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0화(31/412)
#30.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야구라는 스포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철학을 갖고 있는 듯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야구를 바둑이나 건축에 비유하는 걸 좋아한다.
야구와 바둑, 건축의 공통점은 첫 돌을 어디에, 어떤 식으로 놓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그림이 확 달라진다는 것이다.
KBO에 속한 팀들은 한 시즌에 144경기를 치르게 된다.
선발투수의 경우 로테이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시즌당 20번에서 최대 30번까지 선발로 나서게 되고, 주전급 타자들은 500에서 600번 가량 타석에 들어서게 된다.
길고 긴 레이스다.
상대팀, 상대 선수와의 경쟁 속에서 스스로와의 싸움까지 계속 이어가야 한다.
갈수록 나태해지는 마음,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안일함, 어제 있었던 개인사, 모든 걸 때려 치고 싶은 충동 등등.
이런 것들과 계속 싸우며 커리어를 관리하고 한 시즌을 무사히 보낸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방망이 깎는 노인이 된 기분이랄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나는 미국에서 15시즌을 뛰는 동안 개막전 첫 경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타입이었다.
따악!
타이탄스 1번 타자가 친 타구가 3루수 쪽을 향해 강하게 날아간다.
갈수록 좌타자의 비율이 높아지며 1루수의 수비력 역시 중요해지고 있지만, 아직은 3루수에게 요구되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우타자가 강하게 잡아당긴 타구를 처리하고 1루까지 안정적으로 송구할 수 있는 어깨, 우익수의 송구를 받은 후의 연계플레이 등등.
그런 면에서 안치욱은 아직 많이 부족한 3루수다.
타격음과 함께 움찔했던 놈이 타구의 방향과 속도를 보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예상했던 바다. KBO에서 뛰는 야수들은 저런 타구를 안타라고 판단하곤 하니까.
하지만 나는 144 경기 중 첫 번째인 개막전에서 상대팀 첫 타자에게 안타를 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내가 놓으려는 첫 돌은 그런 게 아니니까.
탓
3루수 옆으로 쏜살같이 날아가는 타구를 향해 힘껏 몸을 던져본다.
촤아악하는 소리와 함께 그라운드의 흙이 사방으로 튄다.
너무나도 익숙한 감각이다.
성훈이 형이 날 위해 교체한, 빅리그 시절 가장 선호하던 특수 흙 위로 내 몸이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턱’
걸렸다.
쭉 뻗은 글러브에 감촉이 왔다.
하지만 몸의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졌기에 이 상태에서 송구 동작을 가져가는 건 아무리 나라 해도 무리다. 게다가 상대는 저 팀에서 가장 발이 빠른 리드오프.
“안치욱!”
슬라이딩으로 타구를 건져낸 내가 넘어진 자세 그대로 글러브를 툭 쳐올려 안치욱에게 공을 토스했다.
내 호통을 듣고 움찔했던 안치욱이 반사적으로 그 공을 맨손으로 잡아 1루를 향해 전력으로 송구.
“아웃!”
한참 동안 고민하던 심판의 입에서 아웃 선언이 나왔고, 상대팀 덕아웃에서는 곧바로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거다. 개막전 첫 타자의 결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퉤.”
입 안으로 한 움큼 들어온 흙을 뱉어내며 안치욱에게 걸어갔다.
사전에 따로 이런 연습을 한 적은 없었다.
방금 플레이는 그동안 열심히 안치욱을 길들여온 내 노력과 예상 외로 강한 녀석의 어깨가 합쳐진 결과다.
“아웃!”
그 사이 심판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아웃 콜이 떨어졌다.
판정번복은 없었다. 안치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흠.
이놈 보게? 지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야. 안치욱.”
“멋졌지? 대단하지?”
“아니, 애초에 멋진 3루수는 그 타구를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지.”
“……”
채찍을 후려쳤으면 당근도 줘야 한다. 그래야 주인의 고마움을 안다.
내가 이 놈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치고, 얻어 맞을 뻔한 거 구해주고, 거기에 연봉까지 주는데 이 정도면 진짜 주인 아닌가?
뭐, 아님 말고.
“그래도 초보치고는 잘 했다. 솔직히 토스하면서도 네가 놓칠 줄 알았거든.”
“음.”
살짝 내려갔던 놈의 입 꼬리가 다시 15도 정도 위로 올라왔다.
스프링캠프에서 처음 봤을 때에 비교하면 진짜 사람 됐다.
이제 조금만 더 굴리면 제법 쓸 만한 3루수가 될 것 같다.
그래, 뭐가 됐든 넌 내가 무조건 사람새끼로 만들어주마.
* * *
“저기 감독님…?”
“……”
한수혁과 안치욱의 미친 콤비플레이를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린 부산 타이탄스 감독 강봉구. 그가 입가에 묻은 침을 스윽 닦아냈다.
‘저거 진짜 제대로 미친 놈일세’
시범경기에서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한수혁이 가진 유격수로서의 잠재력 말이다.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순발력과 유연성에 감탄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가끔은 10년 묵은 베테랑 같은 플레이를 펼쳐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신인으로서의 한계는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했다.
타고난 하드웨어로 깜짝 놀랄 플레이를 보여주긴 하지만 정식 경기에 들어서면, 그래서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되면 어느 정도는 움츠러들 것이라 생각했다.
실전에서는 그 능력의 절반도 사용하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유격수 한수혁에 대한 평점을 박하게 내렸다.
옆자리인 3루에 배치된 선수가 신인 안치욱이라는 것도 한 몫을 했다.
입단 1년차 신인 2명이 나란히 배치된 3-유간.
강봉구 감독은 워리어스와의 개막 2연전에서 그곳을 집중적으로 노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곳이 바로 상대의 약점이라 생각했다.
1번부터 9번까지 최대한 많은 우타자를 배치하고 강하게 잡아당기는 타구를 주문했다. 상대 선발 라이언 스타크가 몸 쪽 승부를 즐긴다는 것도 그 결정에 한 몫을 했다.
“아웃!”
“와… 저것도 잡아. 진짜?”
“감독님?”
“무슨 신인 놈이 개막전에서 쫄지도 않냐, 응? 우리 애들은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자던데.”
그런데 아무래도 오판이었던 것 같다.
타이탄스의 2번 타자가 강하게 잡아당긴 타구가 유격수 옆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쏜살같이 달려온 한수혁이 그 공을 덥석 낚아챘다.
강봉구 감독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경기 전 워리어스의 약점이라 생각했던 3-유간, 그곳은 워리어스가 아닌 타이탄스의 약점이었다.
그가 자신의 계획을 빠르게 수정했다.
“…억지로 잡아당기지 말라고 해.”
“네?”
“3-유간으로 타구 보내는 작전은 일단 보류다.”
현역 시절 워리어스 이대준 감독과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던 강봉구가 입맛을 쩝 다시며 상대팀 덕아웃을 바라보았다.
너무 멀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대준이 지금 웃고 있을 거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지난 몇 년 간 함께 최하위권을 박박 기었건만 누구는 1라운더가 한수혁이고, 우리는 어깨부상으로 재활에 들어간 김 아무개라니.
‘부러운 새끼…’
세상은 역시 불공평했다.
* * *
“나이스 플레이!”
“잘했어! 오늘은 막내들이 다 하네!”
타이탄스 클린업 트리오인 구세준이 밀어 친 타구를 안치욱이 잘 걷어내며 공수가 교대되었다.
솔직히 못 잡을 거라 생각했다.
3루 베이스 위를 타고 넘는 타구의 궤적을 예측하는 건 베테랑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니까.
저 녀석에게 이런 말을 직접 해줄 수는 없겠지만 역시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하는 법이다. 야잘잘이라고 하던가.
자신의 수비능력에 대해 계속 부정적인 피드백만 들었던 놈이 모처럼 입 꼬리를 비쭉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뭐? 칭찬이라도 해 달라고? 겨우 그 정도로?
턱도 없는 소리. 그러다 버릇만 나빠지지.
“어때, 멋졌지?”
“턱 들지 말고, 팔꿈치 몸통에서 떼지 말고, 무리하게 잡아당기지 말고.”
“뭐?”
그냥 뒀다면 보나마나 신이 나서 타석에서도 흥분을 제어하지 못했겠지.
들뜬 안치욱의 마음을 사뿐히 눌러 주고 대기타석에 들어섰다.
요즘 들어 출루에 맛을 들린 리드오프 이창모 선배가 신중하게 공을 고르고 있었다.
타이탄스 용병 투수의 공이 코너 구석구석을 찔렀다.
하지만 끝까지 잘 참아낸 이창모 선배는 결국 1루로 진출했다.
상대 용병 투수가 못 던졌다기보다는 이창모 선배가 공을 잘 봤다고 봐야 한다. 타격감은 전성기에 비해 많이 죽었다지만 선구안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생각해보면 저 정도 선수조차 실패하고, 거기서 얻은 상처로 슬럼프에 빠지게 하는 게 바로 빅리그다.
미국에서 뛰던 시절, 그 높은 문턱 앞에서 좌절한 선수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주변에서 모두 떠 받들어주던, 세상 자기가 최고인줄 알던 루키가 마이너리그를 거쳐 메이저리그에 입성한다.
이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최고라고, 쉽게 볼 수 없는 재능의 소유자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메이저리그에 올라와보니 자신 같은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그들 중 몇은 자신이 감히 비교할 엄두조차 안 나는 괴물들이다.
그렇게 자존감이 박살이 나고 다시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나이를 먹어 간다. 그리고 어느새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진다. 그 순간 굳건했던 마음이 조금씩 꺾이기 시작한다.
나는 최고가 아니었구나, 특별한 선수가 아니었구나. 메이저리그에서는 나를 원치 않는구나.
그런 선수에게 한국이나 일본, 대만 같은 아시아 팀에서 손을 내민다. 많은 연봉을 줄테니 메이저리그의 꿈은 그만 접고 현실을 택하라고.
몇몇 선수들은 그 유혹을 뿌리치고 끝까지 메이저리거의 꿈을 향해 전진하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
돈을 벌기 위해, 단순히 직업인으로서 하는 그런 야구.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받은 만큼 일하는 건 노동의 기본이니까.
문제는 진짜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힘들다는 점이다.
그 이상,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불가능한 목표에 도전하려는 마음 없이는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지금 이창모 선배의 마음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나 역시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는 지금 자신이 만든 한계 앞에서 주춤거리며 망설이고 있는 건 아닐까?
배트를 바닥에 몇 번 툭툭 두드린 후 타석에 들어섰다.
지난 시범경기에서 이미 한 번 상대한 바 있는 용병투수가 눈을 치켜 뜨고 나를 노려본다.
흠.
그때도 저러다가 홈런을 맞아 놓고 기억력이 별로 안 좋은가본데.
“한수혁! 한수혁! 빠라바라빰빰빰! 한수혁!”
응원단 스피커에서 내 이름이 힘차게 울려 퍼진다. 새로 만들었다는 나만을 위한 응원가가 경기장에 메아리친다.
메이저리그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기분이다.
방금 전 이창모 선배 타석 때보다 데시벨이 훨씬 큰 것 같은데, 그저 느낌이겠지?
가만히 보니 응원단 속에 섞여 있던 민예린이라는 연예인이 안전망에 딱 붙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수혁아, 저번에 왜 그냥 갔냐, 형 섭섭했데이.”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갑자기 생겨서요.”
“그런 거지? 나 보기 싫어서 간 줄 알았지. 그럼 우리 수혁이 오늘도 좋은 공 하나 줘야겠네? 자, 한 가운데 패스트볼 하나 줄테니 앞으로 형하고 친하게 지내자.”
구재현 이 사람, 넉살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다.
시범경기에서 한 번 당하고도 또 트래시 토크를 시도한다고?
음, 그런데 이번에는 솔직히 헛갈린다.
저번에도 한가운데 준다고 하고 진짜 한가운데로 던진 이해할 수 없는 배터리다.
내가 방심하기를 기대하는 걸까? 역의 역으로 가는 뭐 그런 건가?
이창모 선배가 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지 시선을 줄곧 내게만 고정했던 용병 투수가 그 자세 그대로 투구 동작을 시작했다.
“자, 잘 보래이. 한가운데다.”
구재현 선배의 능글능글한 목소리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진짜? 설마 또 한 가운데?
그럴 리 없겠지만 그냥 스트라이크 하나 먹는다 치고 한 번 노려봐?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어라?
따아아아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