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4화(25/412)
#24. 자발적 노예가 되겠다면야
야구 경기에서 홈런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특별하다.
팀이 이기고 있을 때는 그 격차를 더욱 확고히 벌려주고, 반대로 지고 있을 때는 따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켜준다.
홈런은 팀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힘을 갖고 있다.
지난 시즌 꼴찌를 기록한 팀 성적 때문에 시범경기 첫날부터 잔뜩 굳어 있던 선배들의 얼굴이 내 선제 홈런 한방에 한결 가벼워졌다.
반대로 경기 시작 전까지 우리 팀을 은근히 내리깔아보던 타이탄스 선수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좋아.
역시 홈런이 최고야.
투수들이 날 보고 슬금슬금 피해 다니기 전까지 최대한 많이 때려둬야지.
따아악!
내가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다음 타자인 1루수 조성오 선배가 유격수 직선타로 물러났다.
그리고 오늘 4번 타자로 나선 맥스 워커가 초구를 후려쳐 우중간을 가르는 깨끗한 2루타를 만들어냈다.
50만 달러라는 연봉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타자다.
어차피 잠실야구장에서 홈런을 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드넓은 외야를 생각하면 어설픈 홈런타자보다는 저런 중장거리포가 훨씬 쓸모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잠실에서도 홈런을 뻥뻥 칠 수 있는 나 같은 타자를 구해오는 게 베스트겠지만… 그 돈으로는 꿈도 못 꿀 일이니까.
“아웃!”
내가 잠깐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안치욱이 친 잘 맞은 타구가 2루수 정면으로 갔고, 2루 베이스에서 떨어져 있던 맥스마저 런다운에 걸리며 순식간에 쓰리 아웃.
“방금 건…”
“잘 쳤어. 그냥 운이 없던 거지.”
“흠?”
“계속 그렇게만 해.”
“흐으음···”
본의 아니게 병살타를 치게 된 안치욱이 눈치를 실실 보길래 오랜만에 칭찬을 해줬다.
딱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입가가 실룩이는 걸 보니 꽤나 기쁜 모양이다.
매일 채찍질만 하면 안 된다. 잘했을 때는 칭찬도 해줘야지.
시골집 누렁이도 가끔은 칭찬을 해야 주인을 알아보고 따르는 법이다.
뭐, 방금 공은 제대로 받아 친 게 야수 정면으로 간 것뿐이니까.
이놈 확실히 맘 먹고 하니까 타구 질 하나는 끝내주네.
갈군 보람이 있어.
* * *
“아웃!”
“아웃!”
유격수와 3루수 사이로 완전히 빠져나갈 것만 같았던 총알 같은 타구.
그 안타성 타구를 가볍게 건져낸 한수혁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 앉은 채 이창모에게 정확하고 빠른 송구를 했다.
그 송구를 받은 이창모가 2루를 찍고, 다시 1루로 공을 던져 순식간에 투 아웃.
“나이스!”
“미쳤다! 한수혁, 미쳤어!”
“저걸 잡네. 와···!”
오랜만에 수비 이닝에서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은 이창모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오른 손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 그 느낌, 한수혁의 송구를 받아 다시 1루로 던질 때의 그 짜릿한 느낌.
정말 오랜만이다.
예전 볼티모어 시절, 그 팀에서 10년 이상을 뛰었다는 베테랑 유격수와 처음 호흡을 맞췄을 때 느꼈던 그 감각.
방금 이창모는 한수혁에게서 그 빅리그 베테랑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착각이겠지’
한수혁이 아무리 슈퍼루키라 해도 메이저리그에서 10년 넘게 구른 베테랑 유격수처럼 플레이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방금 전 떠오른 그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이창모가 다시 수비 자세를 잡았다.
갑자기 예전 친정팀에서 버림받고,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워리어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던 때가 떠올랐다.
팀은 세 개의 파벌로 나뉘어 사분오열되어 있었고, 황성민과 송기태 같은 놈들이 팀의 주류랍시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었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이 팀은 꽤나 많이 좋아졌다.
물론 눈에 띄는 선수 보강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한수혁···’
자신의 옆에서 발목을 빙빙 돌리며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신인 하나가 입단한 것만으로 분위기가 확 변해버렸다.
나도 저 녀석처럼 환하게 빛나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나 아무 생각없이, 그저 반복적으로 야구를 하던 이창모가 다시 한 번 예전의 찬란했던 시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 *
방금 전 이창모 선배와의 콤비 플레이는 꽤나 괜찮았다.
역시 메이저리그를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선수와 그렇지 못한 선수 사이에는 수비력에 있어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타구의 평균속도가 KBO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빠른 게 바로 빅리그다.
게다가 빅리그의 타자들은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무조건 풀스윙이다. 볼 카운트가 어떻든 공을 반으로 쪼개 버린다는 마음가짐으로 덤벼든다.
그러니 내야수들은 언제나 총알 같은 타구에 대비해야 한다.
눈 한 번 깜짝 할 사이 자신의 얼굴로 날아오는 타구를 잡아내고, 최소한의 딜레이로 글러브에서 공을 꺼내는 법을 익혀야 한다.
“선배님, 나이스 플레이.”
“뭐? 하하, 그래. 너도.”
그런 면에서 방금 이창모 선배와의 연계 플레이는 정말 만족스러웠다.
지금은 나나 이창모 선배나 워리어스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둘 다 빅리그 출신 아닌가?
어쩌면 이 팀에서 나와 수비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건 저 선배가 유일할 지도 모르겠다.
이창모 선배도 그렇지만 저기 1루에서 송구를 깔끔하게 받아낸 조성오 선배의 수비도 나쁘지 않았다.
몸이 단단하고 타고난 강골인데 비해 의외로 글러브질은 매끄러워 어려운 송구도 곧잘 잡아낸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있었던 시범경기 전 마지막 팀 회식에서 조성오 선배가 날 잡고 서럽게 울던 기억이 난다.
뭐라고 했더라.
아, 맞다.
유치원에 입학한 아들이 아빠가 부끄럽다고 했다나?
팀 내 그 누구보다 가정적인 조성오 선배에게는 그게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나 보다.
‘그런데 선배님, 왜요? 왜 부끄럽대요?’
‘친구가 놀렸대. 나 야구 못한다고. 너희 아버지 야구 더럽게 못한다고. 야, 진짜 요즘 유치원생들 무섭다. 가만 있는 남의 아빠는 왜 건드리는 건데, 어?’
그날 따라 술이 안 받는 건지 맥주 몇 병에 머리 꼭대기까지 취한 조성오 선배는 하필 내 옆에 앉아 그렇게 한시간 가량을 서럽게 울어 댔다.
글쎄, 모르겠다.
선배의 마음이 정확히 어떤지.
나야 아이를 가져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야구를 못해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음.
좀 재수 없었나.
아무튼.
사실 지난 스프링캠프에서 내가 가장 관심있게 지켜본 선수가 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창모 선배고, 또 하나가 바로 조성오 선배다.
한국 나이로 서른 다섯.
이제 꺾일 일만 남은 나이이긴 하지만 특이하게도 조성오 선배의 타격 성적은 매년 미세하게나마 상승하는 중이다.
타고난 피지컬이 괜찮아서다. 쉽게 말하면 힘을 타고난 장사다.
저런 타입은 잘만 관리해주면 적어도 몇 년 이상은 제 역할을 해줄텐데.
만약 조성오 선배가 5번이나 6번에서 홈런 20개 정도만 쳐준다면···
음.
생각할수록 탐나는 인재일세.
“수혁아, 대기타석.”
잠시 생각을 하느라 내 타순이 돌아오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장덕수 선배에게 고맙다는 고갯짓을 한 번 해준 나는 천천히 대기타석으로 들어갔다.
아까 첫 타석에서 내게 홈런을 맞고 멘탈이 터졌던 부산 타이탄스의 용병 투수가 눈에서 불을 뿜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거 웃긴 놈일세.
이름이 뭐라고? 토마스 스펜서?
시애틀 마이너 구단에 있었다고?
저번 생에도 저런 이름은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음, 그렇다면 미미한 놈이로군.
“수혁아, 아까는 깜짝 놀랬다. 살살 하자니까. 형이 맛난 거 사줄 테니까.”
“제가 더 맛있는 거 사드릴 테니까 좋은 공 하나만 더 주실래요, 선배님?”
“뭐?”
“저 계약금 꽤 두둑이 받았거든요.”
예상치 못한 내 대답에 구재현의 입이 마침내 굳게 닫혔다.
괜히 말 섞어봐야 그쪽만 피곤할텐데.
그나저나 저 용병투수 진짜 사고 칠 거 같은 표정인데?
“선배님.”
“응? 왜?”
“혹시나 저 용병이 제 머리 쪽으로 공 던지면 저 가만 안 있을 겁니다.”
“뭔 소리야. 그게.”
“그리고 우리 감독님도 가만 안 계실 거고요.”
“······”
농담이 아니라 정말 빈볼 비슷한 거라도 날아오면 저 용병 놈 가만 안 둘 거다.
감독님이 나서기도 전에 내 손에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거다.
다른 팀 선배에게 이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거냐고?
알게 뭐야. 내가 다른 팀으로 이적할 것도 아니고. 은퇴하고 나서 코치자리 구걸할 것도 아니고.
내가 친절하게 대해야 할 대상은 우리팀 선수들 뿐이다. 다른 팀 선배 따위는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볼.”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타이탄스의 용병은 결국 내게 빈 볼을 던지지 못했다.
볼 카운트 3볼 1스트라이크.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찬스다.
그렇다면.
따아아아악!
“Fuck!”
멘탈이 터진 투수가 3볼 1스트라이크에서 던질 수 있는 공이라는 게 뻔하지.
한 가운데로 들어온 150km 정도의 포심을 좌측 담장 밖으로 날려버린 나는 최대한 천천히, 관중들에게 충분히 환호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며 그라운드를 돌았다.
1루에 서 있던 타이탄스의 용병 타자가 뭔가 기분 나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왜? 천천히 뛰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가당치도 않은 그 시선에 일부러 더 뛰는 속도를 낮춰버렸다.
이러다 정말 시범경기부터 한바탕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
“안치욱!”
“왜? 왜··· 왜? 내가 또 뭐? 나 암 것도 안 했는데?”
아차, 요즘에 하도 저 놈을 쥐 잡듯이 잡다 보니 대기타석에 있던 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호통을 지르고 말았다.
···음, 딱히 할 말은 없는데 이를 어쩌지.
“몸 쪽으로 던지면 그냥 맞아버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저 투수가 빈 볼 던지면 그냥 맞고 누워서 죽은 척하라고. 이 형이 때려 눕혀줄 테니까.”
“···미친.”
진짠데. 저 투수 놈 저거 눈깔이 맛이 간 게 영 수상한데.
에라, 모르겠다. 나머지는 저놈이 진짜 빈 볼을 던지고 나서 생각해보자.
그렇게 연타석 홈런을 치고, 안치욱도 한 번 갈궈준 나는 어느새 내 지정석 비스무리하게 되어버린 벤치 가장 오른쪽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런데 그때, 가벼운 부상으로 일찍 교체된 조성오 선배가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뭐지.
“수혁아, 뭐 좀 물어봐도 될까?”
“네, 선배님. 말씀하세요.”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네?”
“그··· 홈런 수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홈런이요?”
185cm에 85kg 정도의 스펙을 유지하던 조성오는 1루수로 전환하며 몸무게를 조금 더 늘렸다.
하지만 홈런 수는 조금도 늘지 않았다.
그 역시 알고 있다.
한 팀의 주전 1루수라고 하면 적어도 스무 개 이상의 홈런은 쳐줘야 한다는 걸 말이다.
그가 만나본 선수 중 가장 홈런을 쉽게, 그리고 멀리 치는 새까만 후배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홈런을 늘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 순간 그 후배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걸 조성오는 눈치채지 못했다.
* * *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의외로 빨리.
지난 스프링캠프에서부터 내게 장타력의 비결에 대해 묻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당장 안치욱과 맥스 워커, 두 놈은 물론이고 주전 자리를 노리는 몇몇 선배들과 입단 동기들이 번갈아 가며 내 타격 매커니즘에 대해 묻곤 했다.
하지만 별로 해줄 이야기가 없었다. 애초에 선수마다 특성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안치욱처럼 타고난 덩치에도 불구하고 교타자에 어울리는 재능을 타고난 놈도 있는 거고, 맥스처럼 큰 스윙보다는 간결한 스윙을 할 때 오히려 더 장타가 잘 나오는 선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조성오 선배는 지금보다 조금 적극적으로 장타를 노려도 되는 타입의 선수라 볼 수 있었다.
“글쎄요. 그게 딱 정답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라서요.”
“그러지 말고 말 좀 해줘라. 응?”
현재 우리 팀 내에서 조성오라는 선수에 대해 주목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언제나 그랬듯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1인분에 가까운 성적은 거둬줄 선수, 딱 그 정도가 조성오 선배에 대한 기대치의 한계다.
나와 안치욱, 맥스 워커 같은 신입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뒤를 받쳐주는 딱 그 정도 용도.
그런 사내가 나에게 묻는다.
홈런을 많이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은근히 기다리던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따질 건 따져봐야겠지.
과연 조성오라는 사람에게 내 연습공간과 시간을 공유할 가치가 있을까?
지금 내게, 아니, 우리 팀에 가장 절실한 건 내 뒤를 받쳐줄 타자다.
아직은 시범경기이기에 투수들이 정면승부를 걸어오고 나도 마음 놓고 스윙을 하고 있지만, 정규 시즌에 들어가면 대놓고 나를 피하려는 투수들이 늘어날 것이다.
투수들이 내게 볼넷을 남발하는 걸 막으려면 내 등뒤를 지켜줄 타자가 필요하다.
나이에 비하면 꽤나 다부져 보이는 몸과 유난히 길어 보이는 팔, 최고참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팀 내 테스트에서 상위권에 올랐던 피지컬까지.
이거 사실 제이콥이 딱 다루기 좋아하는 그런 타입이기는 한데···
좋아, 그렇다면.
“오늘 경기 끝나고 같이 어디 좀 가보실래요, 선배님?”
“응?”
비록 먹고 싶은 거 다 참아야 하고, 술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고, 거기에 매일 경기가 끝난 후 남들 놀고 쉴 때 추가 훈련도 해야 하지만.
주변에서는 다 늙어서 대체 뭔 주책이냐 타박하고, 가끔은 이게 인간이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재미도 없고, 힘들고, 가끔은 회의감도 들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때려 치고 싶고, 제이콥의 얼굴에 펀치를 날리는 상상을 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뭐.
참고 잘만 따라오면 노력의 성과 하나는 정말 확실히 나올 테니까
자발적 노예가 된 걸 환영합니다.
웰컴 투 제이콥 월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