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1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11화(312/412)
#311. 노장은 살아 있다
“여보, 안 피곤해요? 좀 더 자지 그래요?”
“어? TV 소리 듣고 깬 거야? 볼륨 최대한 줄였는데도 들렸나 보네.”
“아뇨, 어차피 애 아침밥도 먹여야 하고, 깰 때 다 됐어요.”
“벌써 그렇게 됐나?”
서울 워리어스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영원한 캡틴 조성오의 집 거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한수혁의 경기 중계를 보던 조성오가 아내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살림에 애들 교육에, 최근에는 조성오의 은퇴 후를 대비하겠다며 뭔가를 배우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쁜 아내다.
그런 아내의 아침잠을 깨운 게 너무 미안하긴 했지만 오늘 경기만큼은 꼭 보고 싶었다.
KBO 시절 조성오에게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던 국가대표 에이스이자 메이저리그 진출 3년 만에 빅리그 팀의 에이스 자리를 꿰찬 역대 최고의 좌완투수 류한결.
그리고 그런 류한결의 활약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성적을 기록 중인 한수혁.
두 후배의 대결이 조성오의 아침잠을 깨워놓았다.
삐빅
리모컨을 집어든 조성오가 TV의 볼륨을 조금 더 낮췄다.
– 원아웃 주자 없는 가운데 2번 타자 한수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고동식 위원님, 지난 텍사스 3차전에서 한수혁 선수의 활약이 정말 대단했죠?
– 맞습니다. 텍사스의 자동고의사구 작전을 도루 2개로 박살 내버리고, 홈런까지 한 개 추가해 시즌 홈런이 52개가 되었죠? 완벽했던 하루였습니다.
– 자, 이쯤 되면 슬슬 단일시즌 홈런 신기록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위원님, 한수혁 선수의 홈런 페이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데이터를 보죠. 시애틀이 지금까지 113경기를 치렀으니 잔여 경기가 49게임. 단일시즌 홈런 신기록인 74개까지 남은 홈런이 22개. 좀 빡빡해 보이기는 하죠? 하지만 믿습니다. 전반기 보여줬던 신들린 페이스가 다시 살아나기만 한다면 저 정도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럼 한수혁 선수와 류한결 선수 간의 맞대결, 지금부터 함께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류한결 선수 와인드업, 초구! 볼, 바깥쪽으로 역회전하는 투심에 한수혁 선수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 얼마 전에 류한결 선수를 만났는데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 어떤 말을 하던가요?
– 아무래도 한수혁 선수 눈에 레이더가 달린 거 같다고요. 투심과 커터의 분간을 어렵게 하려고 일부러 포심의 구속을 낮춰서 던지는데 그걸 다 구분해낸다고 말이죠.
– 제가 선수 출신이 아니라 확실하게 체감은 가지 않지만, 아무튼 엄청나다는 말이군요?
– 맞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눈에 레이더 같은 게 달려 있을 리는 없고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한수혁 선수의 머릿속에서는 상대투수별, 상황별, 카운트별로 어떤 공이 들어올지를 예측하는 슈퍼컴퓨터가 가동되고 있다고 말이죠.
– 슈퍼컴퓨터라… 차라리 레이더 쪽이 더 현실성 있는 거 아닌가요?
– 그게 타자가 나이를 먹으면 신체 능력은 급감하는 대신 상황에 따른 투수의 볼 배합을 읽는 능력은 계속 늘어나거든요. 한마디로 경험이 쌓이는 거죠.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건 한수혁 선수가 이제 고작 프로 4년 차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치 수십 년 동안 야구를 해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준단 말이죠.
– 뭔가 듣기만 해도 대단하군요. 말씀드리는 순간, 류한결 선수가 던진 2구째 공이 몸 쪽 높은 곳으로 들어오며 볼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 류한결 선수의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 네, 방금 공은 정말 배트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공이었어요. 한수혁 선수도 한수혁 선수이지만 올 시즌 3점 초반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에인절스의 에이스 자리를 꿰찬 류한결 선수도 정말 대단합니다. KBO에서 뛰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좋은 투수가 됐어요.
한때, 조성오와 함께 KBO리그에서 뛰던 저 두 사람은 이제 자신이 절대 닿을 수 없는 경지에서 서로의 실력을 겨루고 있다.
문득 조성오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자신이 조금만 젊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들이 뛰고 있는 빅리그로 달려가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전성기를 기준으로 할 때 그 역시 KBO에서는 제법 쓸 만한 타자였지만, 그래도 빅리그에 진출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는 건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지금 이 감정은 주전에서 밀려나 대타로 팀에 공헌하고 있는, 은퇴를 목전에 앞둔 어느 베테랑의 쓸쓸하고 고독한 상상일 뿐인 거다.
– 스윙! 아! 이번 공은 정말 좋았죠? 존 한복판으로 들어오다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한수혁 선수가 헛스윙을 하고 맙니다. 어이가 없는지 한수혁 선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군요.
– 하하, 네, 바로 저 체인지업이 류한결 선수를 빅리그에서 경쟁할 수 있게 만들어준 최강의 무기죠. 단일 시즌 최다 홈런을 노리고 있는 한수혁 선수로서는 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정말 멋진 유인구였습니다.
류한결의 멋진 공에 조성오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저 말도 안 되는 체인지업에 얼마나 많은 삼진을 당했는지 새삼 그때의 악몽이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투수 류한결과 타자 이찬호,
어쩌면 대한민국 역대 투수와 타자 중 순수 실력만으로는 최고였을지도 모를 두 사람이건만,
한수혁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만년 2인자로 불리고 있다는 데 대해 약간의 동정심이 들었다.
조성오의 머릿속에 3년 전 한수혁을 처음 만났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야구를 더 잘할 수 있냐고 물은 자신을 무작정 어디론가 끌고 간 한수혁.
그의 개인 트레이너인 제이콥과 함께 죽어라 운동하며 몸을 만들던 기억.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한 대가로 끝내기 홈런을 날렸을 때의 그 짜릿했던 감동.
그 모든 게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시간이 흘러 자신은 이제 야구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 그의 아내가 말했다.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면 야구계를 완전히 떠나 좀 쉬는 게 어떻겠냐고.
그동안 자신이 바리스타 자격증이든 뭐든 따서 일을 시작할 테니 뭔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좀 쉬는 게 좋겠다고.
참 고마운 이야기이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전에서 밀려나 대타, 간혹 지명타자로 출장하며 후배들의 뒤를 받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조성오는 야구가 너무 즐겁다. 그라운드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런 자신이 과연 이 야구계를 떠날 수 있을까?
만약 코치 자리가 나지 않는다면 보조 트레이너로라도 취직해 계속 후배들과 함께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 류한결 선수, 신중한 표정으로 와인드업! 아! 쳤습니다! 한수혁 선수가 받아친 공이 좌측 담장, 좌측 담장, 좌측 담장을 넘어, 갑니다! 선제 솔로 홈런! 한수혁 선수가 팀의 첫 번째 득점을 홈런으로 만들어냅니다!
– 홈런을 친 한수혁 선수가 류한결 선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입니다. 아, 한국 출신 선후배들끼리 정말 보기 좋은 광경이네요. 물론 류한결 선수 입장에서는 끔찍할 수도 있겠지만요.
– 그러고 보면 한수혁 선수가 친한 선수들에게는 상당히 예의를 차리는 것 같습니다. 올 시즌 한수혁 선수에게 덤비다 박살이 난 선수들이 보면 좀 허탈할 수도 있겠어요. 아, 나도 한국인으로 태어날 걸 하고 말이죠.
– 오, 이제 박 아나운서도 제법 쓸 만한 농담을 할 수 있게 됐군요. 좋아요. 좀 더 노력하세요. 어쨌든 이로써 홈런 개수가 53개로 늘어났죠? 이제 21개 남았어요. 충분합니다. 할 수 있어요, 한수혁 선수!
딸깍
“어? 그만 보시게요, 여보? 왜요? 애도 일어났는데 소리 키우고 좀 더 보시지 않고.”
“아니, 나 바로 구장으로 나가보려고.”
“구장에요? 알았어요. 그럼 잠깐만요. 콩나물국만 덥히면 바로 식사할 수 있으니 한 술 뜨고 나가요.”
“그래, 고마워.”
한수혁의 홈런을 보는 순간 조성오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야성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잊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무작정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보다 그들과 경쟁해주는 것이 오히려 더 큰 힘이 될 거라는 걸.
후륵후륵
국에 밥을 말아 거의 마시다시피 하는 조성오의 마음은 벌써 잠실야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1회말 첫 번째 대결에서 불시에 솔로 홈런을 허용한 류한결은 생각했다.
‘이건 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 끔찍하잖여?’
최근 한수혁의 타격 페이스가 떨어졌다는 소식에 아주 조금은 안심을 했건만, 직접 상대해본 한수혁은 여전히 괴물이었다.
아니, 시즌 초반 대결했을 때보다 오히려 한 단계 더 진화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방금 전 홈런을 맞은 공은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될 공이었다.
세상에 몸 쪽 낮은 코스로 들어가다 더 깊은 곳으로 역회전하며 떨어지는 투심을 걷어 올려 관중석까지 날려버리다니.
3회말, 두 번째 타자 데릭 플레밍에게 볼넷을 허용한 후 또 한 번 한수혁과 대결하게 된 류한결이 작전을 변경했다.
슈웅
파앙
“볼.”
첫 타석에서 던진 공들이 존에 걸칠 듯 말 듯 들어왔다면 이제부터 던질 공들은 확실하게 존을 벗어나는, 내버려두면 볼이고 건드려봐야 파울밖에 나오지 않을 그런 공이 될 것이다.
슈웅
파앙
“볼.”
두 번 연속 존 밖으로 날아오는 공에 한수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류한결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너까지 이럴 거냐’ 비웃는 걸로 보였지만, 류한결은 거기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의 소속팀 LA 에인절스는 올 시즌 와일드카드 획득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그 와중에 자신을 믿고 자동고의사구를 요청하지 않은 것만 봐도 팀이 얼마나 자신을 존중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 차례다.
자신을 믿는 팀을 위해 약간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
류한결이 던진 공이 존 바깥쪽을 향해 맹렬히 파고 들었다.
하지만,
따악
홈런을 노리는 타자를 잡기 위해 던진 바깥쪽 낮은 코스의 유인구를 한수혁이 가볍게 밀어 쳤다.
1루에 있던 데릭 플레밍이 전력을 다해 질주, 3루까지 내달렸고 1루 베이스 위에선 한수혁이 손가락 두 개로 자신을 향해 장난스러운 경례를 했다.
“하아…….”
잊고 있었다.
한수혁 저놈이 자신만큼이나 팀의 승리에 진심인 놈이라는 걸,
홈런 신기록과 팀의 우승, 두 가지 선택지가 눈앞에 놓일 경우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할 놈이라는 걸,
고의사구를 주는 상대에게는 마치 복수라도 하듯 미친 듯이 도루를 해대는,
그렇다고 정면 승부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차선책으로 유인구를 던져 헛스윙을 유도하려 했더니 그 공을 욕심 없이 밀어쳐 안타로 만들어버리는 타자.
류한결은 생각했다.
만약 저놈이 시애틀에 계속 남아 있을 생각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빨리 저 팀으로 이적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