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8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80화(281/412)
#280. 미꾸라지 무리 속 범고래
배리 본즈가 미친 듯이 홈런을 때려낸 덕에 타자 친화적인 구장이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오라클 파크는 엄연히 투수 친화 구장으로 분류되는 곳이다.
좌측에 비해 짧은 우측 펜스까지의 거리를 보강하기 위해 펜스 높이를 7.3미터까지 높인 데다 바닷가에 바로 인접한 탓에 일 년 내내 해풍이 불어오기 때문이다.
2004년 배리 본즈가 45개의 홈런을 때려낸 이후 지금까지 약 26년간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40개 이상의 홈런을 친 타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이 구장에 대한 모든 걸 설명한다.
물론 자이언츠 스카우터들의 무능함도 함께.
“우우우!”
“저 자식을 죽여! 죽여 버리라고!”
“한 번만 더 그런 홈런을 맞으면 가만 안 둘 거다! 이 개자식아!”
그렇기에 지금 자이언츠 팬들의 야유는 한수혁이 아닌, 26년간 제대로 된 홈런타자를 만들어내지 못한 자신들의 구단에게 향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1회 초 한수혁의 투런 홈런과 척 클락의 적시타 등으로 3점을 선취한 시애틀은 2회 초, 9번 타자로 출전한 2루수 리암 랜드먼의 홈런으로 또 한 점을 추가, 4 대 0으로 앞서 나갔다.
마이애미 말린스에서 트레이드되어 온 3인방 중 하나인 리암 랜드먼은 기존 2루수인 조나단 오웬스를 밀어내고 주전 자리를 확보하는 중이었다.
매년 골드글러브 후보에 들 정도로 수비력 하나는 최고인 조나단이지만, 시즌 타율이 2할 초반까지 떨어지며 감독의 신뢰를 잃은 탓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
메이저리그란 본래 그런 곳이니까.
[2번 타자 서드베이스맨 한수혁]9번 타자의 홈런에 이어 1번 데릭 플레밍이 또 한 번 볼넷으로 출루했다.
그리고 내 두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투수가 완전히 얼어버린 거 같은데.”
“…….”
“좋아, 항의하지 않을 테니 마운드로 올라가 봐. 난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닥쳐.”
“흠, 사람의 호의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넌 개자식임에 분명해.”
“…미친 애송이.”
“그래, 거기서 한 마디만 더하면 그 애송이에게 박살 나게 될 거다.”
“…….”
나와 말을 섞어봐야 손해라는 걸 깨달았는지 자이언츠 포수의 입이 굳게 닫혀버렸다.
1회 초 장외홈런은 내가 생각해도 정말 제대로 맞은 타구였다.
높디높은 담장과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뚫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예전 TV에서 본 광경이 떠올랐다.
배리 본즈의 홈런볼을 잡기 위해 맥코비 만에 배를 띄웠던 몇몇 미친 팬들 말이다.
하긴, 미친 것만 생각하면 차를 열 시간 넘게 몰아 여기까지 찾아온 저 시애틀 팬들도 빼놓을 수 없겠지.
야구가 대체 뭐길래 이렇게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걸까?
“플레이!”
피치 클락이 도입된 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KBO에서처럼 투수가 하염없이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거다.
한국에서는 내게 거대한 홈런을 맞은 투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공 던지기를 거부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주자가 없는 경우 15초, 있는 경우에는 20초 안에 어떻게든 공을 던져야 한다.
내 야구의 첫 번째 모토는 신속, 그리고 정확이다.
얼핏 들으면 음식 배달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절대 그런 게 아니다.
늘어지기 쉬운 야구 경기를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애매모호한 상황이 나오지 않도록 삼진과 홈런으로 깔끔하게,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야구다.
슈웅
파앙
“볼.”
나도 투수이기에 알고 있다.
경기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넉 점이나 내준 상황, 1루에는 발 빠른 주자가 나가 있고, 타석에는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가 들어서 있다면?
투수로서는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큰 것 한 방이면 곧바로 강판이 확정인 상황에서 투수가 던질 공은 딱 한 가지뿐이다.
병살타를 유도할 수 있는 떨어지는 공.
저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떨어지는 공은?
스플리터.
그렇기에 노린다.
좌측 발을 안쪽으로 닫아 바깥쪽 공에 대비하고, 낮은 공에 대응할 수 있도록 그립의 위치를 조절하고,
포심보다 반 박자 늦게 스윙을 시작,
슈웅
바로 지금,
따아아악!
“좋아! 달려! 데릭!”
“망할 자이언츠 놈들아! 지금도 늦지 않았어! 홈페이지로 들어가! 새로 투표를 하라고!”
“올스타전 3루수는 누구? 역대 최고 3루수는 누구? 말해봐! 말해보라고!”
발사각이 낮았기에 홈런이 되진 못했다.
하지만 기형적으로 생긴 우측 펜스에 맞은 타구가 이상한 방향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버렸다.
“고! 고! 고!”
1루 주자 데릭은 이미 3루를 돌아 홈으로 대시하고 있는 상황,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한다.
1루를 돌아 2루로, 멀리 3루 베이스 코치에게서 멈추라는 사인이 내려왔다.
상관없다. 이 구장에서 한두 번 뛴 것도 아니고, 방금 전 그 타구라면 충분히 3루까지 갈 수 있다.
“우아아아아!”
“빌어먹을, 던져! 3루로 던지라고!”
자이언츠 우익수가 3루를 향해 전력으로 공을 뿌리고, 그와 동시에 내 손이 3루 베이스를 향해 힘차게 뻗어나갔다.
촤아악
“세이프! 세이프!”
“됐다! 완벽해! 젠장, 한수혁! 네가 최고야!”
“올스타전은 걱정하지 마! 우리가 널 그곳으로 보내줄 테니까!”
스코어 5 대 0, 투수의 고개가 땅으로 툭 떨어지고 자이언츠의 투수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 * *
한수혁에 대해 잘 모르는 미국 야구팬들 중에는 단순히 그의 덩치만 보고 발이 느릴 거라는 편견을 갖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한수혁은 KBO 시절 마음만 먹으면 도루 신기록 도전도 가능하다 평가받던 유격수 출신이다.
한수혁의 3루타와 타이 존슨의 희생플라이로 6 대 0으로 앞서 나가던 시애틀은 2회말, 선발 디몬 앤더슨 주니어가 상대 7번 타자에게 석 점 홈런을 허용하며 6 대 3으로 쫓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3회초 공격, 지난 이닝 실책을 기록하며 석 점 홈런의 빌미를 제공했던 시애틀 유격수 조쉬 올리버가 무리한 베이스러닝을 하다 그만 발목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타임!”
타임이 요청되고 부상당한 그를 대신해 조나단 오웬스가 대주자로 나섰다.
본래 2루와 3루 요원인 그가 대주자로 기용된 것에 대해 몇몇 시애틀 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이닝, 그들은 왜 조나단이 대주자로 기용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포지션 변경 대주자 조나단 오웬스 ▶ 3루수 / 3루수 한수혁 ▶ 유격수]대주자로 들어왔던 조나단 오웬스가 3루로 이동하고, 대신 한수혁이 3루에서 유격수로 자리를 옮겼다.
“젠장, 맞아. 저 친구, 원래 한국에서는 유격수였다고 했어.”
“응? 저 덩치로?”
“그때는 지금보다 50파운드 정도 덜 나갔으니까, 어쨌든 그는 한국에서 최고의 유격수였다고. 그냥 최고도 아니고 역대 최고라 불리던.”
“그래? 어쨌든 좋아. 자이언츠 개자식들을 박살 내버릴 수 있다면 그게 뭐든 상관없겠지.”
한수혁이 빅리그 데뷔 이후 처음으로 유격수로 뛰게 되었다.
시즌이 중반으로 접어들며 다니엘 감독은 한수혁의 멀티 포지션에 대한 시험을 시작했다.
체력 회복이 필요할 때는 지명타자나 좌익수로, 그리고 지금처럼 팀이 필요로 할 때는 유격수로.
3점 차로 쫓기는 상황, 거기에 주전 유격수가 부상으로 빠진 지금이야말로 한수혁의 유격수 수비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는 감독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따악!
“아앗! 안… 어엉?”
“좋았어! 멋져! 젠장, 우리 3루수가 사실은 최고의 유격수였다니!”
“저건 조쉬가 있었어도 잡기 힘들었을 거야!”
3회말, 자이언츠의 선두타자가 때려낸 강한 타구가 2루 베이스 위를 타고 외야로 빠져나가려던 순간,
척
어디선가 나타난 한수혁이 그 공을 낚아채 1루로 강하게 송구했다.
눈앞에서 안타를 도둑맞은 타자가 허탈한 듯 허공을 바라보았고, 위기를 맞을 뻔했던 디몬 앤더슨 주니어가 글러브를 낀 채 물개박수를 쳤다.
따아악!
한수혁의 호수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3루수의 글러브를 피해 외야로 빠져 나가는 강한 타구.
몸을 던져 그 공을 건져낸 한수혁이 1루를 향해 강하게 송구를 뿌렸다.
파아앙!
“아웃!”
“101마일! 송구가 101마일이라고?”
“빌어먹을! 투수가 유격수를 보는 건 반칙이야! 반칙이라고!”
벌써 두 개째 안타를 잃어버린 자이언츠 팬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야유를 쏟아부었다.
그들은 알게 되었다.
자신들의 영웅이 세운 홈런 기록, 그것에 도전 중인 저 아시아 선수가 생각보다 더한 괴물이라는 걸, 그리고 어쩌면 올 시즌이 자이언츠가 홈런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마지막 시즌이 될 수도 있다는 걸.
* * *
– 정말 대단합니다! 4회초 세 번째 타석에서 2루타를 쳐낸 한수혁 선수가 빅리그 데뷔 이후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 네, 더욱 대단한 건 첫 번째 타석 장외홈런뿐만 아니라 두 번째, 그리고 방금 세 번째 타석에서의 타구 역시 넘어가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그런 공이었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오라클 파크의 우측 펜스가 높긴 높네요.
– 세 번 모두 오른쪽으로 타구가 향한 것도 재미있네요.
– 그럴 수밖에 없죠. 오늘 시애틀의 리드오프인 데릭 선수도 세 번 모두 출루했거든요? 투수 입장에서는 죽어라 바깥쪽 유인구를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걸 눈치챈 한수혁 선수가 잘 받아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타격도 타격이지만… 오랜만에 한수혁 선수 유격수 수비를 보니, 이야… 감탄이 절로 나오네요. 뭐랄까,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랄까요? 정말 놀라운 건 한국에 있을 때보다 20㎏ 가까이 체중이 늘었는데 전혀 둔하다는 느낌이 없네요?
– 네, 기본적으로 신체 능력 자체가 탈아시아급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경기 예측 능력이거든요. 예전부터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한수혁 선수만큼 야구를 잘 알고 하는 선수는 없을 거예요. 투수의 손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타구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선수거든요.
– 무시무시한 얘기군요.
– 근데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그런 한수혁 선수에게 체격이 좀 커진 것 정도는 아무 걸림돌도 안 된다, 뭐 그런 겁니다. 다만 체중이 늘면 아무래도 무릎과 발목에 부하가 걸릴 수 있으니 유격수로 자주 나오지는 않겠지만요.
– 하지만 가을 야구 같은 큰 경기에서 한수혁 선수가 유격수로 출장할 수 있다는 건 상대팀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겠군요.
– 맞습니다. 보통 수비가 최우선되는 자리에 리그 최강의 타자가 들어설 수 있다면 라인업을 짜는 감독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거거든요. 아무튼 이렇게 되면 시애틀의 다른 선수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수혁 선수로 인해 자기 자리가 흔들릴 수도 있거든요.
– 메기 효과군요. 미꾸라지들이 있는 곳에 메기를 풀어 생기를 얻게 한다는.
– 맞습니다. 저 정도면 메기가 아니라 상어, 아니, 범고래 정도는 되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런 거죠.
– 알겠습니다. 말씀드리는 사이 자이언츠의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오면서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럼 광고 본 후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은 시애틀 매리너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간의 경기가 진행 중인 오라클 파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