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43)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42화(243/412)
#242. 타이 존슨
시애틀과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 내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여러 명문 구단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월드시리즈 진출 경험조차 없는 약팀과 계약을 한 이유.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예나 지금이나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단 한 가지뿐이다.
내 뒤를 지켜줄 타자의 존재 여부, 그리고 자유.
부와 명예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건 이미 예전 삶에서 충분히 경험해 봤으니까.
나는 그저 내가 야구선수로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뒤에서 투수들의 견제를 분산시켜줄 타자가 필요했다.
아메리칸 리그의 절대 강자 양키스와 레드삭스, 그리고 내셔널리그의 영원한 우승 후보 다저스와 카디널스.
내게 가장 적극적으로 접근한 그 네 개 명문 팀에는 내가 원하는 조건을 가진 타자들이 한 명씩 존재했다.
뉴욕 양키스의 루카스 앤더슨, LA다저스의 애런 데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이 존슨, 그리고 지금 타석에 서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제리 와그너.
그중 최고는 단연 타이 존슨이었지만 솔직히 다른 세 선수도 그닥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 모두 나름의 장단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네 개 팀을 놓고 고민하던 와중에 시애틀이 타이 존슨의 이적을 성공시키며 진로가 갑자기 변경되기는 했지만, 그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 나를 보며 히죽거리는 저 수다쟁이와 한 팀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플레이!”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기술의 발전의 발전이 반드시 긍정적인 면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야구에서도 그렇다.
예전에는 개인의 재치와 판단으로 경기의 흐름을 뒤집는 선수들이 여럿 존재했다.
순간적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고, 부족한 점을 공략해 빈틈을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선수들.
하지만 고도화된 시스템을 통해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한 정밀 분석이 이루어지고, 볼 카운트 하나마다 벤치에서 지시가 내려오게 되며 그런 선수들은 하나둘 사라지게 되었다.
경기 전 상대 팀 선수들의 표준화된 패턴과 플레이 습관, 볼 카운트별, 그리고 상황별 대처 방법이 모두 제공되는 시대에서 선수 개개인이 뭔가를 판단하고 플레이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적 흐름 속에 좋은 선수의 개념 역시 바뀌었다.
이제는 많은 감독들이 자신의 판단보다는 벤치의 지시와 데이터에 따라 정확히 움직이는 선수를 선호한다.
불안전한 개인의 판단보다는 수치화된 통계와 데이터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승리를 위한 보다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현대 야구에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영역을 지켜 나가는, 벤치의 묵인 하에 자신의 판단대로 경기를 풀어 나갈 수 있는 선수들이 존재한다.
통계와 지표만으로는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직감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
슈웅
틱
“파울!”
“와… 진짜… 이게 이렇게 휙 꺾인다고?”
저기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제리 와그너 같은 선수가 바로 그런 부류다.
찰나의 순간에도 본인, 그리고 팀에 유리한 방향을 찾아낼 수 있는 직감을 가진 녀석이다.
그렇기에 저런 선수들을 상대할 때는 최대한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아야 한다.
빠르게, 더욱 빠르게.
머리를 굴릴 틈을 주지 않고 힘 대 힘의 싸움으로 몰고 가는 것이 승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슈웅
파앙
“볼.”
다시 한 번 그때의 일을 떠올려본다.
만약 시애틀이 타이 존슨 영입에 실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물론 시애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젊은 타자들 역시 성장 가능성만 놓고 보면 내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선수들임에 분명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녀석들이 성장할 시간이.
내게는 그 시간을 기다릴 의무도, 그리고 책임도 없다.
그렇기에 아마… 만약 타이 존슨이 그대로 세인트루이스에 남았다면…….
슈웅
파앙
“볼.”
그래, 아마도 그랬다면 나는 높은 확률로 보스턴 레드삭스를 선택했을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창의적인 선수.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네 명의 타자 중 객관적인 타격 지표는 가장 떨어지지만, 야구에 대한 이해도는 가장 높은 저 녀석이 있으니 말이다.
“플레이!”
하지만 그런 모든 가정이 무의미해진 지금,
어쩌면 내 동료가 되었을지도 모를,
내 등 뒤를 지켜줄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를 녀석에게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슈웅
부웅
파아앙!
“스윙! 아웃!”
현재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강한 공.
107마일, 3050RPM에 달하는 포심에 삼진을 당한 제리 와그너가 혀를 빼물고 덕아웃으로 물러났다.
* * *
– 정말 대단하군요! 38이닝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한수혁과 보스턴의 5선발 앤디 딕슨이 맞붙으며 시애틀의 우세가 점쳐졌던 경기가 팽팽한 접전 속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3회초 양팀이 0 대 0으로 맞서는 상황, 투 아웃 주자 없는 가운데 한수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 네, 보스턴 타선이 침묵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최근 엄청난 공격력을 선보였던 시애틀 매리너스가 앤디 딕슨의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는 건 조금 의외네요. 대단한 호투입니다. 지금까지 볼넷을 몇 개 주기는 했지만 배트 중심에 제대로 맞은 타구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 이유가 뭐라고 봐야 할까요, 스티브?
– 일단은 레드삭스의 포수인 제리 와그너의 영리한 리드를 들 수 있겠죠? 한수혁 선수를 철저히 피하고 뒤타자들과 승부를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멋지네요. 오늘 경기만 놓고 보면 제가 보스턴 단장이라도 그에게 백지수표를 건넬 것 같군요. 그는 투수들의 능력을 100%, 아니, 120% 이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포수입니다.
– 엄청난 칭찬이군요. 아, 잠깐 얘기를 나누는 사이, 한수혁 선수가 또다시 볼넷을 얻어 1루로 나갑니다.
– 흠, 이거 참… 타이 존슨 선수의 자존심이 많이 상할 거 같네요. 1회에도 그랬고, 지금 볼넷도 고의성이 다분해 보이거든요.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저 선수 앞에 일부러 주자를 내보낸다는 건 상상도 못 했잖아요?
– 네, 저 역시 그런 모습은 본 기억이 없군요. 데이터상으로 타이 존슨 선수가 앤디 딕슨 선수와 상성이 좀 안 좋기는 했지만…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보스턴, 아니, 제리 와그너 선수, 정말 대담한 선택입니다.
– 그렇죠. 만약 저러다가 큰 거 한 방이라도 맞으면 바로 두 점이거든요. 타이 존슨 선수가 최근 세 경기에서 큰 것이 없었으니 하나 나올 때도 됐고요. 그럼에도 보스턴 배터리는 한수혁이 아닌 타이 존슨과의 승부를 선택했습니다.
– 그렇군요. 자, 어쨌든 1회에 이어 3회, 또 한 번 타이 존슨 선수 앞에 주자가 출루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레드삭스의 판단이 옳았을지 다 함께 지켜보도록 하죠.
* * *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초구에 헛스윙을 한 타이 존슨이 안색을 굳히며 타석에 바싹 붙어 섰다.
내가 타격 외에도 제리 와그너라는 포수를 높게 평가하는 건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빅리그 데뷔 이후 지난 16년 동안 통산 타율 0.335, OPS 1.031, 615홈런, 1855타점을 기록 중인 명실상부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 타이 존슨을 뒤에 두고 그 앞타자인 내게 고의사구를 줄 수 있는 판단력과 배짱 말이다.
본래의 역사에서 타이 존슨은 총 22시즌을 뛰며 타격 주요 부문 역대 통산 기록을 경신한, 그야말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강타자였다.
내 회귀로 인해 이것저것 많은 것이 바뀌는 바람에 그의 미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미치겠지만, 어쨌든 그는 현재까지 쌓아 올린 커리어만으로도 명예의 전당 첫 턴 입성이 확실한 대단한 선수다.
슈웅
파앙
“볼.”
그런 타이 존슨 덕분에 나는 지난 한 달간 마음 놓고 내 스윙을 할 수 있었다.
레전드라 불려야 마땅할 타자가 뒤에 버티고 있으니 투수들은 어쩔 수 없이 내게 승부를 걸어왔고, 그 결과 나는 34경기 만에 16개의 홈런을 때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부웅
파앙!
“스윙!”
아직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제리 와그너, 저 녀석이 가장 먼저 캐치한 듯하다.
타이 존슨도 이제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것, 그 역시 한계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 말이다.
슈웅
파앙
“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올해로 서른여섯이 된 그는 야구선수로서 피지컬의 하락세가 급격하게 체감되기 시작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점점 무뎌지는 배트 끝을 경험과 연륜으로 커버해야 하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싸워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나 역시 저 시기를 맞이해 봤기에 안다.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문제는 그 사실을 본인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 그러니까 저 약아빠진 제리 와그너가 먼저 알아차렸다는 거다.
이번 시즌 달라진 타이 존슨의 모습에서 그는 뭔가 약점을 발견했고, 오늘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 역시 그 과정을 거쳐왔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아무리 옆에서 떠들어도 아무 소용없다는 걸,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오직 본인뿐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기에 그저 믿는 수밖에 없다.
내가 파트너로 선택한 타이 존슨이라는 선수가 스스로 이 상황을 이겨낼 거라 믿고 응원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슈웅
파앙
“볼.”
투 아웃, 볼 카운트 쓰리 볼 투 스트라이크.
승부의 순간이 왔다.
쉴 새 없이 입을 나불거리던 제리 와그너가 신중한 표정으로 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해본다.
내가 만약 저 투수라면, 아니, 그 투수를 리드하고 있는 제리 와그너라면…….
그래,
여기서 던질 승부구는 바깥쪽 보더라인에 살짝 걸치는 패스트볼밖에 없다.
평생 상대와의 대결에서 물러선 적이 없는, 지난 16년간 자신이 모든 걸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남자를 유혹하기에 그것보다 좋은 선택은 없을 것이다.
그 공을 멀리 날려보낼 수 있는 손목 힘을 잃은, 그럼에도 여전히 기다리거나 물러서는 법을 모르는 저 남자를 상대로 말이다.
모르겠다.
타이 존슨이 여기서 어떤 선택을 내릴지.
앞선 타석에서처럼 그 공을 무리하게 받아 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통해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할 것인지.
스르륵
사인이 오가고, 마침내 투수의 손 끝에서 공이 떠나갔다.
슈웅
내 예상대로 바깥쪽으로 향하는 패스트볼.
존을 아주 살짝 벗어난, 제리 와그너의 리드에 따라 완벽하게 제구된 공이 타이 존슨을 유혹하며 날아들었다.
그라운드 안 모두의 시선이 그 공에 집중되었다.
파앙
“볼.”
그리고 잠시 움찔했던 타이 존슨이 배트를 내지 않고 그 공을 참아내는 순간,
“우우우!”
“빌어먹을, 장난해?”
관중들의 야유 소리와 함께 제리 와그너의 표정에 허탈감이 가득 차올랐다.
반면 나와 눈이 마주친 타이 존슨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지난 16년간 빅리그를 지배해온 이 최강의 타자가 또 다시 다음 단계를 향해 한 발을 내딛었음을.
그를 선택한 내 안목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