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80)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79화(280/412)
#279. 리드오프의 책임
얼마 전 발표된 2030년 메이저리그 올스타 1차 투표 중간 집계 결과.
올스타전에서라도 제발 어깨를 쉬게 하라는 구단의 부탁에 따라 한수혁은 투수가 아닌 3루수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투타 모든 면에서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한수혁에게 포지션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양 리그, 전 포지션을 통틀어 압도적인 1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수혁은 2차 투표 없이 곧바로 올스타전 직행이 유력한 상태였다.
하지만 시애틀 팬들 중 일부는 이번 투표 결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 젠장, 2위와 고작 3배밖에 차이가 안 난다고?
└ 이건 조작이 분명해. 제임스 테일러 그 자식이 한 게 뭐 있다고? 금발에 잘생긴 백인이라서?
└ 이 나라에 아직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득실거린다는 증거야
└ 혹시 자이언츠 저 개자식들이 다른 놈들에게 표를 몰아준 건 아닐까?
└ 왜?
└ 약쟁이의 홈런 기록에 도전하는 게 싫어서?
└ 맙소사,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군
한수혁이 등장하기 전 메이저리그 차세대 간판타자라 불렸던 템파베이 레이스의 3루수 제임스 테일러.
올 시즌에도 3/4/5의 슬래시 라인에 19개의 홈런, 25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여전한 기량을 뽐내고 있지만 한수혁의 기록과 비교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게 사실이었다.
심지어 선수 본인조차 인터뷰에서 이번 올스타전 3루수는 한수혁이 되어야 한다고, 자신에게는 자격이 없다고 말한 상황.
그럼에도 그와 한수혁 간의 득표 차가 세 배밖에 나지 않는 데 시애틀 팬들은 분노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 이런 사태를 낳았다.
“우우우! 어디서 약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개자식들의 소굴에 온 게 실감이 나!”
“자랑할 거라고는 그 홈런 기록밖에 없는 멍청이들!”
같은 서부 라인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비행기로 2시간, 차로 14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달려온 시애틀 원정 팬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대다수의 자이언츠 팬들.
“저 빌어먹을 자식들, 너희는 야구장을 나가자마자 죽게 될 거다!”
“고작 아시아인에게 모든 걸 건 시애틀 멍청이들아! 너희는 파멸하게 될 거야!”
4만 명이 들어찬 오라클 파크, 대략 천 명 정도 되어 보이는 매리너스 원정 팬들이 주변을 가득 메운 자이언츠 팬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만 건드려도 팍 터져버릴 것 같은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어떤 싸움이든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한수혁의 입단으로 반강제로 1번 타자에 서게 된 것에 불만을 가졌던 데릭 플레밍은 이제 그 누구보다 열렬한 한수혁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리고 리드오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타석에 들어선 데릭 플레밍이 자이언츠 포수를 도발했다.
“이봐, 설마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뭘?”
“한수혁 대신 제임스 테일러가 올스타전 3루수로 나가야 한다고 말이야.”
“남의 팀 선수를 왜 우리한테 물어, 이 개자식아.”
“그야 그 남의 팀 선수에게 표를 몰아준 게 너희들이니까?”
“Fuck you.”
자이언츠 포수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자 데릭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닫았다.
가장 좋은 건 투수를 도발하는 거지만, 그게 어렵다면 이렇게 포수를 도발하는 것도 괜찮다.
포수가 흔들리면 투수가 함께 흔들린다.
그것이 이번 시즌 데릭이 리드오프로 나서며 배운 첫 번째 교훈이었다.
슈웅
파앙
“볼.”
초구부터 곧바로 효과가 나왔다.
머리를 노렸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하지만 스트라이크존과는 턱없이 먼 몸 쪽 높은 공.
상체를 슬쩍 뒤로 흘려보낸 데릭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히려면 제대로 맞히지 그랬어. 아, 혹시 벤클이 일어날까 봐 겁먹은 건가?”
“닥쳐, 개자식아.”
“워워, 진정하라고. 입만 열면 욕인 거 보니 흥분했나 보네. 어쨌든 이해해. 나 같아도 한수혁 저 친구와 한판 붙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냥 도망가 버릴 거 같거든. 너희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Fuck you.”
포수의 입에서 또다시 욕설이 튀어 나오자 데릭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LA다저스의 티건 버크헤드, 시카고 컵스의 션 터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데스몬드 킹, 그리고 가장 최근 뉴욕 양키스의 타이슨 바샴까지.
올 시즌 한수혁과 싸움이 붙었다가 박살이 난 선수들의 명단이다.
재미있는 건 저 명단에 있는 선수들이 직전 해까지 메이저리그에서 소문난 싸움꾼이었다는 거다. 다른 팀 선수들이 슬슬 피해 다니던 진짜 싸움꾼.
그런 녀석들이 한수혁에게 모두 개박살이 났으니 나머지 선수들이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수혁 등장 이전 메이저리그 최고의 싸움꾼이라 불렸던 선수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을 주름잡던 알버트 벨이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을 때 알버트 벨 근처로 가지 마라, 그러다 선수 생명이 끝장날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들은 한수혁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수혁이 속한 팀과 벤치 클리어링을 벌이지 마라. 병원 응급실에서 눈을 뜨게 될 수도 있다.
슈웅
파앙
“볼.”
이번에도 몸 쪽으로 바싹 붙은 공.
공을 잡은 포수가 콧김을 마구 뿜어댄다.
자신의 도발에 배터리 전체가 흔들거릴 때 리드오프는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작은 균열은 자신뿐만 아니라 뒤에 등장하는 타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특히나 데릭의 뒤에는 한수혁이 버티고 있다.
리그 최고의 타자 한수혁 말이다.
슈웅
파앙
“볼.”
“젠장!”
이제 막 경기를 시작했건만, 지친 표정을 한 투수가 욕설을 내뱉으며 마운드를 걷어찼다.
데릭의 도발, 그리고 한수혁의 우산 효과가 가져온 복합적인 결과물이다.
순간 자신이 마운드에 서 있는 상상을 해본 데릭이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젠장, 끔찍하군. 흐흐.”
“뭐라는 거야?”
“이번에는 너한테 한 말 아니니까 안심하고 야구나 하자고. 뒤에서 저 친구가 기다리고 있잖아.”
“…….”
볼 카운트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 상황.
일반적인 리드오프라면 여기서 공 하나 정도 더 기다리는 게 맞겠지만…….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지.’
올 시즌 한수혁을 뒤에 두고 80경기 이상을 뛴 데릭은 알고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투수는 절대 한수혁 앞에 주자를 내보내려 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렇기에 노린다.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카운트를 잡기 위해 들어오는 공.
비록 한수혁에게는 못 미치지만 그 역시 지난 시즌까지 시애틀의 중심에 섰던 타자다.
드드득
그런 데릭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투수의 손끝에서 밋밋한 한가운데 포심이 날아 들었다.
따아아악!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오라클 파크 우측 담장을 향해 날아갔다.
“우아아아아!”
“젠장, 데릭! 완벽해! 달려! 달리라고!”
강하게 날아가던 타구가 맥코비 만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밀려 조금씩 힘을 잃었다.
홈런이 되긴 어려울 거라 판단한 데릭이 이를 악물고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1루를 돌아 2루로,
그 사이 우중간 펜스 최상단에 맞고 떨어진 타구가 우익수가 기다리던 반대 방향으로 떨어졌고, 2루를 돈 데릭이 다시 3루를 향해 달려 나갔다.
뒤늦게 공을 주워든 우익수가 전력을 다해 공을 뿌렸지만.
“흐아압!”
“세이프!”
간발의 차로 세이프.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3루타를 만들어낸 데릭이 한수혁을 향해 소리쳤다.
“한, 네가 최고라는 걸 보여줘!”
* * *
탱킹을 끝내고 전력을 재정비 중인 자이언츠에는 두 명의 포수가 있다.
팀에서는 그 둘 중 누구를 주전으로 밀어줄지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상황에 따라, 선발 투수에 따라 두 명의 포수가 번갈아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하필이면 다른 포수 하나가 손가락 부상을 당하며 이번 시애틀과의 3연전은 케빈 존슨이 독차지하게 되었다.
평소 같으면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주전 자리를 다투는 라이벌이 알아서 부상을 당해줬으니 얼마나 반길 일인가?
하지만 케빈 존슨은 이 상황을 반길 수 없는 입장이었다.
‘주여, 왜 하필 이 끔찍한 놈들하고 경기할 때 이런 시련을!’
사실대로 말하자면 케빈 존슨은 자이언츠의 팬은 아니었다.
그냥 이 팀의 지명을 받았고, 마이너에서 데굴데굴 구르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된 것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배리 본즈에 대해서도 별다른 생각이 없다.
그가 약물을 했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때문에 한수혁이 홈런 기록을 깨든 말든 그것 역시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시애틀 팬들이었다.
두 팀 간의 인터리그 일정이 잡힌 후 매일 자신을 비롯한 자이언츠 선수들의 SNS를 폭격 중인 골수 시애틀 팬들.
숫자를 세기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악플에 시달린 그들은 한수혁에 대해 엄청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2번 타자 서드베이스맨 한수혁]선두 타자가 3루타로 출루하고, 그가 타석에 들어섰다.
자신들을 잠 못 이루게 만든 최악의 야구 선수이자 그라운드의 깡패.
“꿀꺽.”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케빈 존슨이 흘끗 한수혁을 올려다보았다.
동양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아니, 야구선수라기보다는 차라리 보디빌더가 어울릴 듯한 완벽한 근육질의 거한.
헬멧 뒤로 살짝 삐져나온 뒷머리, 거기에 거뭇거뭇하게 자라 있는 턱수염.
마주치기만 해도 오줌이 나올 것 같은 번뜩이는 눈빛.
‘Holy shit…….’
다시 한 번 침을 꿀꺽 삼킨 포수가 투수를 향해 사인을 보냈다.
먼저 몸 쪽 낮은 포심.
도리도리
그럼 몸 쪽 높은 체인지업.
도리도리
그도 아니면 바깥쪽 높은 곳에서 역회전하는 공.
도리도리도리
마지막으로 바깥쪽 낮은 곳으로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
도리도리도리도리
‘이런 미친, 그럼 대체 뭘 던지겠다는 거야!’
순간 타임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이제 고작 1회라는 걸 떠올리며 억지로 참아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글러브를 완전히 존 밖으로 빼보았다.
‘여기로 던지자고?’
끄덕끄덕끄덕
‘볼넷으로 거르자고?’
끄덕끄덕끄덕끄덕
그제야 투수의 뜻을 이해한 포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걸러 보내고 싶다.
하지만,
‘다음 타자가 타이 존슨이라고, 이 바보 같은 놈아.’
투수의 뜻을 따르자니 자칫하면 1회부터 대량실점을 하고 경기가 터져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냥 승부를 걸자니, 투수의 안색이 마음에 걸린다.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한 포수가 덕아웃으로 시선을 돌렸다.
꿀꺽
코치에게서 승부를 하라는 사인이 내려왔다.
순간 투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바깥쪽 낮은 싱커.’
끄… 으… 덕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을 한 투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투수의 손에서 공이 발사되었다.
“좋… 커헉!”
사인대로 날아오는 공에 포수가 환호성을 터뜨리려던 찰나.
따아아아아악!
바깥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한수혁이 강하게 밀어쳤다.
방금 전 데릭이 때려낸 타구와 거의 비슷한 코스로 날아가는 공.
하지만,
“간다! 간다! 간다아아!”
“좋아! 조금만 더!”
해풍에 굴복해 담장을 넘기지 못했던 데릭의 타구와 달리, 한수혁이 때려낸 공은 그 해풍을 뚫고 계속 날아갔다.
멀리, 아주 멀리,
그리고,
풍덩
“우아아아아아아아!”
“퍼킹! 그레이트! 바로 이거지!”
그렇게 날아간 타구가 야구장 외벽을 넘어 맥코비 만에 빠지는 순간 시애틀 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함성이, 자이언츠 팬들이 모인 곳에서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저 빌어먹을 놈에게 스플래시 히트를 처 맞았다고?”
“이런 머저리 같은 자식들! 차라리 팀을 해체해!”
“시애틀 이 개자식들아! 너희 동네로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