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10)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09화(310/412)
#309. 이런 게 야구라는 거야
– 아, 투수가 완전히 정신이 나갔네요. 저거 눈빛 보세요. 당장이라도 엄마 품에 안겨서 펑펑 울고 싶어 하는 표정이잖아요?
– 흠, 네, 위원님 말씀도 어느 정도 일리가……. 어쨌든 한수혁 선수가 2루 도루에 이어 순식간에 3루 도루까지 성공시키며 무사 주자 3루가 되었습니다.
한수혁의 볼넷과 연속 도루로 만들어진 무사 주자 3루 상황.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반쯤 넋이 나갔던 텍사스 투수가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타석에 선 타이 존슨은 생각했다.
팀의 위기 탈출을 위해 한수혁이 플레이스타일에 변화를 줬듯 자신 역시 조금은 바뀌어야 할 때가 왔다고.
그간 한수혁의 뒤에서 타점을 주워먹으며, 타이 존슨은 되도록 자신 타석에서 모든 걸 끝내려 노력했다. 그런 시도가 제대로 먹혀들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이어가고 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 성적보다는 한수혁에게 쏟아지는 견제를 파훼하는 것이 우선인 상황.
고의사구라는 치졸한 작전을 깨트리는 것이 남은 시즌 자신과 한수혁, 그리고 시애틀이라는 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타이 존슨이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고 투수를 노려보았다.
1회가 시작되자마자 무사 주자 3루 상황에 처한 투수가 선택할 수 있는 공은 그리 많지 않다.
얕은 땅볼, 혹은 플라이를 만들기 위한, 존 구석구석을 찌르는 공.
하지만,
따악!
불행히도 오늘 텍사스의 선발 투수는 그렉 매덕스가 아니었다.
타이 존슨의 배트가 바깥쪽 낮은 코스로 들어오는 공을 부드럽게 밀어 쳐 깊숙한 희생플라이를 만들어냈고, 3루에 있던 한수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홈으로 들어왔다.
손 쓸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스코어 1 대 0.
그리고 다시 본래 이 팀의 1번 타자이자 최근 일곱 경기 타율이 4할에 육박하는 데릭 플레밍이 타석에 들어섰다.
텍사스 선수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수비 이닝을 두 번 반복하는 기분이 들었다.
투수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 나왔다.
“Holy shit…….”
* * *
오늘 시애틀의 3번 타자로 출전한 데릭 플레밍.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 이후 오랜만에 3번 자리에 복귀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잘했다면, 그랬다면 한수혁에게 그렇게 고의사구가 집중되지는 않았을 텐데.
모두가 말했다.
네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최근 경기 타율과 출루율을 감안하면 제 몫 이상을 해내고 있다고.
맞는 말이다.
올스타에 선발된 기쁨 때문인지, 하반기가 시작된 후 데릭의 타격감은 절정에 달한 상태였다.
하지만 한수혁에게 쏟아지는 집중 견제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올 시즌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한수혁에게 밀려 리드오프로 서는 것에 불만을 가졌던 데릭은 이제 그 자리를 빼앗긴 것을 치욕으로 여기는,
시애틀의 진정한 톱타자로 거듭나 있었다.
한수혁의 볼넷과 연속 도루, 그리고 타이 존슨의 희생타로 1점을 선취한 상황.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당황한 상대 투수.
이럴 때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데릭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툭
– 아앗, 데릭 플레밍이 초구에 기습번트를 시도합니다. 투수, 아니, 3루수가 잡아서, 1루, 1루로 세이프! 세이프! 시애틀의 3번 타자가 기습번트로 살아나가며 1사 주자 1루 상황이 이어집니다.
– 멋진 번트였습니다. 지금 텍사스 투수는 제정신이 아닐 거거든요. 난데없이 한수혁 선수가 1번에 등장하질 않나, 고의사구로 내보냈더니 연속 도루를 하질 않나, 그걸로도 모자라 3번 타자가 초구에 기습번트, 캬, 제가 투수 해봐서 아는데요. 저럴 때는 그냥 은퇴하고 야구 아카데미나 차릴까 그런 생각밖에 안 듭니다. 뭐랄까, 인생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든다고 할까요?
3루 쪽 기습번트로 1루에 나간 데릭이 보호대와 장갑을 벗어 주루 코치에게 넘겼다. 그리고 장갑 전체가 손가락 구분 없이 통짜로 생긴, 마치 오븐장갑처럼 생긴 새까만 장갑 하나를 건네받았다.
바로 어제 경기까지만 해도 모양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착용을 거절했던, 베이스러닝 시 부상 방지를 위해 개발된 베이스 러닝용 장갑이었다.
“데릭! 넌 역시 최고의 리드오프야!”
“저놈들을 박살 내주라고!”
“겁쟁이 자식들, 무서워서 승부도 제대로 못 하는 놈들이 빅리거라고 거들먹거리다니.”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일방적인 응원을 업은 채 데릭이 리드폭을 잡기 시작했다.
파앙
“세이프!”
날카로운 1루 견제, 하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던 데릭의 손이 먼저 베이스를 짚었다.
실전 경기에서 처음 써보는 것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도움이 된다.
이 바보 같이 생긴, 얼핏 보면 주방에서나 쓸 것처럼 생긴 베이스 러닝용 장갑 말이다.
카메라에 잡힌 자신의 멋진 플레이 사진을 보는 걸 낙으로 삼고 있는 데릭이 이 장갑을 꼈다는 건 말 그대로 오늘 경기에 승리하기 위해 모든 걸 다 하겠다는 각오와도 같았다.
파앙
“세이프!”
또 한 번의 1루 견제,
보기에는 우습지만 손가락 부상을 방지한다는 면에서는 최고의 물건이다.
그 장갑을 믿고 과감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데릭,
투수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이어졌다.
– 아앗! 폭투! 여기서 폭투가 나왔습니다! 1루 주자 2루로, 2루로, 세이프! 살았어요! 1루 주자 데릭 플레밍이 2루까지 여유 있게 들어갑니다.
– 결국 투수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오네요. 저거 잘하는 거예요. 저대로 두면 정말 투수 멘탈이 박살 나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요.
– 시애틀의 1회말 공격이 길어지는군요. 지금쯤 텍사스 벤치에서는 한수혁 선수에게 볼넷을 준 걸 후회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 백 프로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이게 전부 다 한수혁 선수에 대한 고의사구에서 비롯된 나비효과거든요. 현 시점 리그 최강의 타자를 경기에서 배제시키겠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텍사스 감독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네요.
– 그게 뭔가요?
– 야구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한다는 것, 그렇기에 언제 어디서든 실수가 나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시애틀은 이제 한수혁의 원맨팀이 아니라는 것 말이죠.
* * *
“우우우!”
“또 거를 텐가, 이 겁쟁이들아! 어디 한번 해봐!”
“팀 이름을 바꿔! 레인저스 말고 비겁자들은 어때?”
2 대 0, 두 점 차로 앞선 시애틀의 2회말 공격.
9번 타자로 나선 조쉬 올리버의 안타로 1사 주자 1루 상황이 만들어졌고, 다시 한수혁이 타석에 들어섰다.
텍사스 투수의 시선이 덕아웃 쪽으로 향했고,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젠장, 날 그냥 좀 내버려두라고.’
오늘 선발로 등판한 텍사스의 투수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한수혁과의 승부를 절대 허락하지 않는 벤치, 그리고 경기 내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는 시애틀 팬들의 야유와 조롱.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얌전한 축에 속했던 시애틀 팬들이 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쨌든 두 점을 뒤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2회 말에 불과하다.
여기서 설사 한수혁에게 한 방을 맞는다 해도 석 점, 혹은 넉 점 차.
최근 물이 오른 텍사스의 공격력을 감안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무엇보다 목장을 운영하는 카우보이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마초라 자부하며 살아왔던 그는 더 이상 겁쟁이라는 야유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타자, 1루로.”
“젠장, 개자식들, 또 걸렀어!”
“그래, 이걸로 확실해졌어. 너희들은 비겁자이고 겁쟁이이며 거세당한 돼지 같은 놈들이야! 죽어! 죽어버리라고!”
또 한 번 자동고의사구가 요청되었고,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야유의 목소리가 더욱 강해졌다.
투수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덕아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와일드카드 획득을 목표로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감독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투수가 포수의 리드에 맞춰 다시 투구에 집중했다.
1사 주자 1, 2루 상황.
타석에는 커리어 하이를 찍을 기세인 베테랑 타이 존슨.
‘또 도망가라고?’
‘젠장, 나도 싫어. 하지만 벤치의 지시라고. 그냥 받아들여.’
‘빌어먹을!’
포수의 사인에서 벤치의 의중, 그러니까 또 한 번 도망가는 피칭을 하라는 지시를 전해 받은 투수가 얼굴을 붉히며 초구를 뿌렸다.
“볼.”
텍사스 감독의 의중은 확고했다.
지난 두 경기와 마찬가지로 한수혁, 그리고 여차할 경우 타이 존슨까지 두 타자를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생각.
절대 좋은 공을 주지 말라는 벤치의 지시에 따라 공 네 개가 연달아 존을 벗어났고, 결국 한수혁에 이어 타이 존슨까지 볼넷으로 출루하게 되었다.
1사 주자 만루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전 타석 기습번트로 출루했던 3번 데릭 플레밍이 타석에 들어섰다.
자신의 앞에 두 명의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낸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타석에 선 데릭 플레밍이 연거푸 큰 스윙을 하며 투수를 위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 텍사스의 선발 투수가 지난 시즌까지 데릭을 상대로 피안타율 0.211을 기록했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투수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데릭을 향해 초구를 던졌다.
툭
“어억!”
“홈! 아니, 1루! 젠장! 1루라고!”
투수와 3루수 사이로 절묘하게 굴러가는 또 한 번의 기습번트,
1루로 던지라는 베이스 코치의 외침을 듣지 못한 것인지 3루수가 공을 잡자마자 곧바로 홈을 향해 송구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세이프!”
“좋았어! 또 한 점!”
“데릭! 네가 최고야!”
두 타석 연속 기습번트를 성공시킨 데릭이 팬들을 향해 오른손을 쭉 들어 올려 보였다.
여기서 또 한 번 기습번트가 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투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함성으로 경기장 전체가 들썩거렸다.
3 대 0 석 점 차, 그리고 계속되는 1사 만루 위기.
따아아악!
다음 타자인 척 클락의 싹쓸이 2루타가 터진 순간, 텍사스의 선발 투수는 그대로 마운드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 * *
“그 쓸데없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두기로 한 건가?”
“…….”
“흠,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분명 여기 포수 마스크를 쓴 얼간이 하나가 앉아 있는데?”
“…….”
“심판, 아무래도 타임을 요청해야 할 것 같군요. 제 눈에 이상한 게 보이는 거 같아서 말이죠.”
“…젠장, 헛소리 그만해.”
“흠,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군. 그냥 비겁한 멍청이가 할 말을 잊은 거였어.”
“그만하라고. 우리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
“그래? 좋아, 그럼 너희들의 의지를 보여 봐. 일단 확인부터 하고 너희들을 뭐라 부를지 고민하도록 하지.”
데릭 플레밍의 기습번트와 척 클락의 싹쓸이 2루타가 터지며 6점째를 기록한 시애틀은 이어진 3회초 수비에서 1점을 내줬다.
경기 스코어 6 대 1.
이어진 3회 말 시애틀 공격,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한수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또 고의사구가 나올 것인가?
시애틀 팬들이 분노 어린 눈으로 텍사스 덕아웃 쪽을 노려보았고, 그것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오늘 경기를 포기한 것인지 자동고의사구 요청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야 정말 첫 번째 타석을 맞이하게 된 한수혁이 배트로 스파이크 끝을 툭툭 치며 투수를 바라보았다.
텍사스에서 심혈을 다해 키운다던 젊은 선발투수는 2회 만에 6점을 내주고 마운드에서 쫓겨났다.
한수혁은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텍사스의 구단주였다면 유망주의 앞길 대신 당장의 1승을 선택한 감독의 목을 날려버렸을 거라고.
그가 생각하기에 야구는 결국 감독이 아닌 선수가 하는 것이었다.
감독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주관대로 선수단을 움직여 당장의 1승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시즌 내내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선수들을 육성하고 발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덤덤한 눈빛으로 텍사스 덕아웃 쪽을 슬쩍 바라본 한수혁이 3회 말부터 마운드에 올라온 베테랑 투수의 초구를 그대로 받아쳤다.
따아아아아아악!
35도 각도로 치솟은 타구가 계속 날아가 경기장 중앙 전광판을 직격했다.
타석에 선 채 자신의 타구를 한참 동안 감상한 한수혁이 상대 포수를 향해 말했다.
“어때, 멋지지? 이런 게 바로 야구라는 거야. 애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