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7화(28/412)
#27. 158km/h 투심
빅리그 시절 내게 야구는 전쟁이고 그라운드는 전쟁터였다.
한 타석, 한 타석 내 가치를 입증하고 그 대가로 높은 연봉을 받아내는 게 야구의 전부라고 착각했다.
때문에 개막전 첫 타석부터 정규시즌 마지막 타석까지, 그 모든 타석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방해하는 이들이 있었다.
시즌이 끝나갈 무렵이 되면 마이너에서 유망주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애송이들이 테스트를 위해 빅리그에 올라온다.
그 애송이들을 위해 몇 번의 타석을 양보하는 것, 나는 그게 너무도 못마땅했다.
얼빠진 표정을 한 놈들이 내게 다가와 사인을 요청하거나 조언을 구하려 할 때 저리 꺼지라고 말해버린 적도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난 항상 뭔가에 쫓기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나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이제 막 빅리그에 첫 발을 딛은 애송이들에게 조언 한 마디 못 건넬 정도로 말이다.
변명 같은 게 아니다.
그냥 그때는 그랬던 거라 애써 납득해보는 거다.
팀당 14경기씩 예정되어 있던 시범경기가 우천취소 없이 모두 정상적으로 치러졌다. 내가 워리어스 유니폼을 입은 후 첫 시범경기 일정이 마무리된 것이다.
시범경기이기에 승패나 순위가 크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워리어스는 9승 5패를 기록하며 광주 재규어스와 함께 공동 2위를 기록했다.
주전 중견수와 유격수를 내보낸 워리어스는 이적생 최민석이 그 자리를 잘 메우며 전력 면에서는 오히려 나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송기태가 빠져나간 3루는 안치욱이 메웠다.
점점 좋아지고 있는 타격에 비해 3루 수비는 아직 어설프지만··· 이제 갓 입단한 새파란 풋내기에게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솔직히 욕심이다
뭐, 별 수 있는가, 유격수인 내가 열심히 뛰어다니는 수밖에.
“수비 실책 한 번 할 때마다 펑고 2시간이다. 안치욱.”
“······”
“대답.”
“···알았다고.”
이번 시범경기 결과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만족하는 중이다.
타율 0.431, 출루율 0.518, 장타율 0.851, 홈런 8개, 도루 2개. 이번 시범 경기에서 내가 기록한 성적이다.
전문가들 중에는 내 성적을 두고 초심자의 행운, 데이터 부족으로 인한 일시적인 플루크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었다.
훗.
나쁘지 않다. 나에 대해 방심하는 투수들이 많을수록 내 홈런개수는 늘어날 테니까.
“수혁아! 여기!”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맥스 워커와 조성오 선배, 그리고 최민석 선배가 모여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민석 선배님. 감기 기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어? 아아, 괜찮아. 어제 푹 잤더니. 후배들이 다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 혼자 쉴 수 있나, 하하.”
이 팀에 한 10년 정도는 있었던 것 같이 구는 최민석 선배 옆에 나란히 앉아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경고하고,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다.
192cm에 달하는 내 체격으로 유격수를 오래 보면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때문에 메이저리그에서도 내 주 포지션은 3루와 우익수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다른 포지션으로 가면 신인인 유인철, 혹은 2군에서 뛰고 있는 누군가가 올라와 유격수를 봐야 할 상황이니까.
게다가 안치욱이 3루를 봐야 하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내가 없으면 안 된다.
최대한 스트레칭에 신경을 쓰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수비방법을 익히는 수밖에.
다행인 것은 이 젊고 팔팔한 육체가 내 생각보다 훨씬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굳이 무리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볍고 빠르게.
간단히 스트레칭이 끝난 후에는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며 워밍업을 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이만식 선배가 나를 향해 손짓을 한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나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 했는데.
“야, 수혁아. 너 잘 왔다.”
“무슨 일 있나요?”
“몇 번 던져보니까 투심보다는 싱커가 나한테 더 잘 맞는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글쎄, 솔직히 말하면 이만식 선배가 싱커를 던지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래도 뭐 굳이 대답을 해야 한다면···
“투심이 잘 안 맞으시나요?”
“어? 어, 그게 던질 수는 있는데 영··· 사실 싱커도 좀 애매하긴 한데 우리 팀에 싱커 잘 던지는 애가 없어서 비교해보기도 뭐하고.”
“음, 잠시만요.”
“응?”
이 팀의 다른 선수들이 그렇듯 한 동안 의욕없이 선수생활을 해오던 이만식 선배는 얼마 전부터 새로운 투수코치와 함께 역회전성 공을 추가로 연마하기 시작했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팀 내에서 조성오 선배에 이어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서른 세 살 투수 최고참인 그이지만 여전히 선발투수로서 경쟁력은 살아 있으니까.
그가 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용병 두 명과 함께 썩 괜찮은 선발 로테이션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투심과 싱커라··· 사실 일부러 구분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슷한 구종이다.
우 투수가 우 타자에게 던질 경우 몸 쪽으로 휘며 떨어지는 역회전성 볼.
굳이 따지자면 싱커보다 투심의 구속이 좀 더 높기는 한데, 투수에 따라서는 싱커의 구속이 높은 경우도 있어서 이것조차 구분이 애매하다.
아무튼 나는 싱커와 투심에 대해서는 꽤 깊은 조예를 갖고 있다.
부상을 당해 패스트볼 구속이 뚝 떨어진 후 서드피치로 삼기 위해 꽤 오래 연습을 했었으니까.
포심과 구속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투심. 당시 메이저리그에서 현역 최고의 구종 중 하나로 꼽혔던 게 바로 내 투심이다.
의아한 얼굴을 한 이만식 선배를 뒤로 하고 가볍게 몸을 푼 나는 비어 있는 마운드 위로 올라갔다.
옆에서 포수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장덕수 선배에게 공을 받아줄 것을 부탁하며.
“만식 선배님. 여기 옆으로 좀 와 보실래요?”
“으응?”
“일단··· 투심부터 보여드릴게요. 그립은 이렇게···”
그러고 보니 꽤 오랜만에 마운드에 오른다. 지난 번 스프링캠프에서 165km/h를 던진 이후 두 번째다.
그때보다 몸이 더 가볍다. 체지방률을 살짝 올린 덕분에 몸이 오히려 유연해진 느낌이다.
내가 잡는 투심 그립을 한 번 보여준 나는 곧바로 투구 준비를 시작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투구폼이기에 역회전성 공을 던지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뭐, 몇 개 정도 던지는 건 상관없겠지.
제이콥과 연습한 대로, 루틴 하나까지 빼놓지 않고 그대로 따르며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부드럽다.
지난 번 캠프에서 던질 때보다 훨씬 더 폼이 자연스럽다. 완성도가 꽤 올라간 느낌이다.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80%쯤?
어쩌면 올 시즌이 지나기 전에 마운드에 서는 게 정말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슈웅
퍼억!
처음 던진 투심이 158km/h가 나왔다.
음, 살짝 힘을 빼고 던진 건데 꽤 쓸 만한데, 이거.
스무 살의 육체에 15년의 빅리그 노하우, 거기에 제이콥의 조율까지 더해지니 정말 장난이 아니다. 뭐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옆을 슬쩍 돌아보니 이만식 선배가 입을 딱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음.
저런 모습을 보니 그때 동경 어린 눈빛을 하고 내게 다가오던 그 마이너리그 애송이들에게 뭐라도 한 마디 던져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별 것 아닌 베테랑의 조언 한 마디가 그 녀석들에게는 꽤나 큰 힘이 되었을텐데.
“보셨죠? 선배님?”
“어, 어어··· 너 그런데 투심도 던질 줄 알았어? 그리고 투심이 158? 그, 그게 말이 돼?”
“일단 이거부터 보세요. 다음은 싱커. 그립은 이렇게···”
과거에 대한 후회는 짧을수록 좋다. 지금은 이만식 선배에게 집중할 때다.
이번에는 싱커.
투심을 던질 때보다 팔꿈치를 조금 더 비틀고 떨어지는 각에 신경을 쓰면서 타악.
슈웅
퍼억!
152km/h, 음. 이것도 아직 쓸 만하네. 꽤 오랜만에 던지는 건데.
“보셨죠? 구속은 좀 떨어지는데 아무래도 각은 이쪽이··· 선배님 투구폼이 거의 사이드암에 가깝다는 걸 감안하면 제 생각에는 싱커가 좀 더 나을 것 같네요. 물론 그 전에 팔꿈치 상태부터 체크해봐야겠지만요.”
“어, 어, 어···”
이만식 선배가 못 볼 걸 봤다는 질린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내가 158km/h짜리 투심을 던졌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달려온 이대준 감독과 투수코치가 몇 구만 더 던져 달라고 하길래 10구 정도를 더 던져줬다.
3루 쪽에 나란히 서 있던 우리 팀 투수들이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투수코치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챔피언, 혹시 다른 변화구도 가능한가?”
“일단은 여기까지요. 아직 폼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내 투구를 조금 더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힘을 조금 빼고 던지면 50개 정도는 충분히 던질 것 같지만, 사람 일이란 건 모르는 거니까.
“내, 내 싱커는 129km인데···”
“구속이 중요한 건 아니예요. 선배님.”
“암만 그래도···”
이만식 선배가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며 허무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길래 위로해주었다.
“수혁아, 한국시리즈만 가면 정말 투수로 뛸 수 있는 거지?”
“네, 감독님.”
“그럼 혹시 플레이오프는··· 그건 어려울까?”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 아하하, 고맙다. 그래. 수혁아. 네가 있어 진짜 다행이다.”
여기서 매몰차게 안 된다고 자르면 감독을 울린 선수가 될 것 같아서 그냥 노력해보겠다고 말해주었다.
“괴물 같은 놈···”
“시끄럽고 티 배팅 천 번. 어깨에 쓸데없는 힘이 다 빠질 때까지”
“······”
그리고 습관처럼 안치욱을 갈궈주고 천천히 그라운드 위에 서 있는 다른 선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플레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탄하고, 함께 기뻐해주는 이 순간이 너무나 좋다.
예전 나 하나만의 성공을 위해 야구를 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고양감이 차오른다.
벌써 15년 넘게 이 바닥에서 굴러왔지만 야구가 왜 팀플레이라 불리는지 이제야 깨닫게 된 내가 한심할 뿐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내 기분과 행복감을 깨트리는 일이 벌어지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나 조차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부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내 행복감을 깨트리는 일이 터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빈다.
* * *
퍽!
“넌 이 새끼야, 선배 말이 좆같이 들리지? 응?”
“아닙니다. 선배님.”
“개소리 까지 마. 표정에 써있잖아. 힘도 다 빠진 놈이 무슨 개지랄이냐고.”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퍼억!
훈련이 끝나고 모든 선수들과 코치들이 퇴근해 텅 빈 연습장.
얼굴에 독기가 잔뜩 오른 황성민이 장덕수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욕설을 내 뱉고 있다.
아무리 막 나가는 황성민이라 해도 지금은 쌍팔년도가 아닌 2027년이다.
다른 선수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못한다.
그가 장덕수에게 이렇게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건 순하디 순한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강이에 감춰진 피멍을 발견한다 해도 그냥 연습하다 그런 거라고 둘러댈 것을 알기에, 그의 입에서 절대 자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하는 짓이다.
“한수혁, 그 새끼가 자꾸 찾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거 같지, 나 쫓겨나고 나면 네가 주전포수가 될 것 같지? 어?”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선배님.”
“좆까! 이 새끼야! 이 팀 주전포수는 나야!”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황성민은 그냥 화가 날 뿐이다.
자신의 뒤를 봐주던 코치들과 프런트 직원들이 쫓겨나듯 팀을 나가고, 거기에 한진우와 송기태까지 트레이드되고 혼자가 되어 버린 것에 대해.
그리고 팀에 몇 남지 않은 후배들이 자신을 불쌍하다는 듯한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해.
그 화를 만만한 장덕수에게 풀어낼 뿐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너 조심해! 이 새끼야! 아우, 발가락 아파. 무슨 새끼가 몸만 쓸데없이 단단해가지고!”
“······”
그렇게 자기 화를 다 풀어낸 황성민이 발가락을 삐끗했는지 살짝 절룩이며 연습장을 빠져나갔다.
한 마디 변명도 없이 선배의 패악질을 온몸으로 받아낸 장덕수가 몸에 묻은 흙과 먼지, 그리고 황성민의 발자국을 툭툭 털어낸 후 천천히 연습장을 나왔다.
“이제 들어가요? 열심이네.”
“네, 고생하세요. 저번에 드린 털모자는 괜찮으시쥬?”
“아유, 아주 잘 맞아. 따뜻하고. 밤에 순찰 돌 때 그만한 게 없다니까, 정말 고마워.”
“그럼 들어갈게유.”
경기장 순찰을 돌던 관리인과 인사를 나눈 장덕수가 담담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많이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가끔씩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아직도 멀었구먼’
서울에서 살려면 표준말을 쓰라고 하셨다. 동네 어르신들의 당부를 되새기며 지하철 역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렇게 가끔씩 저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올 때면 예전의 일들이 드문드문 떠오르곤 한다.
고향인 충남 서산 작은 시골마을에서 동네 장사로 불리던, 중학교 때 인근 고등학교 일진들을 모두 쓸어버렸던 그때 그 시절이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