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8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83화(284/412)
#283. 또 다른 모습
“성오야, 대타 들어갈 준비해라.”
“네, 감독님.”
서울 워리어스와 부산 타이탄스 간의 시즌 9차전이 열리고 있는 잠실야구장.
이대준 감독의 지시에 조성오가 벤치에서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따아악!
“됐다! 드디어 나갔다!”
“그런데 다음이 서형주야.”
“아… 쟤 요즘에 힘든데.”
“대타를 내! 대타를 내라고!”
8회 말까지 지루한 0의 행렬이 계속되는 가운데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9번 최민석이 2루타를 치고 나갔다.
하지만 대기타석에 선 서형주의 표정에는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타격 슬럼프로 최근 7경기 타율이 1할 초반대에 불과한 상황.
서형주의 얼굴에서 자신감을 찾지 못한 이대준 감독이 결국 타임을 요청했다.
“타임! 대타 조성오!”
결국 타자가 교체되었다.
고개를 푹 떨군 서형주가 벤치로 들어오고 대신 이 팀의 주장 조성오가 타석을 향해 걸어 나갔다.
“형주야, 고생했다. 들어가서 쉬어.”
“…네, 주장.”
지난 시즌까지 이 팀의 중심타선에 섰던 조성오는 이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준 채 지명타자와 대타로 팀에 공헌하고 있었다.
안치욱의 수비 문제가 해결되며 자연스럽게 3루가 채워지고, 이제 슬슬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민주현이 대신 1루로 들어오고,
한수혁이 회귀한 후 4번째 시즌을 맞은 워리어스는 그렇게 하나씩 세대 교체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플레이!”
타석에 들어선 조성오가 신중한 표정으로 투수를 노려보았다.
후배 서형주의 부진이 마음에 걸린다.
저 녀석이 왜 저러는지 대충 알 것 같다.
한수혁.
그가 떠난 지 벌써 반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몇몇 워리어스 선수들은 한수혁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저 녀석,
한수혁의 동기이자 그를 인생의 라이벌로 여기는 친구 서형주.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친구이자 라이벌이 전반기 만에 40개가 넘는 홈런을 쳐내자 서형주의 스윙도 덩달아 커졌고, 그것이 타격 슬럼프로 이어진 것이다.
향상심을 가진 선수에게 그것을 덜어내라 조언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조성오를 비롯한 여러 선배들은 별 말 없이 서형주를 지켜보고 있다.
그가 이번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길 바라며.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서형주에 대한 문제는 일단 나중에,
지금은 2루에 나가 있는 주자를 불러들이는 데 집중할 때다.
다음 타자인 유인철의 타격감을 생각하면 여기서 볼넷이 나올 확률은 없다고 봐야 한다.
승부를 걸어올 것이다.
그렇다면 때린다.
슈웅
파앙
“볼.”
이제는 마흔이 가까워진 나이,
확연하게 느려진 배트 스피드, 예전 같지 않은 손목 힘,
하지만 조성오에게는 수많은 위기 속에서 팀을 구해낸 경험이 있다.
그렇기에 이대준 감독의 선택은 조성오였고, 그는 그 믿음에 보답했다.
따아아악!
“와아아아아아!”
“됐다! 달려! 최민석! 달리라고!”
1-2루 간을 꿰뚫는 깨끗한 우전 안타에 최민석이 홈으로 들어왔다.
팀의 첫 번째 득점을 만들어낸 조성오가 1루 베이스 위에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벌써 20년 가까이 이 팀을 지켜온 주장이자 결정적인 순간 타점을 올린 타자를 향해 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조성오는 생각했다.
아직은 은퇴할 때가 아니라고,
한수혁이 돌아오는 날까지 어떻게든 이 팀을 지켜낼 거라고.
* * *
에이스의 가장 큰 역할은 연승을 잇고, 연패를 끊는 것이다.
한수혁의 대활약으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2연승을 거둔 시애틀 매리너스.
하지만 3차전에서 믿었던 1선발 라이언 티보우가 난타를 당하며 3연승에 실패했다.
포심의 위력이 평소 같지 않았고, 낮게 던진 공이 자꾸 중앙으로 몰리며 큰 것을 허용했다.
그날 라이언의 부진에 대해 시애틀 코칭스태프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한수혁에 대한 동경, 견제, 그리고 라이벌 의식이 빚어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최고 107마일에 달하는 패스트볼, 거기에 타자들 사이에서 마구라 불리는 하드싱커, 그런 공들을 존 구석구석으로 찔러 넣을 수 있는 제구력까지.
지켜보는 팬들이나 코치들 입장에서는 그저 경외의 대상이지만, 그와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투수들의 입장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가 던지는 엄청난 공들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된다.
그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던지고 싶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한수혁은 함부로 따라 해서는 안 될 선수이다.
“라이언이 절 의식하는 거 같다고요?”
“그래, 챔피언.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자네라면 혹시 좋은 생각이 있을까 해서.”
“흠.”
자이언츠와의 3연전을 끝낸 시애틀은 다시 해안선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해 샌디에이고에 도착했다.
흥행을 위해 시애틀과 억지 지역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팀.
메이저리그 30개 팀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이 시애틀이라면 샌디에이고는 가장 남쪽에 위치한, 멕시코와 거의 근접한 도시이다.
인구수도 많고, 경제력도 넉넉하고,
문제가 있다면 구단주의 투자 의지가 상당히 빈약하다는 건데, 어쨌든 그런 샌디에이고를 상대로 한 인터리그 지역라이벌전 4연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첫 번째 경기 선발은 한수혁이었다.
“감독님.”
“음?”
“오늘 라이언 그 녀석, 다른 짓 못 하고 경기만 지켜볼 수 있게 벤치에 묶어두시죠.”
“벤치에?”
“네, 공만 빠르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요.”
* * *
굳이 감독이 억지로 벤치에 앉혀 놓을 필요도 없었다.
선발 등판을 마친 다음 날이기에 숙소로 돌아가 쉬어도 될 상황, 하지만 라이언은 벤치에 엉덩이를 붙인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제길…….’
손가락에 불편을 느낀 타이 존슨이 빠지고, 대신 안토니오 가르시아가 1루에 들어가며 공격력이 약화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타이 존슨이 빠지자 샌디에이고 투수들은 한수혁에게 볼넷을 남발했다.
그럼에도 한수혁은 단 한 번 찾아온 타격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4타석 3볼넷 1타수 1안타 2타점.
하지만 지금 라이언이 보고 있는 건 타자 한수혁이 아니었다.
오늘 8회까지 단 90개의 공을 던지며 1실점만을 기록한 투수 한수혁을 보고 있었다.
그가 완봉이나 완투를 하는 게 놀랍다는 게 아니다.
한수혁은 올 시즌에만 두 번의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심지어 단 한 점만 실점을 해도 평균자책점이 오르는, 기적 같은 성적을 기록 중인 투수이니까.
라이언이 놀란 건 오늘 한수혁이 보여준 투구 내용이다.
평소 한수혁은 최고 107마일에 달하는 포심과 105마일 하드싱커로 타자를 윽박지르며 삼진을 양산하는 파워피처의 교본과도 같은 투수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오늘 그가 던진 포심의 최고 구속은 고작 100마일.
고작이라는 말이 안 어울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평소 구속보다는 확연히 느린 포심.
거기에 하드 싱커를 대신해 승부구로 사용된 체인업과 스플리터까지.
라이언은 그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저건 나잖아?’
그랬다. 오늘 한수혁은 라이언 자신과 거의 흡사한 투구 패턴을 보여주고 있었다.
포심으로 타자의 눈을 현혹시키고, 결정적인 순간 체인지업을 던져 배트를 끄집어내고,
그런 한수혁의 투구에 샌디에이고 타자들의 배트가 허공에서 춤을 췄다.
7회말 1실점 역시 1루수가 토니가 아닌 타이 존슨이었다면 주지 않아도 될 점수였다.
쉽게 말해 오늘 한수혁은 어깨에 힘을 뺀 상태에서 평소와 다른 볼 배합으로 샌디에이고 타자들을 꽁꽁 묶어놓았던 것이다.
“플레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치에게 물어보았다.
한수혁의 어깨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냐고.
물론 아니었다. 오늘 경기 전 불펜 투구에서는 107마일을 뻥뻥 던져댔으니까.
‘다른 식으로도 던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건가.’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
이런 식으로도 던질 수 있다는 걸 다른 팀에게 보여주려는 의도.
상대가 수집한 기존 데이터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이유가 뭐든 오늘 한수혁의 변신은 라이언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자신과 거의 흡사한 구종과 구속을 가지고 상대를 자유자재로 농락하는 한수혁의 투구.
사실 라이언에게는 롤모델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성으로 사용하던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강속구 투수.
린 놀란 라이언 주니어.
1966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27년을 현역으로 뛰며 통산 5,714개의 삼진을 잡아낸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파워 피처.
은퇴하기 직전까지, 그러니까 46살이 되던 해까지 100마일에 가까운 공을 뿌렸던 그는 라이언 티보우의 우상이자 정신적 스승이었다.
그렇기에 라이언 티보우의 최우선 목표는 강속구 투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 어떤 공보다 포심에 정성과 애착을 쏟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를 일궈냈다.
비록 자신의 우상만큼은 아니지만 100마일을 넘나드는 포심과 체인지업, 스플리터를 구사하는 파워피처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시애틀의 에이스이자 주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하지만 한수혁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자신에게는 거의 한계에 가까운 100마일을 넘어 107마일을 던지는 괴물.
단순히 공만 빠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종을 원하는 곳에 꽂아 넣을 수 있는 괴수.
그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그의 그림자를 쫓아가게 된다.
그런데,
슈웅
따악!
“아웃!”
오늘 라이언은 그 그림자의 전혀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딸깍
태블릿을 집어 들고 방금 전 한수혁의 투구 장면을 돌려보았다.
존에서 반 개 정도 벗어난 포심으로 타자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반대쪽 낮은 코스로 들어가는 체인지업으로 범타를 유도하는 한수혁.
그걸 본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자신이 중요한 걸 잊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우상인 놀란 라이언, 현 시대 최고의 투수라 생각하는 한수혁, 그리고 자신.
이 셋은 모두 다른 투수다. 따라 할 수도 없고, 따라 해서도 안 되는 각자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가진 생명체다.
‘내가 바보 같았군.’
오늘 라이언이 배운 건 한수혁이 던진 구종, 코스, 타자와의 머리싸움 같은 게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근원적인 것,
투수란 무엇인가? 투수는 어떻게 던져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었다.
라이언의 시선이 한수혁에게로 향했다.
슈웅
따악!
“아웃!”
또다시 공 하나로 타자를 잡아낸 한수혁이 덕아웃을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은 대체 뭘까?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린, 경험도 부족한 놈이 대체 어디서 저런 걸 배운 걸까?
궁금증은 금세 사라지고 대신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그것은 지금까지 라이언이 갖고 있던 부러움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한수혁의 뒤를 따르고 싶다는, 그에게서 야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
그렇게 라이언은 조금 더 나은 투수가 되기 위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 * *
[시애틀 매리너스 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간 1차전, 시애틀의 2 대 1 한 점 차 짜릿한 승리로 끝나] [2타점 결승타, 9이닝 1실점 완투로 팀의 승리를 견인한 한수혁 “재미있는 경기였다. 구속을 줄여서 던진 이유? 글쎄, 그냥 한번 그렇게 해보고 싶어서?”] [경기를 지켜본 A모 팀 전력분석원 “투수 한수혁에 대한 데이터를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경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선수다.”] [시애틀 매리너스 주장 라이언 티보우 “오늘 한수혁의 투구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한수혁은 내가 본 가장 멋진 투수다. 앞으로 그에게 많은 걸 배우고 싶다.”] [포심, 투심, 스플리터, 커터, 하드싱커,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 거기에 심지어 너클볼까지, 현존하는 거의 모든 구종을 던질 수 있는 한수혁, 빅리그 전문가들, 한수혁의 모교에 관심 집중 “그곳에 명코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구종의 다양성에 대한 질문에 한수혁 “유튜브를 참고해 독학했다. 몇 번 던져보니 대충 감이 오더라.”]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