 그리고 워리어스의 공격이 이어졌다.
1번 타자로 나선 이창모 선배가 부산 타이탄스의 용병 투수로부터 볼넷을 얻어내 1루로 출루했다.
사실 볼넷을 얻었다기보다는 제구력이 안 잡힌 상대 투수가 자멸한 느낌이었는데, 어쨌든 그렇게 무사 1루 찬스가 만들어졌다.
“와아! 한수혁!”
“드디어! 드디어!”
“165km/h를 보여줘!”
타석에서 165km/h를 어떻게 보여줘? 설마 타구속도를 말하는 건가?
흠, 그거라면 잘하면 200km/h도 가능할 것 같은데.
아무튼.
“어이, 슈퍼루키. 반갑다. 오늘 경기 끝나고 한 잔 할까?”
“안녕하세요, 선배님. 제가 술은 전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래? 그럼 고기라도 좀 구울까? 내가 잠실 근처에 한우 기가 막힌 집을 아는데.”
“선배님들에게 물어보고 말씀드릴게요.”
“좋아, 그럼 오늘 처음 만난 기념으로 첫 공은 가운데 패스트볼이다. 하나 쳐봐.”
지난 3년 간 워리어스, 그리고 대전 팔콘스와 함께 최하위를 놓고 치열하게 다퉈온 부산 타이탄스의 포수 구재현이 사람 좋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같이 뛰어본 적은 없지만 다른 선배들을 통해서 이 사람 이야기를 정말 많이도 들었다.
KBO 최고의 주당, 전국 모든 맛집을 꿰고 있는 맛 칼럼리스트, 10개 구단 거의 모든 선수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는 친목왕.
한 마디로 말해서 술 좋아하고, 먹을 것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야구장보다는 동네 슈퍼 평상에 앉아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있으면 딱 어울릴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다.
듣기로는 부산 타이탄스 선수들의 밤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던데···
그나저나 초구 한가운데 패스트볼이라고?
웃기지도 않은 말 장난을.
이게 KBO식 트래시토크 같은 건가?
좋아. 그럼 어디 오랜만에 입 좀 털어볼까.
“기왕 주시는 거 가운데 맛있는 공으로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뭐? 하하. 그래, 그래. 내가 아주 툭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맛난 놈으로 하나 줄게. 기대해봐.”
“네, 미리 감사드립니다.”
뭔가 대화를 주고받은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란 걸 그도 알고 나도 안다.
빅리그나 여기나 포수들이 떠드는 말 중 99%는 아무 의미 없는 얘기들이다.
타자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일명 트래시토크.
하지만, 혹시 모르니 준비는 해둬야겠지.
왼 발을 단단히 고정하고, 타점을 살짝 낮추고, 배트 그립은 귀 밑으로, 무게 중심은 아주 약간 뒤로, 스윙 타이밍은 대충 150km/h 정도의 구속에 맞춰서.
몇 차례 고개를 젓던 상대 투수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가뜩이나 큰 키에 완전한 오버핸드 투구폼을 갖고 있어서인지 거의 2층에서 내려 꽂는 듯한 패스트볼이 날아왔다.
호오.
진짜 한가운데? 내가 안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어쨌든 준다면 감사히 먹어야지.
모든 면에서 그 코스의 공을 때릴 준비가 되어있던 내 육체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기계가 돌아가듯, 정해진 프로세스에 따라.
축을 고정하고, 팔꿈치를 몸통에 딱 붙이고, 허리의 스윙을 이용해 힘을 한 번 축적하고, 다시 어깨로 그 힘을 전달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듯 내리 꽂힌 포심의 궤적이 내 어퍼 스윙과 한 점에서 만났다.
따아아아악!
야구공이 파열되는 듯한 어마어마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마운드에 서 있던 투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고, 등 뒤에 서 있는 타이탄스 포수의 입에서 시발이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홈런을 만들기 위한 최적의 타구 각도는 20에서 25도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극단적인 어퍼스윙에 맞은 타구는 그보다 훨씬 큰 각을 그리며 나아가게 된다.
그렇게 45도 각도로 까마득하게 치솟은 타구가 속도를 멈추지 않고 계속 날아간다.
멀리, 멀리.
외야수들조차 수비를 포기하고 멍하니 타구를 구경했다.
그리고 마침내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타구가 잠실야구장 전광판 한 가운데를 직격했다.
“와아아!”
“한수혁! 한수혁!”
“미친! 첫 타석 홈런이야!”
“오빠! 날 가져!”
관중석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일단 넘어가자.
그보다는 지금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좀 더 신경이 쓰이니까.
“어때? 진짜 하나 줬지? 끝나고 꼭 같이 고기 먹는 거다. 도망가면 내 삐질 기다.”
“······”
풋.
말장난 하다가 한 방 얻어맞은 주제에 허세는.
눈만 마주치면 욕부터 튀어나오는 빅리그 포수들과 15년을 상대한 몸이다.
그런 놈들의 트래시토크에 단련된 내게 KBO 포수들의 말 장난은 그저 어린애들 애교처럼 느껴질 뿐이다.
자.
어쨌든 시범경기 첫 홈런이다.
방망이를 뒤로 휙 집어 던지고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았다.
캠프 청백전과 연습경기에서 이미 몇 차례 홈런을 쳐낸 바 있지만 이렇게 만원관중 앞에서 친 건 회귀 후 처음이다.
관중들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를 온 몸으로 받으니 비로서 내가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미친! 이 놈 진짜 괴물이야!”
“또 첫 타석에서 홈런! 야, 나도 하나 좀 치게 해주라!”
동료들의 환대를 받으며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음.
그나저나 방금 저 투수가 이번 시즌 부산 타이탄스 1선발이라는 거지?
아주 잘근잘근 밟아놔야겠네. 나랑 눈도 못 마주치게.
* * *
“릴렉스, 릴렉스! 토마스, 괜찮아. 시범경기잖아. 오케이, 걱정 돈두댓!”
한수혁에게 초대형 투런홈런을 맞은 용병 투수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다.
그런 투수를 달래기 위해 마운드로 올라온 구재현이 속으로 욕을 내뱉았다.
‘젠장, 맞아도 하필 저런 말도 안 되는 홈런을’
이럴 줄 알았다.
한수혁에게 가운데 패스트볼을 던진다고 했지만 사실 투수에게는 바깥쪽으로 흐르는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저 놈이 얼마나 괴물인지는 워리어스와 연습경기를 가진 다른 팀 선수들을 통해 충분히 전해 들었다.
물론 그래봐야 신인이기에 시즌을 이어가면서 약점이 드러날테지만 당장은 기세가 너무 좋았다.
그런 놈에게 가운데 정직한 공을 던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
그런데 올해 타이탄스에 입단한, 지난 시즌 트리플A에서 탈삼진 2위를 기록했다는 이 용병 놈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 놈이 시애틀 산하 마이너리그 팀 출신이라는 게 문제였다.
자신을 외면한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계약금 350만 달러를 싸 들고 애걸복걸 매달렸다는 아시아의 유망주.
그런 한수혁을 향해 용병은 투지를 불태웠고, 제 나름대로는 혼을 담아 던진 패스트볼이 그대로 담장 너머로 날아가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구재현도 태어나서 그런 홈런은 처음 봤다.
45도 각도로 치솟아 날아간 타구가 잠실야구장 전광판 최상단 시계 바로 옆을 직격했다.
전광판 높이가 조금이라도 낮았다면 잠실야구장 중앙을 넘어 장외홈런이 될 뻔했다.
말도 안 되는 홈런이다.
홈플레이트 뒤에서 그 타구를 본 자신도 이런데 직접 그런 걸 맞은 투수의 심정이 어떨지 대충은 짐작이 간다.
“토마스, 정신차려. 헤이, 여기가 어디인지 기억은 나는 거야? 나는 누군지 알겠고?”
얼마나 충격적인 홈런이었는지, 용병 투수의 손발이 아직까지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구재현의 말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은 채 허옇게 질린 얼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하아, 어디서 저런 괴물이··· 이거 올해는 우리가 꼴찌할 수도 있겠네’
지난 두 시즌 동안 워리어스와 팔콘스 덕분에 탈 꼴찌에 성공했던 부산 타이탄스 주전포수 구재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