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9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94화(295/412)
#294. 의지할 대상
스포츠에서 멘탈이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야구에 세이버매트릭스라는 학문이 도입된 후 각 선수들은 승패나 타율 홈런, 평균자책점 같은 기본적인 클래식 스탯 외 FIP, WHIP, WAR, WRC, WPA 등등 언뜻 들어서는 이해하기도 힘든 지표들을 통해 샅샅이 분석되고 있다.
엑셀표 가득 들어찬 숫자들만 봐도 이 선수가 어떤 타입의 선수이고, 또 얼마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가 한눈에 보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록과 지표들은 고스란히 그 선수의 연봉에 반영된다.
팀의 성적과 상관없이 개인 성적과 지표를 관리하는 스트레스가 선수들에게 추가된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수 개개인의 몸값이 수백,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빅리그 구단들은 정신 건강을 전담하는 의사와 상담사를 배치해 선수들의 멘탈을 관리하고 있다.
지난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새로 구단에 부임한 전문가와 상담을 마친 데릭 플레밍.
올 시즌 상반기 타율 0.305, 출루율 0.398, 12개의 홈런, 22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올스타 외야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그는 한 가지 딜레마에 봉착한 상태였다.
‘요즘 컨디션은 어떤가요, 데릭?’
‘아주 좋아요. 컨디션만 놓고 보자면 데뷔한 이래 가장 좋다고 봐도 무방할 거 같네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표정은 음, 내가 잘못 본 건가요? 고민이 있어 보이는데요?’
‘고민이라… 고민, 거 참, 이걸 고민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말해 봐요. 그걸 위해 시애틀 구단에서 비싼 돈을 주고 절 고용한 거니까요.’
‘흠, 좋아요. 사실 별 건 아니에요. 개인 성적도 잘 나오고, 팀도 잘나가고 있고,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요즘 들어 내가 특정한 누군가에게 너무 기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기댄다? 실례지만 그 대상이 누구인지 물어도 될까요? 부모님? 감독? 코치?’
‘그게… 음, 젠장, 좋아요. 솔직하게 말하죠. 한수혁이에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고작 스물 초반의 애송이에게 너무 기대고 있는 건 아닌가? 나도 한때는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인데, 뭔가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자꾸 그 녀석을 바라보게 된단 말이죠. 저놈이 알아서 해주겠지, 해결해 주겠지. 문제는 그럴 때마다 내가 약해지는 것을 느껴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음.’
‘타석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이거예요. 어떻게든 1루에 나가기만 하면 저 녀석이 날 홈으로 불러들여 주겠지.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진루에 실패했을 때조차 비슷한 생각이 든다는 게 문제예요. 상관없겠지. 내가 아웃 당했어도 저 녀석이 대신 나가줄 테니까.’
‘흠.’
‘수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 녀석이 좌익수 자리에 서면… 나도 모르게 자꾸 좌중간 코스로 날아오는 타구를 양보하고 싶어지거든요. 젠장,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나보다 녀석이 더 좋은 수비수란 걸 아니, 자꾸 멈칫거리게 되는 거죠.’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녀석을 넘어서고 싶다는 향상심과 경쟁심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제기랄, 그라운드에서 녀석과 눈이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자꾸 기대게 된다는 거죠. 휴… 어쨌든 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하긴 하네요.’
‘데릭.’
‘네, 듣고 있어요.’
‘그런 마음을 굳이 버리려 할 필요 없어요. 하나만 묻죠. 타이 같은 베테랑에게 기대고 싶어질 때도 지금 같은 마음이 드나요?’
‘타이? 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네요. 나이를 떠나 그는 존중받아 마땅할 커리어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바로 그거예요. 한수혁 선수의 나이나 커리어에 신경 쓸 게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것을 들여다보세요. 그는 메이저리그 생긴 이래 최고가 될지도 모를 그런 선수입니다.’
‘흠.’
‘기대세요. 얼마든지 믿고 의지해도 됩니다.’
‘선생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저에게요? 좋아요. 얼마든지요.’
‘혹시 야구 좋아하시나요?’
‘당연하죠. 할아버지 때부터 시애틀의 팬이니까요.’
‘흠, 그럼 혹시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당연히 한수혁!’
‘흐음…….’
‘데릭, 부끄러워할 거 없어요.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애틀 선수들 중에서 그런 비슷한 감정을 가진 선수가 한둘이 아니니까요.’
‘허어…….’
‘제가 한수혁 선수에게 물어봤답니다. 혹시나 선수들이 의지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나 해서.’
‘뭐라고 하던가요?’
‘엄마 역할에는 익숙하다고 하더군요, 하하.’
‘으으음…….’
‘자, 우리 이렇게 생각합시다. 그와 함께 뛰는 동료들이나 저 같은 팬들에게 한수혁은 축복이에요. 생각해보세요. 혼자서 완투하고 홈런까지 날리는 선수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즐기자고요. 언젠가 이때를 돌아볼 날이 왔을 때 정말 한 점 부끄럼 없이 순간순간을 즐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흐으으으음…….’
‘자! 데릭! 그러니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두고 빨리 가서 배트라도 한 번 더 휘두르세요! 당신은 뱃머리 가장 앞에서 선원들(Mariners)을 이끌어야 할 조타수이니까요!’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주심의 판정 사인에 데릭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말이 맞다.
한수혁은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나 라이벌이 아니라 기대야 하고, 기대도 좋을 이 팀의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어쩌면 메이저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지도 모를 역사적 시즌을 보내고 있는 한수혁.
데릭의 머릿속에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슈웅
스륵
“맞았어요!”
“나도 알아. 타자, 1루로!”
심판의 결정에 말린스 포수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심판, 방금 그 공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고요.”
“아니, 내 판정에 토를 달지 마. 방금 공은 힛바이피치가 맞아.”
팔꿈치에 공이 스친 데릭이 신이 난 표정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대기 타석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젠장, 나 발목이 별로 안 좋은 거 같아. 한! 큰 걸 쳐서 편하게 걸어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 * *
촤아아아앗!
“세이프!”
“빌어먹을! 장난해? 눈 똑바로 안 떠?”
“머저리들, 허수아비를 세워놔도 너희보다는 나을 거다!”
야구 선수 입장에서 홈팬들의 분노와 욕설만큼 무서운 건 없다.
몸에 맞는 볼로 걸어 나간 후 발목이 안 좋다고 엄살을 부리던 데릭은 초구에 바로 기습 도루를 시도, 2루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타석에 들어서기도 전 이미 코치로부터 도루 지시를 받았음에도 상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트래시 토크를 한 셈이다.
어쨌든 벤치에서 도루를 선택한 건 지금이 대량 득점 찬스라고 판단해서였다.
올 시즌 마이크 워렌의 평균 자책점은 4점대 초반, 확률적으로 9이닝을 던지면 최소 4점은 내준다는 결론이다.
상대 투수의 구위가 그다지 좋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1득점에 그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여기서 점수를 확 벌려야 안정권에 접어들 수 있을 거라는 게 우리 벤치의 판단인 듯하다.
“타자 1루로.”
역시나,
데릭의 도루로 1루가 비자 말린스 벤치에서는 곧바로 자동고의사구를 요청했다.
그렇게 무사 주자 1, 2루가 되었고, 첫 타석에서 병살타를 때렸던 3번 타자 척 클락이 타석에 들어섰다.
병살타를 기대하고 자동고의사구를 내준 말린스 벤치, 그리고 한 점이 아닌 다득점을 노린 시애틀 벤치.
따아아악!
양쪽 벤치의 치열한 머리싸움은 결국 벤자민 감독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좋아! 달려! 달리라고!”
“홈으로! 홈! 홈!”
우중간을 가르는 깨끗한 2루타.
2루에 있던 데릭이 여유 있게 홈으로 들어오고,
촤아악
“세이프!”
우익수가 타구를 살짝 더듬는 사이 전력질주를 한 나까지 홈에서 세이프.
그렇게 두 점이 더해지며 스코어 3:0, 거기에 노아웃 주자 2루 찬스가 이어지게 되었다.
“개자식들! 집어 쳐! 난 이제 집에 갈 거다! 집에 가서 네놈들의 유니폼을 찢고 불살라버릴 거야!”
“빨리 파산하고 다른 놈에게 구단을 넘겨! 이 좆같은 구단 운영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니까!”
또 한 번 그라운드 안으로 오물이 쏟아지고 경기가 중단되었다.
그 틈을 타 대기타석에 있던 라파엘을 불러들였다.
“라파엘.”
“좋아, 난 준비됐어.”
“음? 뭐가 준비됐는데?”
“내게 조언을 해주려는 거지? 다른 선수들에게 들었어. 네가 해주는 말은 일단 따르고 보라고. 뭐가 됐든 좋아. 배트를 거꾸로 들고 들어서라고 해도 난 그대로 할 각오가 되어 있어.”
이거, 군기가 너무 심하게 든 것 같은데.
혹시 타이가 장난이라도 친 건가.
“아니, 그냥 별 건 아니고, 저기 연습투구 하는 투수의 발목을 잘 봐. 키킹하는 쪽 발.”
“봤어. 음, 그런데 뭘 봐야 하는 거지.”
“잘 봐. 발목의 각도가 90도다 저러면 포심.”
“오오.”
“그것보다 각도가 좁다 싶으면 높은 확률로 브레이킹볼.”
“오오오.”
“백 프로 확실한 건 아니야. 나도 오늘 처음 발견한 거니까. 자, 그럼 나가봐. 가면서 토니에게도 전달해주고.”
“고마워. 설사 이번 타석에서 실패하더라도 내가 경기 끝난 후 꼭 한 잔 사도록 하지.”
“술은 됐어, 나가서 안타나 치라고.”
아무리 잘 훈련된 선수라 해도 상황이 좋지 않으면 예전의 안 좋은 버릇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오늘 말린스의 선발이 딱 그렇다.
전력분석팀에서 준 자료에서 발목에 대한 부분이 없는 걸로 보아 아마 오래전에 갖고 있던, 지금은 수정이 끝난 버릇일 거다.
오늘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옛날 버릇이 나온 거겠지.
어쨌든 투수와의 승부에서 항상 불리할 수밖에 없는 타자에게는 저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모이고 모여 큰 힘이 되어주는 법이다.
저 멀리 라파엘을 통해 내 말을 전달받은 토니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따악!
중견수의 호수비 덕에 안타가 되지는 못했지만 2루 주자를 3루까지 보내기에는 충분했던 타구.
원아웃 3루, 라파엘 오수나가 타석에 들어섰다.
* * *
‘제발, 신이시여.’
리빌딩을 선언하고 주축 선수들을 팔아치우기 시작한 템파베이 레이스.
그 팀에서 나름 주전 1루수로 뛰던 라파엘 오수나는 시애틀로의 트레이드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무너져가는 팀의 주전 1루수와 월드시리즈 컨텐더 팀의 백업 요원.
당장의 입지만 놓고 생각하면 전자 쪽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야망이 큰 선수였다.
라파엘이 바라는 건 월드시리즈 챔피언 반지를 끼는 것, 그리고 조금 늦더라도 그 팀의 주전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애틀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일단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하는 팀인 데다가, 자신을 데려갈 수 있는 팀들 중 주전 1루수의 나이가 가장 많다.
물론 그 나이 많은 1루수가 타이 존슨이라는 게 문제이지만,
괜찮다.
저 정도 나이가 되면 서서히 지명타자 출장 비율이 높아질 것이기에 자신이 선발로 나설 기회는 점점 더 많아질 테니까.
라파엘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수비 실력은 수준급이지만 타격 면에서 아무리 잘해도 2할5푼 내외의 타율에 두 자리 수 홈런 정도가 한계라는 것 말이다.
템파베이 같은 팀이라면 몰라도 월드시리즈 컨텐더 팀에서 뛰려면 백업 롤을 받아들이는 건 무척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라파엘은 그걸 아주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그 말이 맞았어! 포심이야!’
그런 라파엘이었기에 시애틀에 합류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팀의 주축을 이루는 선수들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라파엘이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오던 날 아버지가 말씀해주셨다.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다 비슷하다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으니 항상 동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도록 노력하라고.
시애틀 선수단에 심사가 비틀린 괴팍한 인간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선수들이 라파엘의 웃음에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팀 내 최고 권력자라 생각되는 한수혁과 친분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건 아무 상관없다.
빅리그에서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닌 실력이고, 한수혁은 그 실력 면에서 역대 최고라 불려도 좋은 그런 선수였으니까.
슈웅
파앙
“볼.”
전 타자였던 토니의 타석에서 두 개, 그리고 지금 두 개,
그 네 개의 공을 지켜본 라파엘은 확신했다.
한수혁의 말이 맞았다는 걸.
‘승부다!’
투수의 한쪽 발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평소보다 훨씬 좁아 보이는 발목의 각도.
저 투수가 던질 수 있는 브레이킹 볼은 슬라이더와 커브, 딱 두 가지.
라파엘의 직감이 얘기했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가 들어올 거라고.
머릿속 슬라이더의 궤적에 맞춰 배트가 힘차게 뻗어나갔다.
그리고,
따아아아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제대로 맞은 타구가 중견수 키를 넘어 계속 날아갔다.
“오! 갔다! 갔어!”
“타이, 긴장해야겠는데?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어!”
“젠장, 정말이네? 감독님, 날 내보내줘요. 난 준비됐다고.”
타이 존슨의 너스레에 웃음이 터지고, 투런 홈런을 날린 라파엘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덕아웃을 돌아왔다.
“네 말이 맞았어. 한! 맞았다고! 아하하하하!”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