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9)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8화(29/412)
#28. 2027 정규시즌 개막전
‘그만! 그만!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네 친구들 안 건드릴게’
‘늦었어’
쩌어억!
중학교 교복을 입은 거구의 사내 아이가 앞에 선 상대의 싸대기를 후려 갈겼다.
팔뚝에 문신을 한 양아치가 그 솥뚜껑 같은 손바닥에 얻어맞고 그 자리에서 혼절해버렸다.
그놈이 마지막이었다.
충남 일대 최악의 일진이라 불리던 놈이 중학생의 싸대기 한 방에 쓰러지자 손에 커터 칼 같은 걸 들고 있던 나머지 찌끄레기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덕수야, 괜찮아?’
‘괜찮여’
‘머리에 피나는데?’
‘이런 건 침 바르면 나아. 걱정 말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이제 중학교 2학년에 불과한 아이가 본의 아니게 충남 서산 일대 고등학교 일진들을 싹 다 정리해 버리고 말았다.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벌써 키가 188cm, 몸무게가 100kg에 달하며 장사 소리를 듣던 장덕수다.
유일한 보호자인 할머니는 손주가 행여 어둠의 길로 빠지지 않을까 그를 엄하게 가르쳤고, 장덕수 역시 자신의 힘이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이 화를 내거나 누구를 때리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단하게 매어 두었던 그 고삐가 일순간에 풀려버렸다.
부모님 대신 그를 키워주던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셨다.
장덕수의 기분이 최악으로 떨어져 있던 그때, 평소 그를 형형하고 따르던 후배가 고등학교 일진들에게 돈을 뺏기는 걸 목격했다.
놈들의 싸대기를 한 방씩 날려주고 빼앗긴 돈을 되찾아주었다.
그랬더니 놈들이 다른 일진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마저 박살을 내주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잡아도, 잡아도 계속 몰려들었다. 손에 흉기까지 들고 덤벼들었다.
결국 그놈들이 장덕수의 학교 근처까지 몰려와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자 참다못한 장덕수가 학교 밖으로 나섰다.
통학로를 가로막고 행패를 부리던 놈들, 그리고 놈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충남 최악의 일진이라는 놈까지 몽땅 박살냈다. 봉인이 풀린 장덕수를 막아설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난생 처음 다른 사람을 때렸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희열감이 한데 엉키며 장덕수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장덕수가 그 생소한 감정을 떨쳐내려 애쓰던 그때 저 멀리서 친구 하나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덕수야! 덕수야! 병원에서 연락이!’
정신이 반쯤 나가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임종을 앞둔 할머니가 장덕수를 기다리고 계셨다.
착하게 살아라, 다른 사람 때리지 말고 참고 살아라.
할머니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혼자 남겨지게 될 손주가 행여 어둠의 세계로 발을 디딜까 염려해 남긴 마지막 부탁이었다.
“선배님? 덕수 선배님?”
“···어?”
“아, 하도 못 들으셔서 이어폰 끼고 계신줄 알았네요. 코치님이 찾으십니다.”
“어, 그래. 고맙다. 수혁아.”
얼마나 정신을 팔았던 걸까.
어제 밤 황성민의 패악질을 받아주면서 시작된 과거에 대한 회상이 오늘 아침 훈련에까지 계속되어 그를 괴롭히고 있다.
방금 전 자신을 깨워준 기특하고 착한 후배인 한수혁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라운드로 돌아갔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녀석이다. 저놈이 입단한 후 이 팀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간적으로도 참 착하고 배려심 깊은 후배다. 겉으로는 무뚝뚝한 척 하지만 다른 동료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생각해보면 예전 자신을 잘 따르던 그 동생 놈과 얼굴이 많이 닮았다.
훗.
수혁이가 들으면 싫어하겠지. 저 녀석은 어디 가서 돈이나 빼앗길 놈은 절대 아니니까.
“헤이, 장! 왔군. 개막전 분석 자료인데 일단 한 번 검토하고 나와 다시 얘기하자고.”
“네, 감사합니다. 코치님.”
“좋아. 아마 교체로 최소 3이닝은 소화하게 될 테니까 상대 타자 자료는 무조건 숙지해야 해.”
코앞으로 닥친 개막전, 출장이 예정된 장덕수에게 상대팀의 분석 자료가 건네졌다.
사락사락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집중이 안 되고 쓸데없는 예전일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읽던 자료를 덮어놓은 장덕수가 눈을 감고 그때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일진 놈들의 부모들이 몰려와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지만 그놈들이 흉기까지 들고 중학생들을 폭행한 정황이 너무나 뚜렷했다.
거기에 장덕수가 구해준 애들 부모 중에는 지역 사회에서 힘 깨나 쓰는 이들이 즐비했다. 그런 이들이 나서 일진 놈들의 부모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정리된 후 동네 어르신들의 보살핌을 받게 된 장덕수는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야구부 활동을 권유 받고 포수가 되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야구부 생활은 꽤나 괜찮았다.
장학금도 받았다. 프로팀에서도 그의 피지컬과 재능을 주목했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돌봐 준 어르신들에게 보답하기에 야구는 꽤나 그럴듯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프로 지명을 받고 다시 상무에 입단하기까지 나름 순조로운 코스를 밟아왔다. 포수를 보기에는 너무 사이즈가 크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긴 했지만 타고난 유연성으로 이를 극복해냈다.
프로 입단 후에는 주류인 황성민 파에 밀려 만년 백업 신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장덕수는 야구가 너무 좋았다.
우리 팀의 선수들과 홈 플레이트를 보호해야 하는 포수라는 자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가끔 다른 선수와 신체적 충돌이 일어나려 할 때, 혹은 성질 더러운 선배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려 할 때.
장덕수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곤 한다.
주먹질 함부로 하지 말라는 할머니의 유언과 일진들을 때리며 느낀 죄책감,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느꼈던 희열감들이 제멋대로 뒤엉키며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고 말았다.
그랬다.
조금만 힘을 과하게 줘도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건 장덕수에게는 엄청난 족쇄이며 동시에 스트레스였다.
사실 그가 가진 강철 같은 육체와 힘은 홈플레이트를 지켜야 하는 포수에게 너무나도 큰 장점이었지만 장덕수는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장, 자료는 다 봤나? 그럼 함께 검토해볼까?”
“물론입니다. 코치님.”
그렇기에 장덕수는 오늘도 참고 있다.
가끔은 황성민 같은 놈을 볼 때면 그 자리에서 그냥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그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섬뜩한 욕망이 솟아오를 때도 있지만.
참고 또 참아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인내심이 바닥 날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감, 그것이 장덕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 * *
매년 11월이면 그해 KBO의 우승팀이 가려지게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스토브리그, 스프링캠프, 시범경기···
역사 수업시간만큼이나 길고 지루한 시간을 지나 꽃피는 4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야구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정규시즌이 개막된다.
하루하루 자신의 팀을 응원하는, 혹은 욕하는 맛에 사는 야구팬들에게는 정규시즌 개막전이야 말로 그해 가장 큰 축제의 장일 수밖에 없다.
– 야구팬 여러분!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난 시범경기 동안 전력을 가다듬은 프로야구 10개 구단이 마침내 정규시즌에서 격돌합니다. 오늘 2027 KBO 리그가 전국 5개 구장에서 동시에 개막경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 아! 오늘 날씨 정말 좋죠. 바람도 선선하고, 올해 WBC 대회가 8월로 결정되면서 경기 일정이 조금씩 변경되었죠. 그 덕에 개막전 경기를 야간에 치르게 되었는데요. 야구 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저녁입니다
– 동감입니다. 위원님, 오늘 잠실에서는 지난 시즌 최하위 서울 워리어스와 8위 부산 타이탄스 간의 경기가 펼쳐지게 됩니다. 경기 시작에 앞서 팬 여러분들이 어떤 부분을 가장 중점적으로 보면 좋을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 네, 일단 워리어스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한수혁
– 네, 그렇죠. 지난 시범경기에서 자신이 신인왕이 아닌 MVP 후보라는 걸 입증한 슈퍼 루키 한수혁 선수의 활약에 올 시즌 워리어스의 순위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 정말 대단했죠? 시범경기에서 타격 전 부문 최상위권의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초심자의 행운이라도 하는 의견도 있던데 위원님은 어떻게 보시나요?
– 초심자의 행운이요?
질문을 받은 해설위원이 콧방귀를 끼며 대답했다.
– 만약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둘 중 하나겠군요
– 둘 중 하나라면?
– 워리어스의 라이벌 팀 팬이거나···
– 아하
– 혹은 시범경기 중계를 한 번도 안 보고 인터넷으로 경기 결과만 본 분들이거나 말이죠
– 확고하시군요
– 당연하죠.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시작한지도 벌써 45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데 역대 그 어떤 신인도 한수혁 선수 같은 퍼포먼스는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말이 있죠?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 네, 아주 유명한 말이죠
–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올해 그 팀보다 위대한 선수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하하, 어떻게 들으면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 될 수도 있겠군요. 시청자 여러분들께서는 한수혁 선수가 그 정도로 대단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받아들여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 잠시 광고 보고 오겠습니다
최근 프로야구 경기 해설 외에도 개인 유튜브를 통해 한수혁에 대한 무한 칭송을 이어온 해설위원의 과격한 발언이 아나운서에 의해 중간에 진압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채팅창이 불타기 시작했다.
﹂우리 솔직히 말해보자. 한수혁 메이저리그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라 생각한 흑우 있으면 거수
﹂없어 그런 멍청이는
﹂너가 그랬나보지
﹂야, 솔직히 한수혁 정도면 메이저 갔어도 첫 시즌 MVP임
﹂ㅋㅋㅋ, 신인왕도 아니고 MVP란다. 설레발 오진다 정말
﹂고작 신인왕 정도로는 한수혁 님의 거대한 기량을 담아내기에 부족하니까
﹂확실한 건 한수혁을 크보에 남게 한 박성훈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해야 함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광고가 끝나고 다시 카메라가 중계석을 비췄다.
해설위원에게 무리한 발언은 자제해 달라고 요청한 아나운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 자, 일단 한수혁 선수에 대한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위원님, 오늘 워리어스의 선발 라인업이 시범경기 때와는 약간 다른 것 같죠?
– 흠흠. 네, 오늘 워리어스에서 내놓은 라인업입니다
1번 2루수 이창모
2번 유격수 한수혁
3번 1루수 조성오
4번 우익스 맥스 워커
5번 3루수 안치욱
6번 좌익수 김수학
7번 중견수 최민석
8번 포수 장덕수
9번 지명타자 유인철
선발투수 라이언 스타크
– 매지션스에서 이적해온 최민석 선수가 7번에 자리를 잡았고… 포수 자리에 황성민 선수가 아니라 장덕수 선수가 들어섰군요?
– 네, 주전포수 황성민 선수는 연습 중에 새끼발가락에 약간 불편함을 느낀 모양입니다. 그래서 장덕수 선수가 대신 선발로 나서게 된 것 같네요. 3번 자리에는 주장 조성오 선수가 들어서서 2번 타순에 선 한수혁 선수를 뒷받침하게 되었습니다
해설위원의 말에 방송 채팅창이 또 시끄러워졌다
﹂연습중에 발가락을 다쳤다고? 헛소리. 어디 가서 쓸데없는 짓 하다 삐었겠지
﹂그 새끼 선발에서 빠지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포크볼도 제대로 못 잡는 8년차 포수 ㅋㅋㅋ
﹂2할 쳐놓고 수비형 포수라고 30억짜리 FA계약 따낸 새끼…
﹂포크볼 놓치고 투수 노려보는 게 취미인 새끼…
﹂팔려고 해도 팔리지를 않아서 그냥 내버려둔 새끼···
황성민이 빠진데 대해 팬들은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아나운서가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뭔가를 발견한 그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확 높아졌다.
– 아! 오늘 시구를 맡은 가수 민예린 씨가 마운드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시구 지도를 맡았던 이만식 선수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네요?
– 저러다가 큰 일 납니다. 이만식 선수! 와이프가 집에서 보고 있어요!
– 조금 위험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저 역시 저 심정이 이해가 가긴 하네요. 민예린 씨, 한 때 잠실야구장의 여신이라 불렸던 워리어스의 광팬 아니겠습니까?
– 네, 이런저런 이유로 잠시 야구판을 떠나 있었지만 이번에 다시 돌아왔죠? 시범 경기 개막전에서는 입장 관객 전원에게 데뷔 앨범 CD를 증정하는 깜짝 이벤트도 벌였고요. 아, 워리어스 홍보팀 말로는 오늘 시구 후에 축하무대와 응원단과 함께 하는 시간도 준비되어 있다고 하네요
– 오! 이거 오늘 야구장을 찾은 분들은 민예린 씨 무대까지 공짜로 보실 수 있겠군요
– 네, 한 가지 아쉬운 건 얼마 전 서울시에서 큰 맘 먹고 교체한 전광판 중앙 디스플레이가 아직 가동 준비가 덜 된 모양입니다. 플레이 하이라이트를 볼 수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민예린 씨의 얼굴을 크게 볼 수 없다는 게 정말 아쉽습니다
– 저런, 야구장을 찾은 남성 팬들의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군요
워리어스 유니폼을 입고, 모자까지 푹 눌러쓴 민예린이라는 가수가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마운드 위로 올랐다.
야구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집중되었다.
성훈이 형이 말한 가수가 바로 저 여자구나. 워리어스 광팬이라는.
옆을 보니 안치욱이 입에서 침까지 흘리며 민예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치욱.”
“···어, 어, 왜?”
“저 여자가 그렇게 유명하냐?”
“뭐? 너 민예린 몰라?”
“몰라.”
“···통탄할 일이다. 어찌 이 대한민국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남자 놈이 민예린 님을 모를 수 있을까.”
“헛소리 말고, 아무튼 사람들이 진짜 좋아하긴 하네.”
“당연하지. 이건 돈 주고도 못 보는 공연이니까. 너도 그러고 있지 말고 일어서서 같이 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뭐··· 나야 예나 지금이나 연예인에 별 관심 없지만 이 놈은 한창 혈기왕성한 스무 살이니까.
마운드 위에 서서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민예린을 보니 문득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매년 빅리그 개막전이면 단골로 초대되어 미국 국가를 부르던 그 여가수.
하도 친한 척을 하길래 마지 못해 아는 척을 한 번 해줬더니 그 뒤로 계속 경기장을 따라다니며 날 귀찮게 하던 여자.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이때도 이미 잘 나가는 팝스타려나?
그래도 1년이나 날 따라다녔고, 어깨부상으로 쓰러져 그라운드 복귀가 불투명했을 때 날 위해 펑펑 울어준 건 그녀가 유일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엘리··· 아니, 켈리였나. 아니다, 에밀리···
흠.
···젠장, 1년 넘게 본 사람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다니.
누구인지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얼굴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만약 그때 일로 그녀가 상처를 받았다면.
한 번쯤 말해주고 싶다.
그때는 그냥 내가 너무 여유가 없었다고,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하기에는 너무 감정이 메말라 있었다고.
그냥 그랬던 것뿐이라고.
“와아아아!”
갑자기 터져 나온 관중들의 함성소리에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라운드를 보니 민예린이라는 가수가 마운드 위에서 관중들을 향해 큰 절을 올리고 있었다.
기껏 갖춰 입은 하얀색 홈 유니폼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는 듯했다. 진짜 워리어스가 좋긴 좋나 보다.
풋.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이 세상에는 야구에 미친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하기사, 야구에 미친 걸로 치면 이 지구상에 나만큼이나 미친 인간이 또 있을까?
15년이나 야구판에서 구르고,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루고.
그걸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한국에서 또 한 번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어차피 꼴찌는 또 워리어스라고 떠드는 인간들.
그런 인간들에게 보여줘야겠다.
진짜 야구에 미친 놈이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