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2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20화(321/412)
#320. 한걸음 더
시애틀의 5선발, 1선발, 2선발, 3선발이 차례로 등판하는 이번 4연전.
어쩌면 시카고 화이트삭스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기회는 디몬 앤더슨 주니어가 등판했던 첫 번째 경기였을지도 모른다.
그 경기에서 한수혁에게 자동고의사구 작전을 사용하며 패망한, 그리고 이어진 2차전에서 라이언 티보우의 구위에 눌려 멸망한 화이트삭스가 이번에는 실질적인 시애틀의 에이스 한수혁을 상대하게 되었다.
└ …Fuck!
└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진 기분이 드는군.
└ 20번 등판에 16승, 평균자책점 0.47… 대체 뭐지? 이 정신 나간 기록은?
└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난 타자 한수혁보다 투수 한수혁이 훨씬 무서워. 올 시즌 최다 실점이 고작 2실점이야. 제일 못 던진 게 9이닝 2실점이라고, 이게 대체 말이 돼?
└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저 멍청이 같은 놈들을 다 팔아서 한수혁을 데려왔어야 했어.
└ 이봐, 한수혁을 데려오려면 타이 존슨부터 영입했어야 했는데 저 스크루지 같은 우리 구단주가 과연 그걸 허락했을까? 어차피 현실성 없는 얘기야.
└ 다시 생각하니 정말 시애틀 저놈들이 제정신이 아니었군. 아니, 한수혁이 올지 말지 확실치도 않은 상황에서 타이 존슨하고 장기계약을 맺은 거 아냐? 그러다가 한수혁 놓치고 타이 존슨은 노쇠화로 그대로 드러누으면 어쩌려고?
└ 그런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네가 소시민이라는 거야. 인생에서 승자가 되려면 시애틀 같이 과감한 배팅을 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 됐고, 오늘은 그냥 경기 안 보고 나가서 딸이랑 놀아줘야겠어. 젠장, 빌어먹을 베이스볼.
* * *
“좋아, 한, 오늘은 딱 2개만 치라고. 그럼 애런 저지 그놈 기록하고 타이야.”
“데릭, 네 임무가 막중해. 저놈들이 또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려면 1회 첫 공격에서 네가 꼭 살아나가야 한다고.”
“당연하지. 오늘 전 타석 출루를 기대해도 좋아. 난 출루왕 데릭 플레밍이니까.”
경기가 시작되기 전 라커룸, 날 둘러싼 선수들이 어떻게든 홈런을 치라며 난리법석을 피워댔다.
뭐, 칠 수 있다면 당연히 치는 게 좋겠지만 너무 거기에만 매몰되다 보면 다른 것을 망칠 수도 있다.
특히나 오늘처럼 선발로 등판하는 날에는 더더욱.
슬럼프에 빠지지 않고, 기복 없이 꾸준한 기량을 이어가기 위해 명심해야 할 건 작게는 해당 경기, 크게는 시즌 전체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최근 우리 팀의 흐름은 최고조, 그리고 팀 주변을 둘러싼 리그의 흐름 역시 우리에게 매우 유리하다.
이럴 때는 욕심을 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해나가면 된다.
“자, 오늘 라인업이다.”
감독실에 한참 틀어박혀 있던 벤자민 감독이 라커룸 벽에 라인업 용지를 붙여놓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마 현 시점에서 가장 큰 희열과 스트레스를 동시에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벤자민일 것이다.
감독 데뷔 첫 해, 시애틀을 사상 첫 월드시리즈로 데려간 감독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 팀의 우승을 꿈꾸며 팀을 지켜왔던 라이언 티보우 같은 중견급 선수들, 그리고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해온 신인급 선수들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늘 내 어깨에 기대 있다.
선발투수로 나선다는 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꿈과 기대를 떠안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부담스럽고,
또한 그래서 즐겁다.
감독이 붙여 놓은 라인업 용지를 살펴보았다.
1번 중견수 데릭 플레밍
2번 투수 한수혁
3번 1루수 타이 존슨
4번 우익수 척 클락
5번 좌익수 짐 브라운
6번 3루수 리암 랜드먼
7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
8번 포수 레너드 존스
9번 2루수 조나단 오웬스
언제나 그렇지만 내가 선발로 나서는 날에는 이 팀에서 나와 타이 다음으로 홈런을 많이 친 지명타자 토니가 라인업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브루스의 체력 관리를 위해 출장 횟수를 높여가고 있는 백업포수 레너드 존스가 라인업에 포함되기도 한다.
득점 생산력 면에서 적지 않은 패널티를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완벽한 상황 같은 건 없는 거니까.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할 수 있는 최선의 투구를 선보이는 것이 선발투수다.
그리고 나는 이 리그 전체에서 그걸 가장 잘하는 사람 중 하나다.
* * *
1회초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선공,
오늘도 역시 하얀 양말 군단의 리드오프로 나선 일본인 유격수 하마사키 아키노리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면 부족 때문이었다.
어제 밤새도록 울린 SNS 알람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다.
NPB 역대 최고의 유격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그리고 신시내티에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고, 그 기량을 인정받아 화이트삭스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하마사키 아키노리.
그런 하마사키의 SNS가 얼마 전부터 욕설과 조롱으로 도배되고 있다.
욕설을 하는 쪽은 일본의 야구팬들이었다.
한수혁이 저렇게 날아다니는데 넌 대체 뭘 하는 거냐, 어제 그 머저리 같은 스윙은 대체 뭐냐, 넌 일본인의 수치이고 망신이다 등등 다채로운 욕들이 그의 SNS를 가득 메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국 시애틀 팬들과 한국 야구팬들이 연합해 하마사키의 자존심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전날 일본 우익신문에서 보도한 한수혁과 하마사키 자신 간의 비교 기사가 원인이었다.
그걸 본 시애틀 팬들과 한수혁의 팬들이 몰려들어 하마사키를 조롱하느라 그의 SNS 알림은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스마트폰을 끄고 잠들었으면 좋았으련만,
한 번 신경을 쓰다 보니 알림이 울릴 때마다 자꾸 확인하게 되었다.
악플이란 게 원래 그래서 무서운 법이다.
안 좋은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보게 되고, 거기에 긁혀 내상을 입게 되는,
“플레이!”
어쨌든,
그건 그거고 승부는 승부다.
아무리 한수혁이 괴물 같은 놈이라고 해도 무적은 아니다.
아직 선발로 등판한 경기에서 패배한 적은 없지만,
젠장, 다시 생각해보니 무적일지도 모르겠다.
선발투수가 시즌 내내 패배 한 번을 당하지 않다니, 그게 대체 말이 되는가?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과 한 시대를 살게 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하마사키가 배트그립을 꽉 움켜쥐었다.
그간 저놈에게 몇 번 당해봐서 안다.
한수혁의 가장 큰 장점은 구속이나 구위가 아닌 제구력이다.
야구만화 같은 데서나 보던, 혹은 그렉 매덕스 같은 괴물들이 구사했다던 9분할 제구가 가능한 놈이 바로 한수혁이다.
그렇기에 공을 오래 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놈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가져가는 게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다.
한 가지 구종을 선택하고 그것만을 노린다.
과연 어떤 공이 초구로 들어올까?
107마일에 달하는 말도 안 되는 포심?
그 포심과 거의 구속 차가 나지 않는 하드싱커?
누가 반대편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는 고속 슬라이더?
포심처럼 들어오다 바닥에 패대기치듯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
‘젠장…….’
너무나 많은 선택지 앞에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 많은 구종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괴물 중의 괴물.
입술을 꽉 깨문 하마사키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포심 구속에 배트 타이밍을 맞추고 변형 패스트볼이 들어올 경우 커트하는 것이 하마사키가 내린 가장 현실성 있는 판단이었다.
스르륵
언제 봐도 끔찍할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투구폼이다.
자기도 모르게 잠깐 넋을 놓았던 하마사키가 마음속으로 카운트를 세며 스윙을 시작했다.
“하나, 둘, 타합… 컥!”
부웅
“스윙!”
하지만 하마사키의 배트는 한수혁의 공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70마일 슬로우커브를 던진 한수혁이 씨익 웃으며 하마사키를 바라보았다.
* * *
따아악!
“아웃!”
“아, 젠장, 아까웠어!”
“저걸 잡다니, 빌어먹을 자식! 지옥으로 떨어져라!”
오늘 전 타석 출루를 자신했던 데릭 플레밍의 약속이 불과 첫 타석 만에 산산이 깨어졌다.
1루 베이스 옆으로 빠져나가는 강한 타구를 걷어내 아웃으로 연결한 화이트삭스의 주장 액토르 마르티네스가 동료들을 큰 목소리로 동료들을 격려했다.
“좋아, 일단 하나! 다들 기죽지 마!”
타이 존슨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 역시 나름의 커리어를 쌓아온 화이트삭스의 간판선수이자 주장이다.
그의 독려에 화이트삭스 선수들의 얼굴에 아주 약간의 자신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2번 타자 피처 한수혁]이어진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다시 그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괴물의 타석이 돌아왔다.
대기타석에 서 있던 한수혁이 좌우로 목을 드드득 꺾으며 타석을 향해 걸어 나왔다.
마운드 위에 선 투수는 생각했다.
‘신이시여, 제가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오늘 경기 전 화이트삭스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벤치에서 자동고의사구를 요청할 일은 없을 거라고. 다만 경기 상황에 따라 고의사구를 주게 될 수는 있을 거라고.
감독과 코치가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아무 미동도 없었다.
원아웃 주자 없는 상황, 배터리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뜻이었다.
원래 저 감독이 벤치에서 사인을 내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책임을 지기 싫다는 거겠지…….’
양팀 팬들뿐만 아니라 한수혁의 홈런 기록 때문에 전미 야구팬들의 관심이 집중된 경기에서 굳이 감독 자신이 뭔가를 책임질 거리를 안 만들려는 것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었다.
짜증이 왈칵 솟구친 투수가 포수를 향해 사인을 보냈다.
‘거르자.’
‘좋아.’
감독이 책임지지 않겠다면 자신 역시 책임지지 않는다.
여기서 승부를 하다 얻어맞으면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역대 8위 기록 타이를 내준 얼간이 투수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어차피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이니만큼 거른다.
파앙
“볼.”
“주우우우우우우우욱어! 개자식아!”
“빌어먹을 개자식! 넌 오늘 살아서 이 구장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다!”
“내가 홈런볼을 잡지 못하면 그건 다 네 잘못이야! 넌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고!”
“승부를 해!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고 보란 듯이 얻어맞으란 말이야!”
고작 볼 하나를 던졌을 뿐이다.
고의성이 보이긴 했지만 그래 봐야 볼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고작 그 공 하나에 투수가 평생 들어본 욕을 다 합쳐도 모자랄 듯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투수의 시선이 포수를 거쳐 다시 덕아웃으로 향했다.
그제야 투수는 왜 감독이 자동고의사구 요청을 내지 않았는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엄청난 악의와 비난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두려워했던 거다.
‘어차피 거르기를 원하면서 그 책임을 지긴 싫다니, 비겁한 인간 같으니…….’
마음속으로 감독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어준 투수가 포수를 향해 사인을 보냈다.
‘어쩔 수 없지. 승부하는 척하면서 공이 빠진 것처럼 보이게.’
‘좋은 생각이야, 친구.’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친 배터리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록도 기록이지만 연패를 끊으려면 이 녀석과 승부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걸러야 할 거면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유인구처럼 보이도록 조심하며.
한숨을 푹 내쉰 투수가 천천히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제발 더 이상의 비난은 없길 바라며, 그리고 정말 운이 좋으면 저 괴물이 이 공에 헛스윙을 해주길 바라며,
가장 자신 있는 변화구인 커브를 바깥쪽 가장 낮은 코스를 향해 뿌렸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변화를 일으키며 땅바닥에 그대로 처박히는 공,
자신의 의도대로 공이 들어간 것에 투수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려던 그때,
따아아아아악!
“커헉!”
한수혁이 원바운드된 공을 그대로 후려쳐버렸다.
이번에는 우측이었다.
한수혁이 친 타구가 날아가는 방향, 우측 관중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나비 채와 글러브를 들고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홈런임을 직감한 우익수가 그 자리에 멈춰 섰고, 한수혁은 여느 때처럼 배트를 지팡이처럼 짚은 채 자신이 만든 타구를 감상했다.
그렇게 날아간 타구가 결국 우측 펜스를 넘어 관중석 중단에 떨어졌다.
아니, 떨어질 뻔했으나 누군가 나비 채로 낚아챘다.
얼굴에 주근깨가 잔뜩 박힌 소년이었다.
“와아아아!”
“젠장, 또 놓쳤어! 역시 그 2단 나비 채가 필요해!”
“그건 대체 어디서 파는 거야!”
홈런볼을 잡은 소년이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축해해 주었다.
시즌 61호 홈런,
한수혁의 홈런 랭킹이 9위에서 8위로, 또 한 계단 상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