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5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53화(254/412)
#253. 다나카의 시련
나는 딱히 대단한 팬서비스 정신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린아이들을 향한 조건 없는 애정을 보유한 사람도 절대 아니다.
가만…….
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다가 회귀를 했으니 이 부분은 조금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팀이 패하고, 나도 모르게 민예린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데 어떤 꼬마아이가 안전망에 기대 서럽게 울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저 꼬마만 하던 시절, 가장 좋아하던 선수가 다른 팀으로 팔려갔다는 소리를 듣고 서럽게 울던 기억 말이다.
갑자기 꼬마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민예린을 통해 아이와 보호자를 식사에 초대했고, 그 김에 잔소리도 좀 해줄 겸 몇몇 동료들을 그 자리에 동석시켰다.
그 일이 시애틀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는 건 오늘 경기 직전에야 알게 되었다.
“플레이!”
어쨌든 어제 그 아이에게 약속했다.
오늘 경기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길 테니 꼭 다시 야구장에 찾아오라고.
아무리 우리가 강팀이라 해도, 혹은 상대가 약팀이라 해도 승리를 예고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긴다고 약속을 했냐고?
저기 마운드 위 시체처럼 서 있는 놈 때문, 아니, 덕분이다.
다나카 야마토.
WBC와 올림픽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등판해 내 훌륭한 홈런 공급원이 되어 주었던 투수.
슈웅
퍼엉
“볼.”
“우우우!”
“개자식아! 스트라이크를 던져! 피해 가면 타이가 널 응징할 거다!”
방금 그 어이없는 공은 일부러 뺐다기보다는 실투였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썩은 동태 눈깔을 한 채 계속 이마에 땀을 닦아내는 걸 보니 확실하다.
예전 삶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고, 이상하게 내 타격 매커니즘과 저놈의 공은 상성이 잘 맞는다.
뭐랄까, 그냥 눈 감고 대충 휘둘러도 홈런이 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플레이!”
무사 주자 1루 상황, 팀의 연패를 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취점이 중요한 상황이지만.
드드득
나 자신을 믿고 적극적으로 큰 걸 노려본다.
그립의 위치를 조정하고, 스탠스를 살짝 변경해 바깥쪽 공에 대응할 수 있게 준비하고,
저 녀석의 주무기인 투심의 궤적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하나, 둘, 셋,
따아아아악!
“와아아아아아!”
“퍼킹! 그레이트! 이거지! 바로 이거야!”
“빌어먹을! 어제까지 3연패한 건 잊어줄 테니 저 투수를 죽여! 죽여버리라고!”
배트에 맞는 순간 홈런이라는 걸 알았다.
타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배트를 허공에 던져버리고, 1루 응원석 그 아이와 할아버지, 그리고 민예린이 있는 쪽을 향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좋아! 최고야! 한수혁! 네가 최고다!”
“어제 욕한 거 미안해! 젠장, 널 믿었다고!”
“오빠아아아아!”
천천히 달리며 1루 응원석을 바라보았다.
안전망에 딱 붙은 채 방방 뛰고 있는 민예린과 꼬마, 그리고 한 발 떨어진 곳에 그 아이의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다시 한 번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준 후 2루로, 3루로.
“빌어먹을 자식.”
3루를 돌아 홈으로 향하던 순간 어떤 머저리의 목소리가 들려오길래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지난 시즌까지 시애틀의 주전 3루수였던 션 터커, 내 자리를 만들기 위해 컵스로 트레이드된 그놈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돌아가서 턱을 날려버릴까 하다가 한 번만 참기로 했다. 내가 퇴장당하면 선망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아이가 슬퍼할 것 같아서.
대신 홈플레이트를 밟으며 컵스의 포수 놈에게 대신 말했다.
“이봐.”
“뭐? 왜 말을 시키는 건데?”
“저기 3루수 저 자식에게 전해. 불만 있으면 뒤에서 비겁하게 궁시렁거리지 말고 언제든 정면으로 덤비라고.”
“뭐라는 거야? 그게 뭔데, 이 개자식아.”
“한 번만 더 내 뒤에서 궁시렁거리다 걸리면 너희 전부를 죽여 버리겠다는 소리지.”
“이런… 미친!”
“그만! 자, 말다툼은 그 정도면 충분하니 그만 덕아웃으로 들어가.”
경고를 날려준 후 대기타석에 있는 타이에게 다가갔다.
타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뭐야? 홈런까지 치고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저 3루수 놈이 뒤에서 헛소리를 해서요. 아무튼 타이, 저 투수, 절대 좋은 공은 못 던질 거예요. 충분히 지켜봐도 좋고, 만약 칠 거면 존을 좀 넓히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 알았어. 참고하도록 하지.”
3연패를 끊고 지구 1위 자리를 지켜야 하는 시애틀 매리너스, 반면 연승을 이어가며 지구 1위 자리를 노려야 하는 시카고 컵스.
팀의 운명을 책임진 에이스 간의 맞대결.
거기에 트레이드로 앙심을 품고 있는 머저리 하나.
“좋구나.”
“응? 한? 뭐가 좋아?”
“아니, 오늘 경기하기 참 좋은 날이라고.”
“그런가?”
* * *
1회말, 한수혁의 투런 홈런으로 시애틀이 2점을 먼저 선취했다.
이어진 2회초 공격, 지난 시즌 팀 내 유일한 3할 타율, 거기에 85타점이라는 제법 쏠쏠한 성적을 기록하고도 컵스로 트레이드 당한 션 터커가 타석에 들어섰다.
“이봐, 브루스.”
“흠, 우리가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20대가 주축이 된 시애틀 선수단에서 그나마 연차가 가장 많았던 주전포수 브루스 매튜스와 3루수 션 터커는 서로 다른 성향 탓인지 함께 뛰는 내내 심각한 의견 충돌을 겪어야 했다.
다니엘 단장이 션 터커를 트레이드시킨 건 일차적으로 한수혁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지만, 팀워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브루스와 이기적인 션 터커 중 한쪽의 손을 들어준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컵스로 트레이드 된 션 터커는 주전 3루수이자 중심 타자 자리를 꿰차며 제법 괜찮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됐고, 저 빌어먹을 루키에게 전해. 한 번만 더 배트플립을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션 터커의 말에 브루스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너 아직도 인터넷 잘 안 하지?”
“무슨 개소리야?”
“흠, 역시 그렇군. 좋아,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살 거면 너희 덕아웃에 있는 다른 머저리들에게 대신 부탁해봐. 시애틀 한수혁 벤치클리어링 영상을 보여 달라고 말이야.”
뭔가 떠오른 게 있는지 션 터커가 입을 닫았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에 안 드는 놈이라 생각하며 브루스가 투수에게 초구사인을 내보냈다.
‘몸쪽 높은 포심.’
대충 상황을 파악한 라이언 티보우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포수가 유도한 곳으로 공을 던져버렸다.
슈웅
파앙
“볼!”
“Fuck!”
“진정해. 손에서 미끄러진 것뿐이니까. 아까 너희 투수도 그랬잖아.”
“빌어먹을 마음에 안 드는 자식들, 다 죽여버릴 거다.”
“심판, 전 분명 타자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군요. 중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흠, 그러지. 너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다만 확실한 건 더 이상 욕설을 하고 시간을 끌면 내가 그놈을 퇴장시킬 거라는 거야. 이해했나?”
“전 이해했습니다.”
“…….”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션 터커의 입이 다시 닫혔다.
오랜 시간 그를 알아온 브루스는 지금 어떤 공을 던져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바깥쪽 체인지업.’
슈웅
부웅
“스윙!”
“Fuck! Fuck! Fuck!”
“워워워, 진정해. 왜 배트를 들고 투수를 노려보는 건데? 방금 공을 못 친 건 네 탓이지, 투수 탓이 아니야.”
“개자식들…….”
“됐고, 입 닫고 야구나 하라고.”
션 터커의 기분을 엉망으로 흐트러놓은 브루스가 라이언을 향해 마지막 사인을 보냈다.
‘다시 한 번 체인지업.’
끄덕
슈웅
부웅
“스윙! 아웃!”
“비겁한 자식들!”
“체인지업으로 삼진을 잡은 게 비겁한 거면 역대 사이 영 위너들은 전부 비겁자들이겠군. 헛소리하지 말고 들어가, 친구. 우리는 지금 야구를 하는 중이거든.”
한참 동안 투수와 포수를 노려보던 션 터커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순간 브루스는 오랜 시간 가슴 속에 맺혀 있던 묵직한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저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놈 때문에 이 팀의 분위기를 망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만고만한 루키들 속에서 야구 조금 잘한다고 오만 짓을 다 하던 건방진 3루수.
콧방귀를 한 번 더 껴준 브루스가 자기도 모르게 3루 쪽을 바라보았다.
저 쓰레기 같은 놈과는 실력이나 인품, 모든 면에서 비교도 할 없는 최고의 3루수가 거기 서 있었다.
‘좋아, 다음에는 네가 트레이드 되고 우리 3루가 더 튼튼해졌다는 말로 도발해볼까?’
브루스가 자기도 모르게 씨익 웃음을 지었다.
* * *
“왜? 왜 못 하겠다는 건데? 이 겁쟁이 자식아!”
“뭐야?”
“이봐! 션! 그만둬! 선발투수에게 뭐 하는 짓이야?”
“젠장, 이 팀에는 전부 비겁자들뿐이군.”
“말 조심해. 한마디만 더 하면 벌금이야.”
1회말 한수혁의 시즌 21호 투런 홈런으로 시애틀이 2점을 앞서가는 가운데 3회말, 다시 시애틀의 공격이 준비 중이었다.
던지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덕아웃을 나오는 다나카 야마토에게 션 터커가 말했다.
한수혁을 맞히라고, 빈볼을 던지라고.
당연한 말이지만 다나카가 펄쩍 뛰며 거부했고, 상황을 인지한 베테랑 1루수가 옆으로 다가가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얼굴을 붉힌 채 3루로 향하는 머저리를 보며 다나카가 생각했다.
‘팀을 옮겼어야 했나.’
거친 환경은 사람을 포악하게 만든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보스턴 레드삭스와 함께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최고이자 최악의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팀이 바로 시카고 컵스다.
무려 108년이라는 시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기다리며 이 팀의 팬들은 흉포화되었고, 그런 팬들의 눈치를 보며 뛰는 선수들 역시 점점 예민하고 포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든 이들이 그런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다나카가 보기엔 그랬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겸손하고 섬세한 성격을 가진 자신이 뛰기에 시카고는 적합한 팀이 아니었다.
돈을 조금 덜 받더라도 다른 팀으로 이적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다나카가 마운드에 올라섰다.
꿀꺽.
방금 전까지 같은 팀 머저리 3루수 때문에 달아올랐던 기분이 상대 팀 3루수로 인해 차갑게 식어버렸다.
한수혁부터 시작되는 3회말 시애틀의 공격.
다나카가 자꾸만 꺼지려 하는 정신을 부여잡고 포수의 사인을 바라보았다.
도리도리
도리도리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포수의 사인을 다나카가 연달아 거부했다.
몸 쪽 낮은 공, 바깥쪽 높은 공, 모두 마음에 안 든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고의사구로 내보내고 싶지만, 그런 선택을 한 팀들이 다음 타자인 타이 존슨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 다나카는 잘 알고 있었다.
포수의 얼굴에 짜증이 떠올랐다.
피치 클락의 도입으로 15초 안에 공을 던져야 하는 상황, 마냥 시간을 끌 상황이 아니다.
‘존 밖으로 흘러 나가는 커브.’
끄덕 끄덕 끄덕
포수가 유인구 사인을 내자 다나카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 행복회로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여기서 빠지는 공에 저 녀석이 헛스윙을 해주고, 그렇게 운이 좋으면 삼진, 아니,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그냥 범타, 아니, 아니, 그것도 욕심이지. 그래, 그냥 안타로 내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 정도면 감독도 납득하겠지. 젠장, 인터리그 따위는 대체 왜 하는 거야? 제발, 하느님, 제발!’
믿지도 않는 하느님을 찾으며 다나카가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커브볼을 던졌다.
이 공이 자신을 절망에서 구원해줄 것이라 믿으며.
하지만,
따아아아악!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공을 한수혁이 무식하게 밀어쳐 우측으로 날려버리는 순간,
그리고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 공이 어디로 갔는지 알 것 같던 그 순간.
“오오오오오!”
“간다! 그래! 퍼킹! 이거지!”
“넘어갔다! 또 홈런이야!”
“한수혁! 젠장! 욕해서 미안해! 미안하다고!”
두 타석 만에 홈런 두 개를 허용한 다나카가 또 한 번 마운드에 털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