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4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43화(244/412)
#243. 새로운 발걸음
지난 한 달간 시애틀 타선의 중심축은 누가 뭐래도 한수혁이었다.
타이 존슨이 3번에 버티고 있으니 투수들은 어떻게든 1, 2번 타자들을 잡으려 했고, 그러다가 한수혁에게 큰 것을 허용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투수가 터져버리니 시애틀은 수월하게 상대팀을 압살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전력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시애틀이 시즌 초반 지구 1위를 달릴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각 팀의 감독들과 투수들은 한수혁이 어떤 선수인지 알게 되었다. 절대 함부로 승부해서는 안 될 선수라는 걸 깨닫게 된 거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타이 존슨이었다.
한수혁을 거르거나 어렵게 승부를 가져가자니 그 뒤에 있는 타이 존슨이 걸렸다.
그렇다고 타이 존슨까지 걸러 보낸다?
그럼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주자를 두 명이나 루상에 내보낼 판이다. 아무리 그 뒤 타자들이 한수혁과 타이 존슨만 못하다 해도, 그래도 역시 빅리그 선수들이다.
시애틀을 상대하는 팀들이 이런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와중에 리그 최고의 포수라 불리는 제리 와그너는 타이 존슨의 상태가 예전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표본이 적어 지표상으로 잘 나타나지는 않지만 특정 조건, 그러니까 주자가 1루에 있고 바깥쪽 공을 밀어쳐야 하는 상황에서 그의 반응 속도와 타구 비거리가 대폭 감소했음에 주목했다.
영상과 데이터를 통해 그 사실을 재차 확인한 제리 와그너는 감독과 상의해 과감한 작전을 들고 나왔다.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펼치고 있는 한수혁은 무조건 거른다. 그는 현 시점에서 절대 승부를 해서는 안 될 타자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이 최고라 믿고 있는 늙은 숫사자와 승부를 벌인다.
바깥쪽 공을 후려쳐 담장을 넘길 힘을 잃은, 한수혁을 거름으로써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타이 존슨과 말이다.
제리 와그너의 선택은 적중했다.
한수혁을 내보낸 후 타이 존슨을 그를 잡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지금까지 16년간 그러했듯, 타이 존슨은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리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선수였다.
한수혁이 고의사구로 걸어 나간 후 집요하게 바깥쪽 승부를 펼치자 참지 못한 타이 존슨은 그 공을 그대로 밀어 쳤다.
예전 같으면 총알같이 1, 2루 사이를 뚫거나, 혹은 우익수 키를 넘기는 장타가 나왔을 코스.
하지만 느려진 배트 스피드와 손목 힘은 그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했다.
힘 없는 내야 땅볼.
한수혁, 타이 존슨으로 이어지는 시애틀의 2, 3번 타순을 파훼할 수 있는 해결책이 드디어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하지만,
“볼! 타자 1루로!”
두 번째 타석, 상대의 수법을 눈치챈 숫사자가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인내심을 발휘했다.
오랜 시간 지켜온 자존심과 공격성을 접어 두고 무리 내 젊은 사자에게 승부의 기회를 넘겼다.
할 일을 마친 타이 존슨이 담담한 표정으로 1루로 걸어 나갔다.
무사 주자 1, 2루.
힘들게 수립한 계획이 너무 일찍 무너졌다.
제리 와그너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 * *
“좋았어!”
예전 같으면 무조건 배트가 나갔을 유인구를 타이 존슨이 참아내는 순간,
벤자민 감독은 깨달았다.
타이 존슨에게, 그리고 이 팀에 새로운 시간이 찾아왔음을.
지금까지 스스로 모든 걸 짊어지고 해결하려 애쓰던 사내가 마침내 자신의 짐을 다른 선수들과 나누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위대한 선수라 해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시시각각 찾아오는 변수를 육체의 강인함으로 커버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나고 나면 결국은 예전과 다른 시각으로 야구를 바라보고, 플레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긴 시간 동안 메이저리그를 지배해 왔던 타자가 그런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게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했다.
뭐랄까, 자신이 직접 키워낸 선수는 아니지만 다 자란 자식을 집에서 떠나보내는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런 개인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 둘 때다.
타이 존슨이 새로운 영역을 위해 한 발을 내디딘 이상 이제 자신들이 그를 도와줘야 한다.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아무리 위대한 타자라 해도 가끔은 다른 선수들에게 기대야 한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타임!”
무사 주자 1, 2루.
타임을 요청한 벤자민 감독이 다음 타자인 척 클락을 벤치로 불러들였다.
“척, 괜찮아. 긴장하지 말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한수혁과 타이 존슨이 입단하기 전, 그러니까 지난 시즌까지 이 팀의 중심타자를 맡았던 건 현재 1번을 치고 있는 데릭 플레밍과 5번 짐 브라운, 그리고 6번 안토니오 가르시아 등이었다.
올 시즌 내내 4번 타자 자리에 고정되다시피 한 척 클락은 바로 그 뒤 7번 타순에 서던 선수였다.
지난 시즌 0.273 / 0.345 / 0.409의 슬래시 라인에 홈런 16개, 68타점을 기록한 타자.
타격의 정교함 면에서는 데릭 플레밍이나 짐 브라운이 나았고, 파괴력 면에서도 안토니오 가르시아가 더 강력했다.
하지만 벤자민 감독이 선택한 4번 타자, 그러니까 한수혁과 타이 존슨의 뒤에 서게 될 타자는 다름 아닌 척 클락이었다.
“문제 없습니다, 보스. 아, 혹시 제가 부담을 가져야 하는 상황인가요?”
“아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결과에 상관없이 할 수 있는 거만 하면 돼.”
“물론이죠. 그게 제가 가장 잘하는 거니까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좋아.”
이유는 간단했다.
척 클락이라는 타자가 가진 담대함.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신경함.
그는 아웃카운트, 앞뒤 타자, 또는 루상의 주자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자신의 스윙을 할 수 있는 타자였다.
몇몇 코치들은 그가 경기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상황에 맞는 타격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기도 했지만,
[4번 타자 라이트 필더 척 클락]벤자민이 생각하기에 그건 이 팀에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었다.
데릭 플레밍, 한수혁, 타이 존슨으로 이어지는 1, 2, 3번 타선이 상대 투수들을 박살 내며 팀이 순항하는 와중에도 벤자민은 방심하지 않고 이런 순간을 대비해왔다.
그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거라는 걸,
상대 팀에서 한수혁을 대놓고 거르고, 거기에 타이 존슨에게도 유인구가 난무하며 결국 다음 타자가 부담을 나눠지게 될 상황이 올 거라는 걸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척 클락은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타자였다.
어지간한 타자라면 상대팀이 한수혁과 타이 존슨을 거르고 자신과 승부를 거는 것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압박감으로 인해 제 스윙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척 클락, 저 무신경한 선수만큼은 예외였다.
지난 몇 년간의 타격 지표가 모든 걸 말해준다.
노 아웃 주자 없는 상황, 투 아웃 주자 있는 상황, 심지어 한 방으로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척 클락의 타격 지표는 항상 일정한 수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벤자민 감독이 준비해 놓은 승부수가 드디어 발동되었다.
“플레이!”
주심의 플레이 사인과 함께 투수가 천천히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여전히 척 클락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웨이브 진 금발과 제법 그럴듯한 이목구비, 그리고 반쯤 감긴 듯한 눈.
그에게서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제리 와그너가 있는 힘을 다해 입을 털어보았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루상에 주자가 있든 말든, 그리고 누가 떠들든 말든 자기 할 일 외에는 아무 관심없는 척 클락의 배트가 힘차게 돌았다.
따아아악!
그가 친 타구가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펜웨이파크 좌측면 그린 몬스터 상단에 맞고 떨어졌다.
발 빠른 주자 한수혁이 여유 있게 홈으로 파고드는 순간, 제리 와그너의 얼굴에 암담함이 떠올랐다.
단지 한 점을 내준 것에 불과했지만 그 한 점이 너무나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 * *
6회초, 척 클락의 2루타로 1점을 선취한 시애틀은 무사 2, 3루의 좋은 찬스를 이어갔지만 결국 후속타 불발로 추가 득점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 한 점은 시애틀에게도, 그리고 보스턴에게도 상당히 의미 있는 점수였다.
보스턴으로서는 기껏 들고 나온 한수혁 봉쇄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증거였고, 시애틀에게는 앞으로 있을 상대팀의 견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겨우 한 점이야! 빨리 뒤집어! 뒤집으라고!”
“몸에 맞고라도 나가! 수천만 달러를 받고 있으면 그만큼의 근성을 보이라고!”
“홈런을 쳐! 저 건방진 투수 자식을 죽여버리라고!”
1 대 0 한 점 차의 아슬아슬한 리드, 보스턴 팬들이 목이 터져라 홈팀을 응원하며 역전을 외쳤다.
하지만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오늘 경기 직전까지 38이닝 무실점을 기록 중인 한수혁에게 점수를 뽑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걸.
그나마 다행인 건 7회말 공격에서 제리 와그너가 볼넷을 얻으며 한수혁의 퍼펙트 행진이 끝났다는 거였다.
그리고 8회초, 한수혁의 타석이 돌아왔다.
이미 한 번 실패를 맛보긴 했지만 보스턴은 또 한 번 그를 볼넷으로 내보냈다. 아직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맞이한 무사 주자 1루 상황, 타이 존슨이 타석에 들어섰다.
“타이, 아까는 놀랐어요. 그 공을 참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참은 게 아니라 미처 스윙을 못 한 거야. 공이 너무 빠르더라고.”
“그렇죠? 아무리 당신이라도 90마일 포심을 치는 건 무리겠죠. 흠, 좋아요. 투수에게 구속을 좀 낮춰보라고 하죠.”
“좋아, 그럼 보답으로 내가 한 잔 사도록 하지.”
“영광이네요.”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은 제리 와그너가 안색을 굳히고 포수 미트를 움직였다.
오늘 선발이었던 앤디 딕슨이 내려가고 불펜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제구력에는 강점이 있는 투수.
피치컴에 입력한 사인에 따라 투수가 공을 던질 준비를 하고, 야수들이 슬금슬금 수비 위치를 조정했다.
슈웅
파앙
“볼.”
바깥쪽에서 다시 바깥쪽으로 휘어 나가는 커터.
예전 같으면 긴 리치와 강력한 손목 힘을 믿고 그 공을 후려쳤을 타이 존슨이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공을 지켜보았다.
“타이.”
“음?”
“미안해요. 하지만 이겨야겠어요.”
“별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하는군. 좋아, 덤벼봐.”
타이 존슨과 제리 와그너, 지난 시즌까지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였던 두 사람은 경기장 밖에서도 이런 저런 인연을 이어가는 사이였다.
하지만 경기장 안에서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어떻게든 이 늙은 숫사자를 쓰러뜨리리라 마음먹은 제리 와그너가 투수를 향해 사인을 보냈다.
슈웅
파앙
“볼!”
“흠… 이것 때문에 미안하다고 한 건가?”
“아뇨, 이건 실투였어요. 투수 녀석, 오늘 경기 끝나고 제가 엉덩이를 걷어차 줄 테니 마운드로 뛰어 올라가는 건 참아줘요.”
“흠, 운이 좋았군. 지금 타석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저기 1루에 있는 저 녀석이었으면 아마 지금쯤 너희 투수는 턱이 박살 나서 엉엉 울고 있었을 거야.”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간신히 피해낸 타이 존슨이 1루 베이스 위 한수혁을 가리켰다.
제리 와그너의 머릿속에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한수혁 벤치클리어링 하이라이트 영상이 떠올랐다.
“젠장, 타이,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네 애송이는 너무 끔찍해요.”
“흐흐, 맞아. 배트파워도, 주먹파워도 정말 대단하지.”
“제가 보기에는 투수로서 더 끔찍해요. 솔직히 아까 제가 볼넷을 얻은 건 천운에 가까웠어요.”
“어쨌든 조심하라고. 저 녀석이 열 받으면 우리 팀에서는 말릴 사람이 없어.”
“좋아요, 머리 쪽으로는 절대 공이 안 가게 조심시킬게요.”
“알았어. 나도 저 녀석에게 되도록 네 머리로는 공을 던지지 말라고 전해주지.”
두 사람의 계속되는 대화에도 주심은 굳이 나서서 그걸 중단시키지 않았다.
오랜 시간 빅리그에서 활동해온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두 팀, 그리고 두 선수에게 중요한 순간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주심의 묵인 하에 몇 차례의 말이 오가고, 다시 투수가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바깥쪽 씽커.’
존 바깥으로 들어오다가 역회전하며 보더라인을 스치고 지나가는 씽커.
제리 와그너가 선택한 승부구는 바로 그것이었다.
지난 타석에서 타이 존슨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하기는 했지만 현재로서는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만에 하나 또 볼넷을 주게 되면… 다음 투수는…….’
그라운드 위 사령탑이자, 투수 교체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리 와그너가 타이 존슨 다음 타자들과의 승부를 생각하던 그때,
슈웅
“젠장!”
긴장한 투수의 공이 그만 존 안으로 몰렸고,
따아아아아악!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그린 몬스터를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멀리, 멀리,
그렇게 날아간 타구가 그린몬스터 위 관중석을 넘어 장외 홈런이 되는 순간, 그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멋진 홈런이지? 그럼 다음 경기에서 보자고, 친구.”
“…….”
아직 8회말과 9회말, 보스턴에게는 두 번의 공격 기회가 남아 있었건만, 타이 존슨은 이미 경기가 끝난 것처럼 말한 후 천천히 1루를 향해 달려 나갔다.
제리 와그너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3 대 0, 석 점 차.
보스턴의 막강 전력을 생각하면 언제든 뒤집을 수 있다 믿고 싶지만,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투수가 한수혁이라는 걸 생각하면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는 점수 차였다.
그리고 그 예감은 그대로 적중하고 말았다.
[시애틀과 보스턴 간의 1차전, 한수혁의 노히트노런 피칭과 타이 존슨의 투런 홈런으로 3 대 0, 시애틀의 완승] [한수혁, 47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 이어가며 시즌 6승 달성, KBO 시절 기록한 85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에 다시 한 번 도전?] [양키스전 퍼펙트 게임에 이어 레드삭스 전 노히트 노런 일궈낸 한수혁 “퍼펙트게임을 놓쳐서 아쉽지 않냐고? 글쎄, 그 팀보다 레드삭스가 조금 더 강해 이런 결과가 나온 것 아닐까?”] [한수혁을 욕하던 레드삭스 팬들, 해당 인터뷰 이후 “레드삭스가 양키스보다 강하다고? 흠, 그는 야구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선수임에 분명하다” 태세 전환] [경기를 결정짓는 투런 홈런을 날린 타이 존슨 “내가 승부에 지더라도 팀이 이기면 된다는 간단한 이치를 배워가는 중이다. 다행히 오늘은 나도 이기고, 팀도 이겨서 기쁘다.”] [6회초 그린몬스터를 직격하는 2루타로 선취 득점을 올린 척 클락, 타이 존슨의 뒤에 서는 게 부담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내가 부담스러워하는 유일한 순간은 아침에 일어나 정원에 나갔을 때 신문 위에 곱등이가 앉아 있을 때뿐” 대체 무슨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