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4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41화(242/412)
#241. 보스턴의 심장
2030년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 선수는 바로 직전 해 연평균 4,500만 달러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세인트루이스의 에이스 앤드류 데이비스였다.
그리고 그 뒤가 시애틀과 연평균 4,000만 달러에 계약을 체결한 타이 존슨이었고, 그 외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루카스 앤더슨,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에이스 래리 암스트롱, 시애틀과 10년 계약을 맺은 라이언 티보우 등이 10위권 안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팬들, 그리고 전문가들은 올 시즌으로 계약이 끝나는 이 선수가 어쩌면 앤드류 데이비스를 누르고 메이저리그 최고 연봉자의 자리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것도 투수가 아닌 야수가 말이다.
그의 이름은 제리 와그너, 올해로 33살이 된 보스턴 레드삭스의 주전 포수이자 캡틴, 그리고 중심타선을 맡고 있는 이 시대 최고의 포수라 불리는 선수였다.
“헤이, 반가워.”
“음.”
“좋아, 성격이 과묵한 편인가? WBC나 올림픽 때 내가 출전했으면 미리 친분을 좀 쌓았을 텐데 아쉽네. 아, 만약 그랬다면 네가 우리 팀에 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네 등 뒤를 지켜주기에 나는 조금 부족한가?”
“글쎄.”
“하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타이 존슨이라면 나도 할 말이 없긴 해. 만약 네가 양키스를 갔다면 죽어도 너를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말이지.”
경기장 내 설치된 카메라와 AI가 선수들의 플레이를 초 단위로 분석하고, 거기에 피치컴 같은 시스템이 도입되며 포수의 리드란 개념 자체가 점점 희미해지는 지금,
제리 와그너는 그런 현대 야구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뜻대로 경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경기의 흐름을 읽고 투수를 안정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포수라 불리고 있었다.
그가 최고라 불리는 건 단순히 수비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포수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3/4/5의 슬래시 라인에 서른 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그야말로 공수를 겸비한 최고의 선수인 것이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심장이자 엔진.
이에 보스턴에서는 제리 와그너에게 연평균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계약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리그 전체에 돌고 있었다.
선발 투수도 아닌 포수에게 그런 거액 계약이 타당한가를 놓고 여러 의견들이 충돌하고 있지만, 정작 보스턴 프런트나 팬들은 그가 최고연봉자가 되는 것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돈 몇 푼 때문에 제리 와그너를 놓친다면?
신인 시절부터 그를 호시탐탐 노리던 양키스가 돈 보따리를 들고 제리 와그너의 에이전트를 찾아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사치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 포지션을 S급 선수로 가득 채운, 하지만 유일하게 포수 포지션에서만큼은 수년째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최악의 라이벌이 말이다.
“아무튼 친구, 빅리그에 온 걸 환영해. 앞으로 잘 부탁해.”
“음.”
야구 선수라기보다는 차라리 친절한 목장 주인처럼 생긴 제리 와그너가 나를 향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디 교본에 나와 있거나, 코치들이 따로 가르쳐주지는 않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포수의 역할에는 트래시 토크로 상대 타자의 신경을 혼란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리그에서도 포수가 입을 나불거리는 건 흔한 일이지만 굳이 메이저리그라고 콕 찝어 얘기한 건 그 토크의 농도와 강도가 한국 일본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이기 때문이다.
서로 학연 지연으로 얽힌 데다가 선후배 관계가 확실한 한국에서는 기껏해야 선배 포수가 후배 타자를 조금 윽박지르는 정도가 전부이지만, 어차피 뒤돌아서면 남인 메이저리그에서는 욕설과 비아냥은 물론 심한 경우에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까지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끝까지 한 마디도 안 하네. 좋아, 과묵한 슈퍼 루키. 난 준비됐어. 게임을 시작해 보자고.”
지난 삶에서 그런 트래시토크에 내가 어떻게 대응했냐라고 묻는다면
음…….
일단은 말로 제압을 해보다가 정 안 되면 주먹을 날리는…….
뭐, 그런 악순환이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필요 이상으로 빅리그 포수들에게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건 그런 과거의 경험과 학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리 와그너, 이놈만은 예외다.
이 녀석과는 아예 말을 섞지 않는 게 낫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타자의 머리 쪽으로 공을 유도하는 이중성, 타자와 언성을 높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음에 던질 공을 계산하는 치밀함.
이런 놈과는 말을 하면 할수록 무조건 내 손해다. 그렇다고 한 대 쥐어 박자니 그럴 여지도 주지 않는 여우 같은 놈.
그래, 그러니까 입을 닫…….
“아참, 친구. 그러고 보니 말이야. 내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투타 겸업을 하는 건 어떤 기분이지? 2번 타자로 뛰면서 공까지 던지는 건 너무 힘들지 않아?”
음,
오랜만에 만나니 새삼 깨닫게 된다.
정말 더럽게도 말이 많은 놈이다.
나도 모르게 울컥, 가슴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지만,
참자, 참아야 한다.
심판도 같이 듣고 있지 않은가, 고작 말이 좀 많다고 배트로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가는 정말 장기 출장정지를 당할지도 모른다.
가만 생각하면 그동안 운이 꽤 좋았다.
개막전 경기에서 그 쓰레기 같은 데스몬드 킹의 턱을 날려 버렸을 때도 그랬고, 얼마 전 마이크에게 시비를 걸던 그… 티, 그래, 티건, 그 티건 버크해드라는 개자식의 갈비뼈를 부러뜨렸을 때도 장기 출장정지를 각오했건만.
모르겠다.
징계 수위가 약했던 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 갔으니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지.
“플레이!”
1번 타자인 데릭을 잡아낸 후 잠깐 타임을 요청했던 투수가 이제야 마운드 위로 복귀했다.
주심의 경기 개시 사인이 울렸다.
일단 이 수다쟁이 포수에 대한 건 잊고 경기에 집중할 때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투수는 앤디 딕슨.
지난 시즌까지 마이애미 말린스에서 뛰다가 스토브리그 기간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되어 5선발 역할을 맡게 된 선수다.
벌써 몇 년째 파산 직전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는 마이애미 말린스는 그 전신인 플로리다 시절부터 트레이드를 못하기로 유명한 팀이다.
쉽게 말해 영입한 선수는 그대로 폭망해 은퇴하고, 내보낸 선수는 포텐을 터뜨려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가 된다고나 할까.
지금 마운드 위에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저 앤디 딕슨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만 잘 키우면 향후 몇 년 내에 한 팀의 2, 3선발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를 고작 그 푼돈을 받고 풀어주다니.
매번 저런 식이니 아무리 구단주가 돈을 쏟아부어도 매년 파산설이 돌 수밖에 없는 거다.
하긴, 그러니 데릭 지터도 포기하고 떠난 거겠지
슈웅
파앙
“볼.”
“어때, 친구. 포심이 제법 쓸 만하지? 구속은 좀 느리지만 말이야.”
“투심이잖아.”
“아니야, 공 끝이 좀 지저분해서 그렇지, 포심이라니까. 하나 더 던져볼 테니 한번 볼래?”
괜히 대답했다.
어쨌든 그건 미래의 이야기고, 현 시점에서 보면 5선발 자리에 간신히 이름을 올릴 수준의, 그것도 내 어퍼 스윙과 상당히 상성이 좋아 장타를 노리기 좋은 그런 투수다.
드드득
약간 떨어지는 움직임을 보이는 포심을 노린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는 공은 들어오지 않았다.
슈웅
파앙
“볼.”
“젠장, 아까운 공이었지. 그렇지, 친구?”
볼 두 개가 연속으로 들어오자 오늘 경기 전 타이 존슨이 한 말이 떠올랐다.
별 것 아닌데 이상하게 저 투수와 궁합이 잘 안 맞는다는 말.
지난 시즌까지 저 앤디 딕슨이라는 투수를 상대해 타율이 고작 1할대에 머물렀다는 말.
그렇다는 얘기는…….
슈웅
파앙
“볼.”
슈웅
파앙
“볼.”
“아, 이번 공은 정말, 정말 너무 아까웠어. 어쨌든 이번 승부는 자네가 이겼어. 축하해. 1루까지 무사히 가길 바라.”
배트로 머리통을 쪼개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1루로 걸어 나갔다.
1사 주자 1루.
그답지 않게 긴장된 표정을 한 타이 존슨이 타석에 들어섰고,
슈웅
따아악!
“2루!”
“아웃!”
“아웃!”
그가 친 공이 4-6-3 병살타로 이어지는 순간, 오늘 경기가 결코 쉽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 * *
1회초 시애틀의 공격이 타이 존슨의 병살타로 허무하게 끝난 가운데, 1회말 보스턴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기타석에 쭈그려 앉아 경기장을 응시하던 제리 와그너가 마운드 위 투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수혁.
시애틀의 2번 타자 겸 선발 투수.
올 시즌 다섯 번 선발 등판해 단 한 점도 내주지 않고 전승을 기록한 현 시점 리그 최강의 투수.
이 세상 어떤 투수든 반드시 약점 몇 가지는 있다고 믿는, 보스턴의 주전 포수이자 그라운드의 사령탑인 제리 와그너는 지난 한 달간 한수혁의 투구를 수없이 돌려보며 약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없었다.
그에게는 약점, 혹은 버릇이라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최고 구속 107마일에 달하는 포심과 그보다 조금 느린 투심과 커터, 스플리터, 하드싱커 같은 변형 패스트볼, 간간히 던지는 커브와 체인지업, 그리고 딱 한 번 세상에 선보였던 너클볼까지.
그런 공의 위력과 상관없이 한수혁이 정말 무서운 건 그가 마치 공을 던지는 기계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공을 뿜어내는 초정밀 피칭머신 말이다.
‘이게 대체 말이 돼?’
그의 KBO 시절 투구를 분석한 보스턴 레드삭스 전력분석팀의 자료에 따르면 투타 겸업을 위해 체중을 조절하다 보니 6.3피트에 달하는 키에도 불구하고 몸무게가 205파운드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장기 리그를 치르다 보면 이런 저런 문제점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이 유일한 약점이었다.
하지만 빅리그에 진출한 그는 곧바로 몸무게를 증량하며 유일하게 남아 있던 약점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6.3피트의 키와 253파운드의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107마일의 포심.
그것만 해도 충분히 끔찍하건만, 정말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지난 다섯 번의 선발 등판, 그걸로도 모자라 KBO 시절 한수혁이 선발로 뛰었던 경기들을 모두 확인한 제리 와그너는 놀라움을 넘어 절망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능숙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능숙했다.
이제 프로 4년 차에 불과한 투수가 마치 은퇴 직전 베테랑처럼 경기를 지배한다.
타자를 윽박지르고, 타격 리듬을 끊어버리고, 반대로 자기 팀의 야수들의 능력을 100% 이끌어내기까지 한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저건 정말 말이 안 된다.
저 녀석이 엄마 뱃속에서부터 야구를 했다 해도 저런 노련함을 가질 수는 없는 거다.
‘젠장.’
하지만 아무리 불평하고 고민해봐도 답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여전히 믿기지 않지만 한수혁은 20대의 싱싱한 어깨에 40대 베테랑의 노련함을 갖춘 말도 안 되는 투수였다.
전력분석가들이 늘어 놓은 숫자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함께 그라운드에 발을 디디고 있는 선수들만이 느낄 수 있는 진짜 중의 진짜였다.
그럼에도 제리 와그너는 오늘 경기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시즌 초반, 라이벌 양키스가 미친 듯한 기세로 치고 나가는 현 상황을 고려하면 단 한 경기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따악
“아웃!”
“Fuck!”
보스턴의 1, 2번 타자가 모두 맥없이 범타로 물러난 가운데 3번 제리 와그너가 타석에 들어섰다.
저 한수혁이라는 녀석의 공을 어떻게 때려 낼지 감이 안 오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만큼은 절대 그런 약한 티를 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나는 이 레드삭스의 심장이자 엔진이니까.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진 제리 와그너가 싱긋 웃으며 시애틀의 포수에게 말을 걸었다.
“헤이, 부르스.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오늘 정말 야구하기 좋은 날이야.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