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49)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48화(249/412)
#248. 꿈을 이뤄줄 영웅
타이 존슨이 때려낸 거대한 타구가 시티즌스 뱅크 파크 좌측 펜스를 넘어가며 시애틀이 두 점을 선취했다.
팀이 점수를 내준 것에, 홈런을 맞았다는 데, 배트 플립을 당했다는 데, 그리고 그 모든 걸 해낸 게 다름 아닌 필라델피아의 숙적 타이 존슨이라는 데 흥분한 필리건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야유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시애틀의 선발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연습투구가 시작되었다.
슈웅
파아앙!
슈웅
파앙!
슈웅
파아아앙!
“…빌어먹을, 정말 빠르기는 더럽게 빠르군.”
“괜찮아. 빠르기로만 치면 우리 팀의 니커도 만만치 않으니까.”
“니커? 스트라이크 하나 잡지 못하고 지난 주에 마이너로 떨어진 머저리?”
“젠장, 넌 어디 팬이야? 당연히 시애틀은 아닐 테고, 설마 메츠 놈이 여기 잠입한 건 아니겠지?”
“무슨 개소리야! 난 이번 시즌 내내 이 자리에 앉았다고. 넌 항상 거기 앉았고. 정신 차려, 이 술주정뱅이야.”
“그랬나? 젠장, 몰라. 아무튼 공만 빠르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 개자식들아! 나가서 저 녀석의 공을 우주로 날려버려!”
아무리 정신 나간 필리건이라 해도 전광판에 새겨진 한수혁의 시즌 성적, 6승 평균자책점 0이라는 기록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정말 끝도 없이 밀릴 거라는 생각에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야유를 멈추면 곧바로 팀이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거다.
“오늘 경기에서 지면 경기장에 불을 질러버릴 거다!”
어떤 필리건의 무시무시한 협박 속에 1회말 필라델피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 *
어떤 야구선수가 감독에게 물었다.
‘즐기는 야구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감독이 대답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즐기는 야구.’
영어 발음 덕분에 한국 야구팬들에게는 빵감독이라 불리던 메이저리그의 명장 더스티 베이커가 한 말이다.
사실 이 대화의 진짜 내용은 ‘즐기는 야구’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선수에게 감독이 ‘팬들에게 받은 사랑만큼 다시 돌려주는 것이 즐기는 야구’라 답했다는 가슴 훈훈한 미담이다.
하지만 이 미담을 접했을 당시 꼬맹이에 불과했던 나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즐기는 야구’라는 말을 ‘당한 만큼 복수해주면 야구가 즐거워진다’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내 학창 시절 내내 좌우명이 되어 주었다.
슈우우웅
파아아앙!
“볼!”
“미친! 저 개자식을 퇴장시켜! 퇴장시키라고!”
“넌 오늘 경기가 끝나면 죽을 거다! 우리가 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나이를 먹으며 그 말의 진짜 뜻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꼬맹이 때부터 간직해온 좌우명을 실천으로 옮기는 중이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야구.
상대 팀 선수에게 살해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 미치광이들의 소굴에서 내가 타자 머리 쪽으로 향하는 위협구를 던진 이유다.
“이봐, 투수를 진정시켜. 복수는 이 정도면 충분해. 여기서 더 나가면 난 퇴장을 시킬 수밖에 없다고.”
“이번 공은 그저 실투였을 뿐이지만 좋아요, 혹시나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컨트롤에 더 신경 쓰라고 말해둘게요.”
머리 쪽으로 향하는 107마일 공에 타자가 뒤로 벌렁 넘어지고, 한숨을 푹 내쉰 심판이 상황을 정리하는 가운데 브루스가 진정하라는 사인을 보내왔다.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흥분하지 않았다.
그냥 저놈들이 보낸 선물에 화답을 했을 뿐이다.
남의 머리로 90마일 똥볼을 던지다가는 자신들의 머리통에 107마일 공이 날아올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작은 화답 말이다.
“플레이!”
자신들이 먼저 시작한 일임을 아는지, 거칠게 침을 뱉는 것으로 화를 참아낸 필리스 1번 타자가 다시 타격 자세를 취했다.
괜찮은 척 보이려 애쓰고 있지만 사실 머리 쪽으로 107마일 공이 날아오는 경험을 한 타자가 금세 밸런스를 찾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타석에 들어섰을 때보다 거의 반보 가까이 물러난 타자의 위치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필리스의 머저리 같은 투수는 여기서 또 한 번 몸쪽 높은 공을 던지다가 나와 타이에게 큰 것을 허용했지만,
슈웅
파아앙!
“스트라이크!”
나는 그런 멍청이가 아니다.
일단 바깥쪽 보더라인에 걸치는 포심으로 중심을 흐트러뜨리고,
슈웅
“우왓!”
파아앙!
“스트라이크.”
이를 악물고 다가서는 타자의 몸쪽으로 고속 슬라이더를 붙여 다시 한 번 밸런스를 망가뜨리고,
슈웅
부웅
파앙!
“스윙! 아웃!”
존 한가운데로 들어가다 뚝 떨어지는 80마일 체인지업으로 승부.
“…….”
어이없는 스윙으로 삼진을 당한 타자가 분한 듯 나를 노려보다 덕아웃으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주 약간 달아올랐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머릿속이 맑아진다.
역시 상대의 분노는 나의 행복이다.
아무튼 일단 원아웃.
“플레이!”
대기 타석에서 무언가를 한참 고민하던 필리스의 2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타구의 80% 이상이 1-2루간으로 향하는 잡아당기기에 능한 좌타자.
‘몸쪽 낮은 씽커.’
브루스의 첫 사인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갯짓을 본 내야수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1-2루간을 틀어 막았다.
규정이 변경되어 유격수가 1-2루 간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거의 2루 베이스에 닿을 정도로 붙어 있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주는 압박감은 점점 더 커진다.
수비수들의 위치를 파악한 후 곧바로 와인드업.
생각이 많은 타자들에게는 굳이 시간을 줄 필요가 없다.
숨이 차서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몰아붙이는 게 승부에서 이기는 비결이다.
슈웅
몸쪽으로 향하는 103마일의 하드 싱커.
메이저리그로 넘어온 후 투심을 대신해 던지기 시작한 공이다.
빠른 공이 몸쪽으로 들어오자 타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역회전한 공은 배트의 밑단에 맞았고,
따악!
슈웅
파앙
“아웃!”
결국 평범한 2루수 땅볼이 되며 투 아웃.
가끔은 KBO의 타자들보다 빅리그 타자들이 오히려 상대하기 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다른 모든 걸 떠나 눈에 공이 들어오면 일단 풀스윙을 하고 보는 저 공격성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포심과 거의 구속 차이가 나지 않은 하드싱커가 아주 좋은 무기가 되어주고 있다.
포심과 하드싱커 위주로 투구 로테이션을 가져가다 보니 KBO 때보다 삼진을 잡는 비율이 조금 떨어지고 있지만, 대신 투구 수를 줄이며 좀 더 긴 이닝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162게임을 치르는 살인적인 일정을 버티기 위해서는 이쪽이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와아아아!”
“하비에르! 너만 믿어! 믿는다고! 날려버려!”
“저 개자식을 박살 내버려!”
두 타자가 순식간에 아웃 당하며 쥐 죽은 듯 조용해졌던 관중석이 3번 타자의 등장과 함께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비에르 카스티요.
지난 WBC에서 한 번 상대한 바 있는 필라델피아의 주전 유격수이자 매 시즌 3할 30홈런이 가능하다 평가받는 강타자.
필리스로서는 저 하비에르의 콜업 타이밍을 놓친 게 천추의 한일 것이다.
저 팀이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 진출에 근접했던 2025년, 그때 저 녀석을 콜업했다면 그해 우승 트로피가 어디로 돌아갔을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때 이 팀을 지켰던 베테랑들 상당수가 팀을 떠났고, 필리스는 몇 남지 않은 주축 멤버들과 아직 포텐이 터지지 않은 애송이들, 그리고 시기를 잘못 태어난 하비에르와 함께 서서히 침몰하는 중이다.
뭐, 남의 팀에 대한 감상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고,
“플레이!”
쿠바 출신의 강타자들이 으레 그렇듯 저 녀석 역시 인간 같지 않은 동체시력과 반사신경, 그리고 빗맞은 타구도 펜스 너머로 날릴 수 있는 파워를 갖추고 있다.
말하자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타입이랄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삶에서 나는 저 녀석에게 꽤나 약한 모습을 보였다.
구속을 잃고 제구력과 변화구로 승부하려는 나 같은 투수에게 저 녀석이 엄청나게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슈웅
파아앙!
“스트라이크!”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바깥쪽 높은 코스의 포심.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배트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슈웅
부웅
파아앙
“스윙!”
내 예상이 맞았다.
몸쪽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스플리터에 배트가 따라 나온다.
내가 알고 있는 데이터와 조금 다르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상관없다.
슈웅
틱
“파울!”
105마일 정도로 살짝 구속을 낮춘 바깥쪽 포심으로 영점을 흐트리고,
슈웅
부웅
파앙
“스윙! 아웃!”
오랜만에 던지는 70마일 슬로우 커브로 승부.
허를 찔린 것인지, 아니면 삼진을 당한 게 분해서인지 녀석이 입술을 꾹 깨물고 나를 노려본다.
즐겁다.
지난 삶에서 나를 힘들게 했던 녀석들을 잡아낼 때마다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 * *
–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데이브. 시즌을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우리가 저 선수에 대해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그런 생각 말이죠.
– 맞아요. 방금 하비에르와의 승부는 뭐랄까……. 이런 말이 참 묘하지만 베테랑이 루키를 가지고 노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는군요. 심지어 하비에르 선수가 루키가 아닌데도 말이죠.
– 이제 와서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저 선수가 빅리그에 데뷔해서 미친 듯이 삼진을 잡아낼 때만 해도 공이 워낙 빨라 타자들이 제대로 대처를 못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으니 괜찮아요. 젠장,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 사람이 그랬을 거예요.
– 맞아요. 시애틀 팬 여러분, 분노하지 말고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이제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난번 보스턴과의 경기, 그리고 오늘 던지는 경기를 지켜보고 있자니… 음, 한수혁 선수의 진짜 장점은 구속이 아니란 생각이 드는군요.
– 오히려 구속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다른 장점들이 묻히는 경향이 있죠.
–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저 선수가 워낙 공을 쉽게 쉽게 던지고, 그 공들이 하나 같이 위력적이다 보니 아, 한수혁은 구위로 먹고 사는 투수구나 그런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데… 하아, 아니네요. 굳이 지표를 확인해볼 필요도 없어요. 저 선수는 명백하게 엄청난 두뇌와 대단한 경기 운영 능력을 가진 그런 타입의 투수입니다.
– 참으로 어마어마한 칭찬이군요.
–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죠. 107마일을 던지는 투수가 두뇌와 경기 운영 능력까지 갖췄다니 끔찍하네요. 조금 더 부가설명을 해볼까요? 지표상으로 보면 투구수가 적고, 삼진이 많고, 구속이 빠르고, 볼넷이 적은 것이 구속과 구위 때문이라는 착각이 들 거든요. 하지만 아니에요. 타자들이 한수혁의 공을 못 치는 이유는 빨라서가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코스로 들어오기 때문이에요.
– 스티브, 조금 이른 예측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 일단 들어볼 테니 편하게 말해봐요.
– 만약 한수혁 선수가 무너지지 않고 계속 이 페이스를 유지해 나간다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올 시즌 시애틀 팬들이 53년 동안 기다렸던 월드시리즈 진출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동감이에요. 양키스나 레드삭스 팬들이 들으면 저희에게 돌맹이를 던질 수도 있겠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눈앞에서 저 선수를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드니 말이죠.
– 자, 그럼 조금 더 지켜보죠. 과연 저 선수가 시애틀의 사상 첫 월드시리즈 진출의 꿈을 이뤄줄 영웅이 될 수 있을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