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1화(32/412)
#31. 역전, 그리고 또 역전
프로야구단의 단장으로 일한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나게 고달픈 일이다.
모기업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사장 놈에게 매일 조인트를 까이고, 밑으로는 야구에 대해 세상에서 자기들이 제일 잘 안다고 착각하는 팀장 놈들에게 시달리고.
어느 조직이나 그렇지만 위 아래로 골고루 눈치를 봐야 하는 직급은 항상 피곤한 법이다.
심지어 그 자리가 21세기 들어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한 어떤 팀의 단장이라면 더더욱.
부산 타이탄스 단장실, 한 남자가 맥 빠진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따아아아악!
– 아아! 이거 큽니다! 한수혁이 친 타구가 어마어마한 높이로 날아오릅니다. 가느냐, 가느냐, 가느냐, 넘어 갔습니다! 좌측 담장을 넘기는 한수혁의 투런 홈런! 올해 최고 유망주인 그가 데뷔 첫타석에서 홈런을 터뜨렸습니다! 이로서 서울 워리어스가 먼저 두 점을 앞서갑니다!
– 너무 성급한 승부였어요! 토마스 선수, 시범경기 때도 한수혁 선수에게 맞아 놓고, 또 한가운데 승부라뇨. 그나저나 이야… 맞는 순간에는 갸우뚱했는데 저게 담장을 넘기네요. 대단합니다!
⌞미친 ㅋㅋㅋ 저게 넘어가네
⌞꼴) 야 씨발 저건 반칙이지! 빗맞은 거 같은데 왜 저기까지 날아가냐
⌞꼴) 토마스 저 새끼 운다. 또 개막전에서 외국인 투수가 운다 ㅠㅠ
⌞꼴) 시작부터 혈압 터지네. 아니 거기서 왜 가운데 던지냐고!
⌞★★★ 한수혁 시즌 144홈런 페이스 ★★★
⌞와… 이게 몇 년 만의 신인왕이냐?
⌞나도 워빠지만 미쳤냐 ㅋㅋㅋ 이제 첫 타석인데 신인왕 각을 보다니
지난 시범경기 첫 타석에서 한수혁에게 어마어마한 홈런을 허용한 타이탄스의 용병 토마스 스펜서가 또다시 같은 타자에게 홈런을 허용했다.
아일랜드 계의 피가 섞여 있는지 하얗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한 토마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중계 카메라에 잡힌 그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흐른다.
나중에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구재현 같은 능구렁이가 한가운데 포심을 요구했을리는 없고, 저 세상 물정 모르는 용병 놈이 정면 승부를 고집했겠지.
“하아···”
인터넷 중계를 보고 있던 부산 타이탄스 안춘식 단장이 한숨을 푹 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 그래도 저 투수 구위는 좋아 보이는 듯. 부산이 용병 하나는 잘 데려옴
﹂꺼져 이 병신아. 너 꼴런트지?
﹂같은 타자한테 두 경기 연속 똑 같은 공 던져서 저런 좆같은 홈런을 맞았는데 구위는 좋다고?
﹂ㅆㅂ 그래도 봄에는 좀 잘해야 할 거 아냐, 응?
정곡을 찌르는 지적에 안춘식이 움찔하며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난 시즌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직전까지 갔던, 올해 스물여덟 살이 된 토마스 스펜서를 탐낸 국내 구단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포심 최고 구속은 150km/h 정도지만 회전수가 좋고 커맨드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선수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워리어스 박재철 단장 역시 탐을 냈지만 연봉 문제로 포기해야 했던 정말 좋은 투수다.
“하아아···”
한숨이 더욱 깊어진다.
용병 1년차 연봉 상한액인 100만 달러를 꽉 채우고 데려온 금쪽같은 용병이 한수혁에게 홈런을 얻어맞고 눈알이 돌아가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다.
설상가상 서울 워리어스의 마무리 투수 한진우를 데려오고 중고신인인 양기철을 내준 것에 대해 단장을 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억울하다. 그건 자신이 아닌 사장이 직접 추진한 트레이드였다.
한진우는 안 된다고, 어차피 데려와 봐야 못 쓴다고 그렇게 강하게 주장 했건만, 야구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낙하산 사장은 워리어스에서 수십억을 주고 잡은 선수이니 뭔가 있지 않겠냐며 자신의 말을 깨끗이 무시해버렸다.
그렇게 데려온 한진우는 시범경기에서 포크볼을 열심히 땅바닥에 처박으며 평균자책점 5.8을 기록한 후 2군으로 내려갔다.
반면 그 대가로 워리어스에 내준 양기철은 시범경기에서 6이닝을 등판해 단 2점만을 내주는 호투를 기록했고.
물론 시범경기는 시범경기일뿐이다. 정규시즌에서도 그 기조가 이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진우라는 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안춘식 단장으로서는 그가 부활할 거라는 기대 따위는 애초에 전혀 하지 않았다.
따아악!
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워리어스 3번 타자인 베테랑 조성오가 내야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가 포효했다.
저놈은 또 왜 저러는 걸까?
어지간한 일에는 잘 웃지도 않고, 감정 표현 자체를 극도로 자제하던 노장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저렇게 신인처럼 몸을 날려 댄다는 말인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워리어스가 작년과는 뭔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 * *
조성오 선배가 내야 안타로 만든 찬스는 다음 타자인 맥스 워커의 병살타로 무산되고 말았다.
주자 없는 투 아웃 상황에 등장한 안치욱은 뚝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억지로 퍼 올리다가 좌익수 플라이로 아웃.
“······”
맥스와 안치욱, 두 덩치 놈이 내 눈치를 슬슬 보며 수비 이닝을 준비했다.
결과는 좀 그랬지만 사실 과정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맥스가 친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간 건 그냥 불운이었고,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5번 타자라면 단타보다는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게 정석이니까.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당근이 아니라 채찍이겠지.
“수비라도 똑바로 해라.”
“…….”
빅리그 시절 나는 동료의 실수 하나를 그냥 넘기지 못하는 독불장군이었다.
저런 쉬운 타구를 대체 왜 놓치는 건지, 왜 저기서 저런 식으로 수비를 하는지.
플레이 하나하나에 태클을 거는 나를 선수들은 점점 멀리했고, 결국 나중에는 아무도 내 곁으로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화가 났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월드시리즈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주변 동료들을 마치 소모품처럼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대했다.
내 기준에 못 미치는 선수는 아예 선수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배움을 청하는 후배를 내 노하우를 훔치려는 도둑놈으로 치부했다.
그럼에도 나는 한 계단 한 계단 선수로서 성장했고, 사이영 상과 MVP를 따냈으며, 기어코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 허무했다. 너무나 그것을 원했음에도 막상 그 자리에 올랐을 때 함께 기뻐해줄 사람이 없었다.
“허리 좀 더 숙이고, 눈은 타자에게서 떼지 말고, 이리저리 한눈 팔지 말고, 우리 배터리의 다음 행동을 미리 예측하고, 야, 눈 떼지 말라니까?”
“어, 어···”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즐겁다.
개막전 선발이라는 긴장감에 몸이 굳고, 그 와중에 응원단 쪽에서 자기 이름이라도 나오면 자꾸 신경이 그리 가고, 우리 배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볼 여유조차 없는 이 풋내기에게 내 노하우를 하나하나 전수하는 과정이 미치도록 즐겁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는 건.
내가 예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인 걸까.
* * *
– 아앗! 구세준 선수가 과감한 슬라이딩으로 홈으로 파고들어 결국 점수를 만들어내고 맙니다! 스코어 6대 5! 9회초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에서 타이탄스의 역전 싹쓸이 2루타가 터졌습니다!
– 아··· 아쉽네요. 방금은 장덕수 선수의 실수였습니다. 좌익수의 송구를 받은 한수혁 선수가 홈으로 정확하게 공을 뿌렸거든요. 그런데 장덕수 선수가 몸을 뒤로 빼는 바람에 태그에 실패했어요. 아쉽네요. 동점으로 막을 수 있었는데요
– 아마··· 충돌을 피하려는 것이었겠죠?
– 네, 물론 포수가 공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주자의 정상적인 진루를 막아서면 절대 안 됩니다. 다만 지금은 주자의 주루와 상관없이 송구를 잘 받기만 했어도 자동으로 아웃이 되는 상황이었는데요. 장덕수 선수가 너무 몸을 사렸습니다
– 워리어스 응원석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아! 오늘 1회부터 계속 치어리더들과 함께 열정적인 응원을 이어온 가수 민예린 씨가 안전망을 붙잡고 통곡을 하고 있네요!
– 네? 아··· 정말이군요. 어쩜 우는 것도 저렇게 예쁘··· 아무튼 아쉽게 됐습니다. 오늘 한수혁 선수의 선제 홈런과 1타점 적시타 등을 묶어 5대 3으로 앞서던 워리어스가 결국 두 점차 승리를 지키지 못하고 역전을 허용하고 맙니다
﹂씨바, 내가 진짜 워리어스 포수 새끼들만 보면 열불이 치솟는다
﹂한 놈은 프로 8년차인 주제에 포크볼 하나도 제대로 못 잡고, 또 한 놈은 글러브만 가져다 대면 아웃인데 부딪힐까봐 엉덩이 빼다가 홈플레이트 내주고
﹂아 진짜 좆같아! 몇 년 만에 개막전 이기나 했더니 씹 이걸 못 막네
﹂ㅋㅋㅋ 애초에 최정수 저 제구레기를 마무리라고 올린 거부터가 미친거지
﹂그럼 어쩜. 쟤 말고는 아예 올릴 투수가 없는데?
﹂수혁아 미안하다 이런 좆같은 팀에 끌려오게 만들어서
뭐, 진실을 말하자면 내가 이 팀에 끌려온 게 아니라, 이 뭐 같은 팀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5대 3으로 앞서던 경기가 9회초 뒤집히고 말았다.
경기 전 우려했던 우리 팀의 약점들이 하나 둘 현실화되며 벌어진 참사였다.
마무리투수인 최정수 선배가 마운드에 올라오자마자 상대팀 8번 타자의 등판에 냅다 150km/h짜리 패스트볼을 꽂아 넣었다.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 마무리 투수가 빈볼을 던질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상대 타자는 화조차 내지 않고 1루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도루.
이창모 선배가 2루 커버를 잘 들어갔지만 상대 주자가 더 빨랐다. 아니, 애초에 최정수 선배가 견제를 소홀히 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렇게 무사 2루 주자가 되자 공이 빠른 것 외에는 장점이 하나도 없다고 불리는 최정수 선배가 마구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2루 주자는 포기하고 한 점 준다고 생각하는 게 나으련만 갑자기 2루 주자가 신경 쓰이는지 계속 견제를 해댔다.
포수인 장덕수 선배가 조금만 더 노련했다면 그런 투수를 진정시킬 수 있었을텐데 아쉽게도 주전보다는 백업에 익숙한 그에게 그런 여유까지 바라는 건 무리였다.
보다 못한 벤치에서 투수코치가 나와 최정수 선배를 진정시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멘탈이 와장창 깨져버린 투수가 한가운데 포심을 던져버렸고 타자가 그걸 제대로 받아쳤다.
총알 같은 타구가 안치욱의 옆으로 날아갔다.
깜짝 놀란 안치욱이 글러브를 가져다 댔지만 완전히 포구하지 못한 타구가 상대팀 덕아웃 쪽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만약 내가 잽싸게 커버를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대로 한 점을 줬을 법한 상황이었다.
무사 2, 3루.
계속되는 위기에 투수와 포수, 그리고 3루수까지 얼어붙어버렸다.
이어진 또 한 번의 볼넷, 결국 베이스에 주자가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대참사가 벌어졌다.
따아아악!
상대 용병 타자의 타구가 좌익수 옆을 가르며 3루 주자와 2루 주자가 여유있게 홈인, 1루 주자까지 홈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고, 중계에 나선 내가 홈을 향해 정확한 송구를 뿌렸지만.
“세이프!”
그냥 글러브만 가져다 대면 아웃시킬 수 있는 코스로 송구가 들어갔건만 상대의 기세에 밀린 장덕수 선배가 엉덩이를 뒤로 쭉 빼는 사이 주자가 그림 같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면서 결국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
···속이 터질 것만 같다.
안치욱의 실수는 충분히 예상했다.
9라운드에 뽑은 신인을 중심타선에 박아 놓고 팀 사정 때문에 주전 3루수까지 시키면서 아무 실수도 안 하리라 기대 하면 그건 진짜 양심 없는 짓이지.
우리 팀 새로운 마무리 최정수 선배의 저런 모습도 예측 범위에 들어 있었다.
공 빠르기와 구위에 비해 멘탈이 약하고 제구가 안 좋은 투수인 만큼 주자 만루가 되는 순간 이미 결과는 예상된 것이었다.
하지만 장덕수 선배만큼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송구만 받아냈으면 동점으로 끝낼 수 있었을텐데 거기서 왜 몸을 뒤로 뺀다는 말인가?
상대와 부딪히는 게 싫어서? 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프로야구 포수를?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경기가 끝난 후 저 사람과 결판을 지어야 하겠다는 그런 생각.
후··· 그래, 일단은 이 경기를 다시 가져오는 것에만 집중하자.
* * *
“한수혁! 제발!”
“한 방만, 제발 한 방만!”
관중석 이곳저곳에서 진심이 가득 담긴 애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팬의 입장으로 저 자리에 앉아 있어봐서 안다.
응원하는 팀이 경기 내내 앞서다가 9회 역전을 허용하는 건 팬들에게 있어서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다.
5대 3으로 앞서 가던 경기가 순식간에 5대 6으로 뒤집혔다.
그리고 이어진 9회말 워리어스의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
타자 둘이 차례로 삼진을 당하며 투아웃이 되는 순간 워리어스 팬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늘 경기 내내 떠들썩하게 서로를 격려하던 워리어스 덕아웃조차 침묵에 잠겼다.
그런데 그 때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9번 타자 유인철이 몸에 맞는 공을 얻어내 출루했다.
모두가 대타를 쓰리라 예상했건만, 1년차 신인을 그대로 밀어 부친 이대준 감독의 승리다.
“신중하게! 서두르지 말고!”
다른 건 몰라도 주력 하나만큼은 팀에서 탑을 다투는 유인철이 1루로 진출했다.
정규시즌 개막전에 선발출장한 것으로도 모자라 9회말 마지막 공격에서 동점 주자로 출루하게 된 유인철은 혼신을 다해 상대 투수의 신경을 긁기 시작했다.
결국 주자의 기세에 말려든 타이탄스의 마무리 투수가 이창모 선배에게 볼넷을 내주고 말았다.
6대 5 한 점차, 투 아웃 주자 1, 2루.
재역전의 냄새가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내가 대기타석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경기장에 관중석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타이탄스의 투수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와 한참을 떠들다 내려갔다.
결과는 자동고의사구.
“우~”
“씨발 신인한테 쫄아서 승부도 못하는 게 마무리 투수냐?”
“비겁한 놈들아!”
이창모 선배가 걸어 나갔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다.
2사 주자 1, 2루에서 굳이 나와 승부할 이유도 없거니와, 내 다음 타자인 조성오 선배가 지난 시즌 저 타이탄스 투수와 12번 상대해 단 한 번도 1루에 출루하지 못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야말로 천적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그런 관계.
주자가 가득 들어찬 상황에서도 투수의 얼굴에는 여유가 흘러 넘쳤고, 오히려 조성오 선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선배님!”
“···?”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내가 1루 베이스 위에서 크게 소리쳤다.
긴장감과 부담감으로 하얗게 질려 있던 조성오 선배의 얼굴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빈 손으로 크게 스윙을 하는 시늉을 하며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쳤다.
“잊지 마세요!”
관중들의 환호성에 휩싸여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성오 선배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는 것이 멀리서도 확연하게 보였다.
“이봐, 루키가 너무 건방지군.”
“닥쳐. 불만 있으면 경기 끝나고 따로 찾아오든지.”
“그만, 둘 다 거기서 더 이상 나가면 퇴장이야.”
타이탄스 용병 1루수가 되도 않는 으름장을 놓길래 맞받아쳤더니 주심이 우리 둘에게 나란히 경고를 줬다.
상관없다.
끄덕
조성오 선배가 내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 알아들은 거다.
서른 다섯의 나이에 매일 시범경기가 끝난 후 2시간씩 이어진 추가 훈련.
조성오라는 베테랑 야구 선수가 자신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나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천적? 그래, 그런 게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조성오 선배는 이미 지난해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겁먹을 필요 없다.
1루에서 있었던 작은 소란이 정리되고 다시 타이탄스의 마무리 투수가 투구 준비에 들어갔다.
만원 관중이 꽉 들어찬 잠실야구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슈우웅
지난 시즌까지 조성오 선배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위력적인 포심이 몸쪽 꽉 찬 코스로 파고든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배트가 힘차게 돌았다.
따아아아악!
공이 쪼개지는 듯한 파열음이 들렸다.
배트 중앙에 제대로 맞은 타구가 손쓸 사이도 없이 그대로 빨래줄처럼 날아간다.
멀리, 아주 멀리.
콰앙!
그리고는 그대로 관중석 중단을 직격해버렸다.
“와아아!”
“캡틴!”
“조성오! 조성오! 조성오!”
워리어스 관중석에서 찢어질 듯한 함성이, 그리고 타이탄스 관중석에서는 진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타구를 바라보던 노장이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를 훔치며 천천히 1루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개막전 끝내기 만루 홈런.
어쩌면 조성오라는 야구선수의 인생에 찬란하게 기록될 역사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눈물로도 모자라 콧물까지 흘리는 노장의 얼굴을 향해 경기장 내 모든 카메라가 집중되었다.
하지만 지금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웃기다거나 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혁아! 고맙다! 내가, 내가!”
고함을 지르며 1루로 달려오는 그에게 한 번 웃어준 후 나 역시 2루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은 베테랑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감상에 젖어든다.
언제나 난 내가 팀의 중심이라 생각했다.
아니, 팀의 중심이 아닌 걸 도저히 받아들이질 못했다.
언제나 나만이 홀로 빛나야 했고, 최고의 자리에 서 있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런 내가 다른 선수의 플레이를 보며 멋지다는 생각을 해본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젠장.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짓을 해왔지만 여전히 나는 야구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듯하다.
<여러분! 우리 워리어스 선수단에게 다시 한 번 힘찬 박수와 함성을!>
“와아아아아!”
하지만 괜찮다.
지난 삶에서 줄곧 내 앞길을 가로 막고 훼방 놓던 시간이라는 존재가 이번에는 내 편이니까.
나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애송이일 뿐이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