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7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73화(274/412)
#273. 이기고 싶다
“젠장, 끔찍할 정도로 피곤하군.”
“저 녀석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러니 다들 힘내자고.”
“오늘은 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긴 경기를 치른 다음 날.
로키스와의 3차전을 준비하는 시애틀 선수단의 컨디션은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모든 이들이 내게 이런 인사말을 건네 왔다.
뭐가 됐든 오늘은 빨리 좀 끝내 달라고.
나 역시 바라는 바다.
지금 내 머릿속은 오늘 선발 등판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엉망진창이니까.
어제 늦은 밤이었다.
덴버 원정길까지 따라온 민예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냥 얼굴을 보고 얘기하자고 했더니 피곤한데 그럴 필요 없다고, 짧은 이야기이니 그냥 전화로 하겠다고 했다.
평소답지 않은 태도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오빠, 그 여자분 찾은 거 같아요.’
‘뭐?’
‘부탁하신 그분이요. 제가 부탁한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네, 지금 LA에 머물고 있대요.’
‘…….’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그 순간 든 생각은 당장 LA행 비행기를 타야겠다는 거였다.
‘오빠, 진정하시고요. 제가 먼저 가서 만나볼게요. 그러니까 원정 일정 다 치르고 돌아오셔도 돼요. 제가 꼭 잡아둘게요. 혹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면 따라갈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예린아…….’
민예린의 말에 잠깐 날아갔던 이성이 돌아왔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일단 찾았으니 다시 놓칠 일은 없겠지.
하루 이틀 늦게 본다고 해서 뭔가 문제가 생길 리는 없다.
그리고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면, 내 기억 속 그녀가 맞다는 게 확인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눈으로 그녀를 봐야 할 지,
그걸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예린아.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좀 부탁할게.’
‘알았어요, 오빠.’
민예린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지금 민예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은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민예린을 위해서라도 내 기억 속 그녀와의 문제를 빨리 털어내야 한다.
내 진정한 두 번째 삶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 * *
“플레이!”
시작하자마자 타선이 대폭발했던 어제와 달리 1회초 시애틀의 공격이 득점 없이 지나갔다.
1번 중견수 데릭 플레밍
2번 투수 한수혁
3번 1루수 타이 존슨
4번 우익수 안토니오 가르시아
5번 좌익수 짐 브라운
6번 포수 브루스 매튜스
7번 3루수 리암 랜드먼
8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
9번 2루수 조나단 오웬스
어제 경기에서 가벼운 부상을 입은 척 클락이 빠지고 대신 토니가 우익수로 들어갔다.
덕분에 우측 공간이 상당히 휑해졌지만,
상관없다.
최대한 그쪽으로 타구를 안 보내면 그뿐이다.
오늘 경기에서 나는 평소와 조금 다른 접근법을 택할 생각이다.
이곳 쿠어스 필드는 빗맞은 타구도 담장을 넘어가는, 타자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어제 경기에서 득점과 관련된 기록들이 쏟아진 게 우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삼고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은 다른 29개 구단의 타자들과 조금 다른 타격 매커니즘을 유지하고 있다.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구속 혁명이 일어나고 100마일을 넘게 던지는 투수들이 속속 등장하며 타자들의 타격 방식은 공을 강하게 잡아당겨 장타를 노리는 어퍼 스윙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예전과 같은 어설픈 컨택 위주의 레벨 스윙으로는 100마일이 넘는 강하고 빠른 공에 도저히 대처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어스 필드에서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다.
굳이 강하게 스윙하지 않아도 타구를 멀리 보낼 수 있다 보니, 로키스 타자들 중 상당수가 컨택 위주의 레벨 스윙을 사용하고 있다. 맞추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쿠어스 필드를 벗어난 로키스 타자들은 다른 구장에서 죽을 쑤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산(山) 사나이라는 놀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거다.
부웅
“스윙!”
저런 레벨 스윙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슈웅
따악!
“아웃!”
바로 역회전 공이다.
수평에 가까운 각도로 날아오는 배트를 피해 가라앉는, 범타를 대량으로 유도할 수 있는 구종.
오늘 나는 포심이 아닌 투심과 싱커, 그리고 커브,
이 세 가지 구종으로 산 사나이들을 상대할 생각이다.
* * *
슈웅
부웅
“스윙! 아웃!”
– 아아, 진짜 엄청납니다! 그것 말고는 뭐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한수혁 선수가 7회 말 로키스의 3번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7회 말 0 대 0 팽팽한 균형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수혁 선수는 7회까지 단 한 명의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 휴우, 고산지대라 그런가요, 아니면 한수혁 선수의 피칭이 너무 대단해서 그런가요?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 같네요.
– 위원님도 그러신가요? 저도 그렇습니다. 중계실에 산소호흡기가 있길래 이건 대체 뭐 하는 물건인가 싶었는데 정말 이게 필요한 순간이 오네요.
– 어쨌든 지금까지 상황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7회 말까지 양팀의 공방전이 끝났고요. 한 경기 팀 최다 득점 기록이 나왔던 어제와 달리 양 팀 모두 한 점도 내지 못한 채 0 대 0 스코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경기가 지루하느냐? 천만에요!
– 지루할 수가 없죠.
– 맞습니다. 사실 웬만하면 이런 상황이 진행 중일 때는 중계에서도 입을 조심하곤 하는데, 한수혁 선수만큼은 예외입니다. 지난번 인터뷰 때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그런 징크스 같은 거 신경 쓰지 않으니 편한 대로 하시라고.
– 그렇다면?
– 네, 시청자 여러분, 투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이곳 쿠어스 필드에서 한수혁 선수가 7회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일단 지켜보시죠. 한수혁 선수의 위대한 발걸음을 말이죠.
* * *
부웅
“스윙! 아웃!”
“젠장…….”
8회 초, 시애틀의 공격.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 대타로 나섰던 척 클락이 삼진을 당하며 이닝이 종료되었다.
이 지옥 같은 구장에서 완벽한 피칭을 이어가고 있는 한수혁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은 시애틀 타자들이었지만.
어제 경기의 여파가 너무 강했다.
메이저리그 한 경기 한 팀 최다 득점에 해당되는 31점을 올린 시애틀 타자들의 스윙은 말도 못 할 정도로 커져 있었고, 추가 훈련을 통해 이를 바로잡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커져 버린 스윙, 무너진 타격 밸런스, 거기에 엄청난 피로도가 시애틀 타자들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저기, 한…….”
“쉿.”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척 클락이 한수혁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어제 경기의 선발이자 이 팀의 주장인 라이언이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지금 한수혁에게 필요한 건 어설픈 응원이나 격려 같은 게 아니다.
칼날 같은 집중력,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를 그대로 내버려둘 필요가 있었다.
선수단의 작은 술렁임 속에 감겨 있던 한수혁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8회 말, 시애틀의 수비가 시작되었다.
* * *
파앙
“스트라이크!”
경기 전 설계한 대로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
하드 싱커와 싱커, 투심, 커브.
오늘 난 이 네 개의 공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로키스 타자들은 내 공에 전혀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회귀 전 쿠어스 필드에서 난타당한 경험이 아니었다면 오늘 이런 투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내 공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쿠어스 필드라고 해서 굳이 내 투구 매커니즘을 바꾸고 싶지 않았고, 그런 태도는 결국 대량실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두 번 실수는 없다.
경험이란 이렇게 무서운 법이다.
슈웅
따악!
“파울!”
그래,
맞다, 경험은 무서운 거다.
그렇기에 나는 회귀 전 그녀에 대한 기억과 경험으로 인해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그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슈웅
파앙
“볼.”
삼진을 잡으며, 내 앞으로 굴러오는 타구를 처리하며,
자꾸만 떠오르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지금쯤 민예린이 그녀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그녀도, 그리고 민예린도 내가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의아할 것이다.
회귀 전 기억이 없는 그녀는 물론이고, 내 부탁 하나에 몇 년째 이 일에 매달리고 있는 민예린 역시 내가 왜 그녀를 찾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둘에게 진실을 얘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슈웅
따악!
“파울!”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녀에게 해줄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미안하고, 고맙다고. 나는 당신의 조언으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그러니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해 달라고,
그녀는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해시킬 방법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다. 그게 뭐든, 얼마가 걸리든,
그 일을 끝낸 후에야 나는 비로소 내 두 번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테니까.
슈웅
부웅
“스윙! 아웃!”
로키스의 4번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이제는 야유할 힘조차 떨어진 건지 쿠어스 필드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바싹 긴장한 얼굴을 한 5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슈웅
따악!
“아웃!”
초구 포수 팝 플라이 아웃.
정말 재미있는 건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한 상황에서도 내 몸이 알아서 기계적으로 공을 뿌리고 있다는 거다.
느리게, 빠르게, 강하게, 약하게, 바깥 쪽, 낮은 쪽,
이런 몸을 얻기 위해, 이런 실력을 갖기 위해, 나는 두 번의 삶을 거치며 수없이 많은 노력을 해왔다.
8회 말 스코어 0 대 0.
지루한 0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로키스 타자들은 내게 좋은 공을 전혀 주지 않고 있고, 동료 타자들의 방망이는 허공을 가르기 바쁘다. 심지어 타이 존슨조차도.
하지만 상관없다.
슈웅
부웅
“스윙! 아웃!”
그녀에 대한 생각에 반쯤 정신을 뺏긴 상태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패배할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건 예감이 아닌 확신이다.
그래, 나는 확신한다.
지금 이 순간 나를 넘어설 수 있는 선수는 없다고.
“젠장, 한, 어떻게든 나까지 찬스를 이어줘. 몸에 맞아서라도 점수를 내줄 테니까.”
“타이.”
“음?”
“걱정 말아요. 우리는 이길 거예요.”
그렇게 9회 초 시애틀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 * *
“베이스 온 볼스!”
또 한 번의 볼넷을 얻어낸 한수혁이 1루로 걸어 나갔다.
베이스를 밟은 한수혁이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뭔가에 집착하는 듯한, 또 어찌 보면 모든 것에 통달한 듯한 표정.
그런 한수혁을 보며 타이 존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빌어먹을.’
그가 본 한수혁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선수이다.
그런 놈이 오늘은 뭔가에 정신이 팔렸는지 반쯤 넋이 나간 채 경기에 임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타이 존슨은 안다. 빅리그 최고 레벨에서 15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그는 한수혁이 평소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상태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녀석을 도와주고 싶었다.
퍼펙트 게임, 그것도 투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쿠어스 필드에서의 대기록.
아무리 한수혁이라 해도 이런 대기록의 순간은 다시 찾아오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부웅
“스윙!”
한번 무너진 타격감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어제 너무 신나게 배트를 돌린 탓에 스윙이 말도 안 되게 커져버렸다.
야구 선수의 몸은 정밀기계와도 같다. 그렇기에 일관된 관리와 조율이 필요하다.
타이 존슨 정도 레벨의 선수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뭔가를 조정할 시간 없이 오늘 경기가 시작되었다.
파앙
“볼!”
그걸 눈치 챈 로키스 투수들은 오늘 하루 종일 유인구만 던져대고 있다.
문제는 시애틀 타자들의 상태가 그런 유인구를 골라내기 힘든 상황이라는 데 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아무리 한수혁이라 해도 기계는 아니다.
산소가 희박한 탓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곳에서 9이닝 이상을 던질 수는 없다. 로키스가 네 명의 투수를 올리는 동안 혼자 마운드에 서있게 한 것만으로 충분히 무리를 시킨 상황이다.
아마도 감독은 이번 이닝 시애틀이 점수를 내지 못하면 한수혁을 내릴 것이다.
빅리그 감독은 처음인 벤자민이지만 그가 얼마나 강단 있고 뚝심 있는 사람인지 타이 존슨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노린다. 이번 이닝에 반드시 점수를 내서 한수혁의 대기록을 돕는다.
드드득
전성기에 비해 떨어진 배트 스피드, 그리고 아무리 보강을 하려 해도 예전처럼은 돌아오지 않는 손목 힘.
그걸 잘 알고 있는 상대 투수들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바깥쪽 승부를 걸어오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노려야 할 건 바깥쪽 공이라는 뜻이다.
다른 구장이라면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쿠어스 필드다. 배트 중심에 맞추기만 하면 얼마든지 담장을 넘길 수 있는 곳.
아주 오래전 처음 빅리그에 데뷔했을 때를 떠올려본다.
가진 거라고는 넘쳐나는 힘밖에 없던 애송이 시절의 감각을 불러오기 위해 애써 본다.
번쩍
반쯤 감겨 있던 타이 존슨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존 중앙으로 들어오다 밖으로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공을 향해 있는 힘껏 스윙,
따아아악!
맞는 순간 손목에 최대한 힘을 주고 공을 밀어냈다. 여기서 조금만 밀려도 바로 파울이 될 것이다.
지이잉
손목이 시큰거린다. 아무래도 정타는 아닌 것 같다.
배트를 집어던진 타이 존슨이 미친 듯이 1루를 향해 뛰었다.
어차피 투 아웃 상황,
주자의 위치, 타구의 방향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1루 베이스를 밟는 거다.
“흐압!”
기합까지 내지르며 1루에 도착했다.
됐다. 일단 아웃은 아니다.
주자는? 한수혁은 어디까지 갔을까? 2루? 아니면 2루?
그 순간 타이 존슨의 귓가에 엄청난 야유가 들려왔다.
“우우우우우!”
“개자식들! 결국 또 홈런이야!”
“연봉을 반납해! 빌어먹을 놈들아!”
그제야 타이 존슨은 자신이 때려낸 타구가 외야 펜스를 넘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관중들의 야유를 들으며 천천히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2루를 돌아 3루로, 다시 홈으로,
먼저 홈에 들어와 있던 한수혁이 타이 존슨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역시 당신을 택한 내 선택이 옳았어요, 타이.”
“젠장, 그래. 바로 그 말이 듣고 싶었다고, 애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