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4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45화(246/412)
#245. 클리블랜드
“한수혁 선수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미국 유람을 하게 생겼네요.”
“총각인 저야 상관없지만 고동식 위원님은 가정도 있으신데 괜찮으시겠어요?”
“박 아나운서.”
“네?”
“우리 와이프는 내가 해외출장 간다고 하니까 신이 나서… 흠, 아니에요. 총각한테 할 소리는 아닌 거 같군요.”
시즌 초반, 한 달여 간의 현지 중계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던 KBC 중계팀이 다시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경기력 저하와 국제대회에서의 개망신 등으로 하루하루 힘을 잃어가던 KBO리그는 한수혁이 뛴 지난 3년 동안 예전의 그 인기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런 한수혁이 미국으로 진출했지만 야구에 대한 관심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침에는 한수혁의 경기를 보고, 저녁에는 KBO를 보고.
야구 종목 자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올라가자 시애틀 경기 독점 중계권을 갖고 있는 KBC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당초 시즌 초반으로 한정되었던 현지 중계를 시즌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 고동식 해설위원과,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박철민 아나운서가 여기, 매리너스와 가디언스 간의 경기가 준비 중인 클리블랜드에 있는 이유다.
“자, 그럼 스탠바이 들어갑니다. 쓰리, 투, 원, 고!”
함께 파견된 PD의 지시에 고동식과 박철민이 넥타이를 다시 한 번 매만진 후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
시즌 성적 24승 13패로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중부지구 최하위를 기록 중인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간의 1차전 경기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 *
–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한수혁 선수가 뛰고 있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홈팀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간의 경기 중계를 위해 미국 현지에 나와 있는 박철민입니다. 제 옆에는 언제나 그렇듯 고동식 위원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위원님, 반갑습니다.
– 네, 반갑습니다. KBC에서 국내 시청자분들을 위해 시애틀 매리너스의 전 경기를 현지 중계하기로 결정을 내렸죠. 먼저 결단을 내려주신 KBC 사장님에게 감사드리고요. 중간에서 많은 도움을 준 메이저리그 사무국에도 감사의 인사 보냅니다. 고마워요! MLB!
– 좋습니다. 자, 그럼 오늘 경기에 앞서 시즌 초반 양팀 현황과 라인업부터 살펴보죠. 먼저 홈팀인 클리블랜드 가디언스부터 살펴보죠. 한동안 야구를 안 보신 시청자분들이라면 팀명부터 뭔가 생소하게 느껴지실 수 있겠네요. 간략하게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 만약 가디언스라는 팀명이 낯설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있다면 아마 2022년 이후로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지 않으셨을 확률이 높겠네요. 이전까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였던 팀명이 이때부터 가디언스로 변경되었거든요.
– 아, 그렇군요. 어떤 이유인가요?
– 네, 팀명이 바뀐 이유는 이게 예전에 사용하던 인디언스라는 이름과 팀 로고가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여서인데요. 이 부분은 미국 내에서도 상당히 논란이 많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니 넘어가도록 하죠.
– 좋습니다. 그럼 2030년 현재 인디언스, 아니, 가디언스는 어떤 팀인가요?
– 한마디로 말하면 개허… 흠, 죄송합니다. 쉽게 설명드리면 그렇습니다.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중반까지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의 절대강자가 휴스턴이었다면, 중부지구를 지배한 건 가디언스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군요.
– 과거형이군요. 그리고 뭔가 말씀 끝에 여운이 느껴지네요?
– 맞아요. 이 두 팀에는 공통점이 있거든요. 당시에는 그렇게 잘 나가던 팀이 지금은 개작살… 엉망이 되어서 탱킹에 들어가 있다는 공통점 말이죠.
– 알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했고요. 현재 성적만 봐도 시애틀에 비해서는 상당히 약팀인 건 확실하군요.
– 그렇죠. 이번 3연전에서 시애틀은 5선발 마이크 워렌, 1선발 라이언 티보우, 2선발 한수혁 선수가 차례로 등판하게 됩니다. 아, 여기서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게 한수혁 선수가 2선발로 나서는 건 어디까지나 투타 겸업을 하는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실력으로 치면 시애틀이 아니라 메이저리그 전체 1선발을 해도 부족할…….
– 네, 위원님. 그것도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저 역시 공감하고요. 이번에 다시 미국으로 넘어오니 현지에서 한수혁 선수의 인기가 엄청나더군요. 오늘도 경기장에 들어오는데 여기 미국분들이 계속 물으시더라고요. 한국에서 온 거냐고, 한수혁 선수를 아냐고 말이죠. 세상에, 여기가 시애틀이면 그나마 이해하겠는데 클리블랜드인데도 말이죠.
– 더 이상 말해 뭐 하겠습니까? 한수혁 선수의 성적을 보세요. 시즌 6승에 평균 자책점 0, 거기에 4할이 넘는 타율에 홈런은 벌써 17개를 기록했죠. 야구팬이라면 이런 선수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네, 한수혁 선수가 한국인이라는 게 정말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자, 그 사이 모든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는군요. 선공에 나서는 시애틀의 타순을 살펴보죠.
1번 중견수 데릭 플레밍(좌)
2번 3루수 한수혁(우)
3번 1루수 타이 존슨(좌)
4번 우익수 척 클락(우)
5번 좌익수 짐 브라운(우)
6번 지명타자 안토니오 가르시아(좌)
7번 포수 브루스 매튜스(우)
8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우)
9번 2루수 조나단 오웬스(좌)
선발 투수 마이크 워렌
– 시애틀 매리너스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시즌 개막 때나 지금이나 타순에 변동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그만큼 안정감이 있고요. 거기에 타이 존슨 선수를 제외하면 전원이 20대로 구성된, 젊고 강한 타선입니다. 클리블랜드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벅찰 거예요.
–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1회초 시애틀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겠습니다. 이곳은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의 홈구장 프로그레시브 필드입니다.
* * *
현재 뛰고 있는 매리너스를 제외한 나머지 29개 팀 중 가장 마음에 안 드는 팀을 꼽으라면 단연 양키스다.
예전 삶에서 월드시리즈로 나아가려는 시애틀의 앞길을 수차례 가로막았던 놈들이고, 개인적으로는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는 꼰대스러운 팀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쨌든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게 양키스라면, 나도 모르게 자꾸 측은한 마음이 드는, 이상하게 자꾸 눈이 가는 팀이 바로 클리블랜드 가디언스다.
지난 삶에서 내 두 번째이자 마지막 소속팀이었던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1948년 마지막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린 이후 무려 82년간 애타게 우승을 기다리고 있는 팀.
투타 겸업을 하던 내가 투수로서는 완전한 내리막, 하지만 타자로서는 절정기에 접어들던 그 순간 우승에 목 말랐던 클리블랜드는 내게 거절할 수 없을 만큼 큰 돈을 제안했고,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팀을 옮긴 직후 어깨가 터지며 전업 타자로 전향해야 했지만, 어쨌든 나는 이 팀 팬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그것을 가져다주었다.
월드시리즈 우승트로피 말이다.
때문에 저들에게 미안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한때 내가 몸담았던 팀이 처절하게 망가져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조금 안타까울 뿐이다.
“플레이!”
경기가 시작되었다.
지난 시즌 평균자책점이 6점대에 육박했던, 그럼에도 한 시즌 내내 선발로 나서 170이닝을 소화해낸 클리블랜드의 선발 투수가 담담한 표정으로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안타를 맞든, 홈런을 맞든 말든 아무 동요 없이 자신의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
패전 처리를 위해서라도 각 팀당 한두 명 정도는 저런 역할을 하는 투수가 있게 마련이다.
다만 차이라면 탱킹 중인 팀에서는 저런 투수가 1선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정도다.
어차피 승패와 상관없이 많은 이닝을 먹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탱킹은 지켜보는 팬들뿐만 아니라, 경기를 뛰는 선수들에게도 엄청난 무기력증을 선사해주는 그런 행위다.
그라운드 위 클리블랜드 선수들 중 낯익은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다.
앞으로 몇 년 후 이 팀을 다시 부활시키고 나와 함께 양키스에 맞서 싸웠던 녀석들은 아직 빅리그에 콜업되지도 않은 상태다.
지금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녀석들은 대부분 탱킹 기간 동안 꾸역꾸역 게임을 소화해줄, 그렇게 대충 쓰고 언제 버려도 아깝지 않은 그런 선수들뿐인 거다.
따아아악!
“좋아, 데릭!”
선두 타자 데릭이 좌익수 옆으로 빠지는 멋진 타구를 날리고 2루까지 진출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찾아온 위기, 하지만 클리블랜드 팬들은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았다.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시즌부터 탱킹이 시작되고,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에 훨씬 익숙해진 선수들도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경기를 이어 나갔다.
딱 한 녀석만 빼고 말이다.
[2번 타자 서드 베이스맨 한수혁]타석에 들어서니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 녀석이다.
현재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클리블랜드 선수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90년 만에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던 명포수.
하지만 지금 당장은 서비스 타임을 관리할 필요도 없다는 판단 하에 마구잡이로 콜업되어 쓸쓸히 클리블랜드의 안방을 지키고 있는 스무 살짜리 풋내기 포수.
레너드 존스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 미안. 조금 신기해서. 혹시 내가 실례를 한 건가?”
젠장, 갑자기 맥이 탁 빠진다.
내가 잘 알고 지낸 사람을 예전과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만난다는 건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이다.
특히 이 녀석은 클리블랜드에서 유일무이하게 나와 인간적인 교류를 유지하던 녀석이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인간적인 교류라고 해봐야 녀석은 주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간간히 내게 말을 걸고, 나는 그 말을 무시하지 않고 대답을 해주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어쨌든.
“야구나 하자고, 친구.”
“좋은 생각이야. 아, 방금 전에 내가 쳐다본 이유는 신기해서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네 팬이기도 해서. 음, 이것도 역시 상대팀 선수에게 할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괜찮아. 나는 루키거든.”
경기 중인 상대방에게 팬이라고 말하다니.
만약 저 팀이 제대로 된 팀이었다면, 그리고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베테랑이 있었다면 이 녀석은 오늘 경기가 끝난 후 밤새도록 잔소리를 들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저 팀에는 그런 걸 가르쳐줄 베테랑이 없다.
그저 연봉을 받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 없는 나이 든 야구선수들 몇 명만이 존재할 뿐이다.
슈웅
파앙
“볼.”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오늘 경기가 끝나고 사인 한 장만 해 줄 수 있을까? 아, 혹시 부담스럽다면 거절해도 돼. 하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경기 후에 너희 덕아웃으로 찾아가지. 그래도 괜찮을까?”
“내 사인이 받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약간은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메이저리그를 통틀어, 아니, 근 10년간 최고의 포수라 불리던 녀석이 저렇게 얼빠진 얼굴로 적에게 사인을 해달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이다.
그 순간 복잡했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이다.
아니, 그걸 과거라 불러야 할지, 미래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높은 확률로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나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던 레너드 존스라는 포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계속 떠들어대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경기에 집중했다.
1회초가 시작되자마자 찾아온 노아웃 주자 2루의 기회.
오늘처럼 양 팀 간의 전력 차가 확연한 경기일수록 선취점이 중요하다.
약팀과의 경기에서 초반 득점 찬스를 몇 번 놓치다 일이 꼬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건 2루에 나가 있는 데릭을 불러들일 깔끔한 안타다.
큰 것보다는 정확한 타격을 노린다.
요즘 들어 투수들이 집중적으로 공략해오는 바깥쪽 공을 치기 위해 스탠스를 안으로 좁히고, 그립의 위치를 조정하고, 타이밍은 대략 92마일 포심에 맞춰서.
하나, 둘, 셋,
슈웅
따아악!
“좋았어! 잘했어, 한.”
2루 주자를 불러들이는 깔끔한 1타점 적시타.
베이스 코치에게 끼고 있는 보호대와 장갑을 건네 준 후 나도 모르게 홈플레이트 위 포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1루 베이스 위에서 바라본 녀석의 얼굴 어디에도 멍청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레너드 존스의 얼굴을 채우고 있는 건 승부에서 졌다는 진한 아쉬움이었다.
“흐음…….”
그 순간 깨달았다.
내 팬을 자처하던 녀석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실은 나를 교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말이다.
수십 년간 야구를 해온 나를 속일 정도로 완벽한 연기였다.
“젠장, 한 방 먹었군.”
“음? 안타까지 쳐 놓고 무슨 소리야?”
클리블랜드의 1루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굳이 대답하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시선은 여전히 내 기억 속 클리블랜드의 주장으로 남아 있는 레너드 존슨에게로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