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09)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08화(309/412)
#308. 졸렬한 시도
약물만 아니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현대야구사에 역대 최고의 타자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을 배리 본즈.
그런 배리 본즈가 처음으로 약물에 손을 댄 것으로 추정되는 1998년, 자이언츠가 애리조나에 8 대 6, 두 점 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2아웃 주자 만루 상황이 만들어졌고 배리 본즈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관중석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원정팀 애리조나가 배리 본즈에게 고의사구를 내준 것이다. 2사 주자 만루 상황에서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애리조나의 선택은 옳았다.
고의사구로 인해 8 대 7까지 추격을 허용했지만 다음 타자인 브랜트 메인을 범타로 처리하며 결국 애리조나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2아웃 만루 상황에서의 고의사구.
그것은 당시 배리 본즈가 얼마나 무서운 타자였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그리고 지금,
오클랜드와의 3연전을 끝내고 텍사스 레인저스와 만난 시애틀 매리너스.
9회말 시애틀의 마지막 공격에서 그 역사적인 사건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우우우우!”
“이런 비겁한 자식들! 스포츠맨십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겁쟁이들!”
“차라리 기권을 해! 수건을 던지라고, 개자식들아!”
선발 라이언 티보우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타선의 침묵으로 3 대 1, 두 점 차로 끌려가고 있던 홈팀 시애틀.
9회 말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에서 희망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2아웃 상황에서 8번 조쉬 올리버와 9번 리암 랜드먼, 그리고 1번 데릭 플레밍까지 세 타자가 연속으로 볼넷을 얻어내며 2사 주자 만루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타석에 그가 들어섰다.
이번 시즌 110경기에서 타율 0.419, 출루율 0.515, 장타율 1.044, 홈런 51개를 기록 중인 괴물 한수혁.
타임이 요청되었고, 텍사스의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랐다.
초반 부진을 극복하고 와일드카드에 대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텍사스 레인저스.
그들의 선택은 자동고의사구였다.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서 승부도 못 하는 놈이 빅리그 투수라고?”
“은퇴해, 이 개자식아! 그딴 식으로 하고 수백만 달러를 받아갈 거면 차라리 은퇴하라고!”
분노한 시애틀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지만 벤치에서 요청된 자동고의사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분노한 건 관중들이 아니었다.
한수혁과 함께 뛰기 위해 팀까지 옮긴,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빅리그 최고의 타자라 불리었던 타이 존슨이었다.
3 대 1이던 스코어가 3 대 2가 되었고, 그가 타석에 들어섰다.
“플레이!”
안타 한 방이면 역전까지도 가능한 상황.
따아아아악!
타이 존슨이 친 타구가 중앙 펜스를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올 시즌 데릭과 함께 중견수 부문 골드글러브를 다투는 맥스 로렌스가 있었다.
터억
“안 돼!”
“이런 젠장, 제에에엔장!”
중견수 플라이 아웃.
한수혁을 고르고 타이 존슨과 승부한 텍사스의 시도가 성공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 * *
시즌 초반 자신을 괴롭혔던 바깥쪽 낮은 코스 공에 대한 문제를 극복해낸 타이 존슨은 올 시즌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경신하려는 듯 무서운 속도로 타격 지표를 쌓아 올리고 있다.
시즌 111경기를 치른 현재, 0.330의 타율에 출루율 0.445, 장타율 0.645를 기록 중인 선수를 두고 부진하다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앞에 선 타자가 한수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4할이 넘는 타율에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에 도전 중인 한수혁 말이다.
시즌이 3분의 2 지점을 넘어가고, 가을야구에 도전하는 팀, 그리고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팀이 확연하게 갈리게 되며 시애틀을 상대하는 각 팀들의 전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사 만루에서 고의사구를 당하며 텍사스에 1차전을 내준 시애틀.
그리고 이어진 2차전.
한수혁은 다섯 번 타석에 들어서 3번의 자동고의사구와 2번의 고의사구를 당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 시애틀의 마운드를 지킨 게 한수혁 본인이었다는 거다.
타석에서 거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음에도 한수혁은 8이닝 동안 1점만 내주는 호투를 기록했다.
하지만 팀의 패배를 막을 수는 없었다.
2 대 1 한 점 차로 뒤지고 있던 텍사스 레인저스가 9회 초 공격에서 시애틀의 중간계투진을 상대로 역전을 만들어냈다.
어제 세이브를 거둔 애덤 머피가 등판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현역 복귀 후 첫 투구를 마친 신체 상태를 측정하기 위해 메디컬 센터로 향한 상태였다.
역전을 허용한 후 시애틀의 9회말 마지막 공격, 2사 1루 상황에서 한수혁이 타석에 들어서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 자동고의사구가 요청되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텍사스에서는 다음 타자인 타이 존슨에게까지 고의사구를 사용했다.
2사 만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척 클락의 배트가 상대 마무리 투수의 공을 멋지게 받아쳤다.
그리고 그 공이 또다시 텍사스 중견수 맥스 로렌스의 글러브에 걸려드는 순간,
“음…….”
다니엘 감독은 이 팀에 변화의 순간이 찾아왔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 * *
“그런 이유로 자네를 1번으로 올릴 생각이야. 혹시 문제 있을까?”
“아뇨, 아무 문제없습니다.”
“어제 선발 등판한 투수를 1번으로 올린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난 자네 판단을 믿어. 자네가 괜찮다면 정말 괜찮은 거겠지. 대신 그린라이트는 부여하지 않을 거야. 자네 손은 타격과 주루뿐만 아니라 투구까지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최대한 자제하겠습니다.”
“좋아, 나가 봐. 챔피언. 저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고.”
자꾸만 추격해오는 지구 2위 팀 애슬레틱스, 그리고 쫓아가도, 쫓아가도 자꾸만 도망가는 리그 승률 1, 2위팀 양키스와 화이트삭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생각지도 못한 텍사스에게 2연패를 당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번 패배에 큰 의미를 주고 있지는 않다.
내 뒤에 선 타자들의 타격감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고, 중간계투진의 허약함 역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마무리 투수 애덤 머피가 검진을 위해 하루 휴가를 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상대 팀이 내게 연속 고의사구를 사용한 것 역시 충분이 예상했던 일이다.
이런 모든 걸 예상한다고 해도 꼭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는 게 이 야구라는 스포츠의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감독은 지금이 라인업에 변화를 줘야 하는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잠시 볼 일을 보고 라커룸에 돌아오니 감독이 작성한 라인업 용지가 벽에 붙어 있었다.
1번 지명타자 한수혁
2번 1루수 타이 존슨
3번 중견수 데릭 플레밍
4번 우익수 척 클락
5번 좌익수 짐 브라운
6번 포수 브루스 매튜스
7번 3루수 리암 랜드먼
8번 2루수 조나단 오웬스
9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
선발투수 마이크 워렌
1번 지명 타자,
나는 빅리그 데뷔 이후 처음으로 1번 자리에 서게 되었다.
* * *
– 아, 오늘 한수혁 선수가 리드오프를 맡았군요. 고동식 위원님, 저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네, 지난 2경기에서 한수혁 선수에게 엄청난 고의사구가 쏟아졌죠. 콕 집어서 그것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고의사구 작전을 사용한 텍사스가 2연승을 거뒀고요. 그런 고의사구 작전에 대한 벤자민 감독의 대답이 바로 이것인 것 같습니다. 톱타자 한수혁.
– 거를 테면 걸러라. 1회부터 무사에 주자를 내보내고 경기를 시작하고 싶다면 말이지. 뭐 그런 건가요?
– 정확합니다. 박 아나운서도 야구를 오래 보다 보니 이제 전문가가 다 됐군요.
– 하하, 그런 것도 있지만 KBO에서도 한 번 있었던 일이잖아요? 주로 3번을 치던 한수혁 선수가 몇 번 1번으로 자리를 옮긴 적이 있죠.
– 맞습니다. 이미 겪어본 일이죠. 당연한 말이지만 그때 워리어스의 수석코치였던 벤자민 감독이니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도 이미 알고 있었을 테고요.
– 하지만 상대팀에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한수혁 선수의 리드오프 말이죠.
– 당연합니다. 데이터를 갖고 있을 겁니다. 다만 이렇게 예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KBO에서 리드오프를 맡았던 한수혁과 지금의 한수혁은 다르지 않나, 뭐 그런 거죠.
– 다르다? 아, 기동력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 맞습니다. KBO에서 뛰던 당시 한수혁 선수는 마음먹고 달리면 도루 50개도 가능한 호타준족의 대명사였죠. 하지만 빅리그로 넘어오면서 벌크업을 한 후에는 도루를 극도로 자제하고 있습니다. 올 시즌 9번 시도해서… 9번 모두 성공했죠. 성공률이 대단하긴 한데 아무래도 상대 팀 입장에서는 도루 가능성을 낮게 잡을 수밖에 없는 거죠.
– 해설 감사합니다. 어쨌든 오늘 경기의 성패는 한수혁 선수가 루상에서 얼마나 기동력을 살릴 수 있을지, 그리고 뒤에 들어서는 타자들이 찬스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살릴 수 있을지, 여기에 주목해야겠군요.
– 네, 그 와중에 다행인 건 타이 존슨 뒤에 배치된 데릭 플레밍 선수의 경우 최근 일곱 경기 타율이 4할이 넘거든요. 어쨌든 오늘은 양팀 모두 전면전입니다. 한수혁 선수를 톱타자로 내고도 시애틀이 패하면 다른 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고의사구 작전을 사용할 거예요. 힘으로 박살 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으리라 믿고요.
–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곳은 홈팀 시애틀 매리너스와 원정팀 텍사스 레인저스 간의 시즌 10차전이 열리고 있는 미국 시애틀 T모바일파크입니다.
* * *
빅리그 진출 후 내가 2번 자리에 고정된 건 개인 성적과 팀 성적을 모두 노리기 위한 절충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한 번이라도 더 타석에 들어서 홈런을 노릴 수 있었고, 팀 전체로 볼 때는 데릭 플레밍이라는 쓸 만한 리드오프가 있는 상황에서 나와 타이 존슨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라인업이 2번 한수혁, 3번 타이 존슨, 4번 척 클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를 경기에서 배제하려 한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1번으로 옮기고 다른 타자들에게 뒤처리를 맡기면 된다.
시즌 초반 115㎏까지 끌어 올렸던 몸무게는 시즌을 치르며 111㎏까지 떨어진 상태이다.
때문에 배팅 파워 역시 약간이나마 떨어졌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몸이 상당히 가벼워진 것을 느낀다.
강행군으로 인해 체중까지 줄어든 몸을 이렇게 편안하고 가볍게 만들어주다니.
아무래도 제이콥의 연봉을 올려줘야 할 것 같다.
그는 인간의 육체를 다루는 마술사일지도 모르겠다.
“좋아, 저놈들을 박살 내버리자고!”
“고! 고! 고!”
1회초 텍사스의 공격이 득점 없이 끝난 가운데 시애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지명타자로 출전한 덕에 수비이닝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육체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하지만,
“우우우!”
“정말 부끄러움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자식들이군!”
“텍사스! 이 개자식들아! 그냥 구단을 해체해!”
“약쟁이의 홈런 기록이 안 깨지면 그건 전부 너희 탓이야!”
내가 타석에 들어선 순간, 곧바로 자동고의사구가 요청되었다.
마운드 위 투수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저들 역시 나름 각오를 한 것이다. 와일드카드 획득을 위해 부끄러움 같은 건 모두 집어던지기로 말이다.
그래, 진심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는 진심으로 상대해주는 게 예의겠지.
스슥
1루 베이스를 밟자마자 덕아웃을 향해 도루 사인을 보냈다.
이번 이닝 전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세이프가 될 수 있는 상황,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없이도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도루는 시도하지 않기로.
반대로 말하면 걸어 들어갈 자신이 있으면 시도해도 된다는 뜻이다.
내 도루 사인에 한참 동안 대답이 없던 덕아웃에서 승인이 떨어졌다.
“플레이!”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회귀 전을 포함하면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을 프로 무대에서 보냈다.
그런 내게 이렇게 대놓고 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다니.
부상이 두렵지 않냐고?
글쎄,
나는 이미 야구 선수로서 겪어야 했던 최악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이루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절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내게 부상에 대한 위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빅리그의 세계는 냉혹하다.
겁먹고 멈칫거리는, 약점을 드러내 보이는 즉시 적의 송곳니가 날아와 박히는 곳이 바로 이곳 메이저리그이다.
선수로서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은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팀의 승리를 위해,
나는 텍사스의 졸렬한 시도를 박살 낼 생각이다.
철저하게, 다시는 이런 시도를 하지 못하도록.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