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00)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99화(300/412)
#299. 에이스의 얼굴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리라는 말이 있다.
새로 교체되어 들어온 투수의 경우 심리적으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는 경향이 강하기에 나온 말이다.
물론 그 외에도 투수에게는 반드시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하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 상황에 몰렸을 때, 혹은 강타자 앞에 주자를 내보내기 싫을 때, 그도 아니면 꼴 보기 싫은 놈에게 한 방을 먹여주고 싶을 때 등등.
“플레이!”
그리고 또 하나,
앞선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을 때,
노 아웃 주자 1루 상황.
지금 내가 노려야 하는 건 제이 워드가 던질 초구다.
이런 상황에서 저놈이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던질 공은 딱 하나, 스스로 최고라 믿고 있는 105마일의 포심.
투수로서의 종합적인 능력은 존 스몰츠에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저 녀석의 포심 하나만큼은 진짜다.
빠르기뿐만 아니라 구위와 제구, 모든 면에서 높은 점수를 줘야 마땅할 공이다.
물론 나와 비교하기에는 아직 멀고도 멀었지만.
어쨌든 회귀 후 내가 만나게 된, 나를 제외한 가장 좋은 포심을 던지는 투수.
드드득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나는 체중을 늘리고 타격 매커니즘에도 변화를 가했다.
눈 깜짝할 새에 타자 몸 쪽으로 파고드는, 총알과도 같은 강속구를 쳐내기 위해서 말이다.
“젠장, 제이! 넌 최고야! 할 수 있어!”
“눌러버려! 저 녀석을 박살 내버리라고!”
관중들의 함성이 점점 더 커지고, 1루에서는 나를 돕기 위해 데릭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부의 순간임을 직감한 내 육체에서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된다.
짜릿하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나는 육체와 기술을 갈고 닦은 것이다.
스르륵
한참 동안 1루를 노려보던 제이 워드가 드디어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2미터에 가까운 큰 키, 그렇기에 겉모습만으로는 존 스몰츠가 아닌 빅 유닛을 연상시키는 제이 워드의 손끝에서 하얀 공 하나가 발사되었다.
“흡!”
몸 쪽으로 날아오는 총알 같은 강속구.
있는 힘을 다해 팔꿈치를 몸통에 붙이고, 갈비뼈를 지지대로 삼아 그대로 스윙.
따아아아악!
맞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할 수 있는 큰 타구.
낮은 각도로 발사된 타구가 총알처럼 뻗어나가 좌측 관중석 중단을 강타했다.
텅
“Fuck!”
“안 돼! 제발! 무효야! 이건 무효라고!”
“제길, 뭘 쳐다봐! 빨리 뛰어! 이 개자식아!”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비명을 배경음 삼아 천천히 1루를 향해 출발했다.
즐겁다.
이 순간의 즐거움을 과연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 * *
창단 후 53년 동안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해보지 못한 팀,
현존하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유일하게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팀,
그런 한을 품은 채 평생토록 연고지 팀을 응원했던 시애틀 팬들은 최근 매일 매일이 축제와도 같았다.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는 팀 성적,
3할에 가까운 팀 타율에 주전 타자 중 무려 7명이 두 자리 수 홈런을 때려낸 젊고 힘 있는 강타선.
거기에 마이크 워렌과 하야시 렌타로를 영입하며 더욱 강력해진 선발 마운드.
그리고 그런 팀 전력에 방점을 찍는 유일무이한 존재.
한수혁.
100경기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한 시점에서 여전히 4할이 넘는 타율을 유지하고 있는 규격 외의 정교함.
거의 두 경기당 하나씩 홈런을 때려내며 배리 본즈의 73홈런 기록 경신에 도전하고 있는 엄청난 파워.
거기에 투수로서 16번을 선발 등판해 14승을 따내며 0점대 평균자책점을 유지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의 소유자.
그런 한수혁이 시애틀 유니폼을 입고 있다는 건 팬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자랑거리이자 즐거움이었다.
└ 좋아, 난 어제 개명 신청을 완료했어.
└ 무슨 소리야?
└ 지난 겨울, 이 팀에서 듣도 보도 못한 아시아의 루키 영입에 엄청난 공을 들인다는 걸 들었을 때 그놈이 빅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면 성을 갈 거라고 했거든. 그런데 당장 성을 가는 건 힘들 것 같더군. 속죄의 의미로 일단 이름부터 바꿀 생각이야.
└ 바람직한 자세군.
└ 젠장, 하루하루가 꿈만 같아. 정말 저 친구가 우리 선수인 건 맞는 거지? 0점대 평균자책점에 4할을 때려내고 있는 선수가 시애틀 유니폼을 입고 있다니… 홀리 쉣!
└ 자, 이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자고. 한수혁은 올 시즌 0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빅리그 최초의 투수이자, 단일 시즌 최다 홈런을 경신한 역대 최고의 거포로 기록될 거야.
└ 잠깐, 희망을 갖는 건 좋지만 산술적으로 한번 따져볼까? 한수혁은 지난 100경기에서 48개의 홈런을 때려냈어. 아, 방금 전 친 건 일단 빼고. 어쨌든 2경기당 1개가 조금 못되는 셈이지. 남은 경기가 62경기… 신기록인 74개까지 남은 건 26개… 62경기에서 26개, 가능할까?
└ 당연히 가능하지. 저 친구는 리그, 아니,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이니까.
└ 아무리 그래도 홈런이란 게 한 번 안 나오기 시작하면…….
└ 이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냉철한 이성이 아니야.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절대 신기록은 나올 수 없다고. 저 친구가 포기하지 않게 끝까지 응원하고 힘을 불어넣는 게 우리들의 역할이라고.
└ 맞아. 그런 의미에서 시애틀은 구장 좌석을 더 확장해야 해. 응원을 하고 싶어도 구장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개자식들아!
└ 홈런에 가려 있어서 그렇지, 난 사실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느냐에 더 관심이 가. 말 그대로 빅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있는 일이잖아, 안 그래?
└ 맞아. 하지만 그 부분은 욕심을 좀 거둬야 할 거야. 지난 인터뷰에서도 말했잖아. 투타 겸업에서 문제가 생기면 선발투수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그러니 투수 성적에 대해서는 너무 부담을 주지 말자고, 우리.
└ 젠장, 홈런신기록에 0점대 평자책이라……. 난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아. 이게 정말 현실이 맞는 걸까?
└ 한 가지 확실한 건 저런 선수를 보유하고도 월드시리즈에 가지 못한다면 그건 전부 구단 프런트의 무능함 때문일 거야.
└ 다들 걱정하지 마.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구단 사무실을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릴 테니까. 다 같이 죽는 거야.
* * *
“이봐, 브루스. 너희 루키는 너무 끔찍해? 알고 있겠지?”
1회말 애틀랜타의 공격, 선두타자로 나선 중견수 C.J. 잰슨이 고개를 돌려 브루스에게 말을 걸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브루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이건 비밀인데 어제 벤치클리어링 때 한수혁 저 친구는 가진 힘의 절반도 사용하지 않았어. 정말 화가 나면 어떻게 될지는 우리도 몰라. 그러니 괜히 자극하지 말라고.”
“하아, 야마모토 그놈은 우리도… 젠장,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야구나 하자고.”
어제 벤치클리어링에서 한수혁에게 얻어맞은 여파로 하반기를 통째로 날리게 된 야마모토 겐이치.
모든 건 놈이 자초한 일이지만, 어쨌든 한 시즌을 풀로 뛸 경우 30홈런은 가능하다 평가받던 중심타자가 라인업에서 빠지게 되었다.
이는 올 시즌 월드시리즈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애틀랜타에게는 상당한 악재였다.
그럼에도 애틀랜타 선수들 역시 야마모토가 한 짓을 알고 있기에 화를 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상대를 자극하는 발언과 욕설은 둘째 치고, 먼저 발길질을 한 쪽이 야마모토이니 말이다.
벤치클리어링에서 스파이크나 배트 같은 무기가 될 수 있는 물건을 사용하지 않는 것, 그건 메이저리그의 불문율이었고, 그걸 어겼으니 떡이 되도록 맞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몸 쪽 체인지업’
어쨌든 흥분할 줄 알았던 애틀랜타 선수들의 반응이 예상과 조금 다른 걸 확인한 브루스 매튜스가 초구 체인지업 사인을 보냈다.
이번 3연전에서 1승씩을 주고받은 상황, 오늘 선발투수가 시애틀의 1선발인 라이언 티보우인 걸 감안하면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이다.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끄덕
피치컴을 통해 사인을 전달받은 라이언이 신중한 자세로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한수혁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에이스라는 부담감 사이에서 고민하던 라이언은 이제 마음의 평화를 찾은 상태였다.
그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쓸데없는 비교를 하지 않게 되었고, 나아가 그에게 투수로서의 기본자세를 배우게 됨으로써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지난 시즌에도 이미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 불렸던 라이언이다.
그 상태에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된 지금, 어쩌면 한수혁을 제외한 최고의 투수는 바로 그일지도 몰랐다.
슈웅
부웅
“스윙!”
몸 쪽 낮은 곳으로 완벽하게 제구된 체인지업.
올 시즌 한수혁과 라이언의 공을 모두 받아내고 있는 브루스는 생각했다.
적어도 이 체인지업만큼은 라이언이 한수혁에게 밀리지 않겠다는 그런 생각.
방금 공은 정말 100점 만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완벽한 공이었다.
‘좋아. 다음은…….’
지금 타석에 서 있는 애틀랜타의 톱타자 C.J. 잰슨은 상당히 좋은 타자이다.
하지만 분명한 약점이 있다.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 4개에 불과한 오로지 출루에 모든 것을 건 리드오프라는 것.
장타의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는 현대야구에서 맞아봐야 단타, 혹은 볼넷이 전부라는 건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그렇기에 브루스는 C.J. 잰슨을 상대로 조금 더 과감한 볼 배합을 가져가보기로 했다.
‘바깥쪽 높은 포심’
힘 있는 타자에게는 절대 던져서는 안 될 코스와 구종.
포수의 의중을 알아챈 라이언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저 코스의 공을 쳐봤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타자가 배트를 내지 않은 채 그대로 공을 바라봤다.
브루스의 리드대로 아주 잘 제구된 위력적인 공이었다.
브루스가 생각하기에 올 시즌 라이언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저 과감함이다.
100마일 내외의 묵직한 포심과 안정적인 변화구를 갖고도 왠지 모르게 항상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던 라이언이 언제부터인가 과감한 승부를 걸 수 있는 투수가 되었다.
브루스는 알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그건 살아 있는 투구 교본이라 불러도 좋을 한수혁의 플레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나아가 필요할 때마다 그에게 조언을 구한 덕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몸 쪽 스플리터’
투수가 저렇게 흥을 내고 있으니 조금 더 과감해져 보기로 했다.
끄덕
역시나 단번에 고개를 끄덕인 라이언이 힘차게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타핫!”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발사된 95마일의 공.
부웅
홈플레이트 바로 직전까지 포심 궤적으로 날아오던 공이 순식간에 쑥 가라앉았고, 타자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스윙! 아웃!”
“좋았어! 라이언!”
“나이스 플레이!”
동료들의 칭찬에 마운드 위 투수의 표정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브루스는 생각했다.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라이언이 이제야 에이스 자리에 어울리는 얼굴을 갖게 된 것 같다고.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