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23)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22화(323/412)
#322. 도망가지 마
1911년 4월 20일 개장해 올해로 119년이 된,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구장인 펜웨이파크.
오늘, 시애틀과의 시즌 마지막 3연전을 앞둔 펜웨이파크 주변이 경기 시작 5시간 전부터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였다.
“젠장, 그 얘기 들었어? 어떤 머저리가 인터넷에 그린몬스터를 폭파해 버리겠다고 글을 올렸다가 FBI에 잡혀갔다더군.”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린몬스터 때문에 홈런이 안 나올 수도 있다고, 그래서 폭파해 버리겠다고 지껄였다는군. 웃긴 건 그놈이 시애틀 팬도 아니었다는 거야. 여기 주변을 봐. 온통 나비 채를 든 머저리들뿐이잖아. 저런 놈들 중 하나였던 거지.”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 저 많은 인간들이 홈런볼 하나 잡아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지난 8번의 경기 동안 침묵한 한수혁의 홈런포.
시즌 61호를 끝으로 잠시 가동을 멈춘 한수혁의 홈런포가 이번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재개되지 않을까, 기대감에 부푼 야구팬들이 글러브와 나비 채를 들고 펜웨이파크로 몰려들었다.
지난 2003년부터 시작해 2013년까지 기록된 820경기 연속 매진이라는 엄청난 대기록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보스턴 팬들의 야구에 대한 사랑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다가올 포스트시즌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은 서부지구 1위 시애틀과의 혈전.
그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던 보스턴 팬들이 티켓 창구 앞에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젠장, 대체 컵스 팬 놈이 왜 이 경기를 보려고 하는 거냐고!”
“저기 봐. 밀워키 저지를 입은 놈도 있어.”
“정신 나간 놈들 때문에 우리 경기를 볼 수 없다니! 표! 표를 달라고!”
올 시즌 한수혁이 때려낸 홈런 중 대략 절반가량이 좌중간 펜스를 넘어갔다.
그리고 펜웨이파크의 좌중간에는 높이 11.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 그린몬스터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 경기에서 가장 가격이 비싼 자리는 바로 그 그린몬스터 위 몇 안 되는 좌석들이었다.
“이 암표장사꾼이 대체 뭐라는 거야! 뭐? 얼마를 달라고? 3천? 3처어어언?”
“저 개자식을 죽여! 죽여버리라고!”
어떻게든 경기장에 입장하려는 보스턴 팬들, 이에 맞서 북서부 끝에서 동부까지 원정 온 시애틀 팬들, 그리고 한수혁의 홈런 볼을 잡기 위해 몰려든 전국의 야구팬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가운데 시애틀과 보스턴의 시즌 마지막 3연전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잘 들어. 현재 페이스대로 간다면 챔피언십에서 만날 수도 있는 놈들이다. 절대 밀리면 안 돼. 당연한 말이지만 보스턴 놈들 역시 이번 3연전에 모든 걸 걸 거다. 그렇기에 나는 이길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라인업을 준비했다. 누군가는 불만을 가질지도 몰라. 하지만 상관없다. 이번 3연전에서는 나를 믿고 따라다오.”
“알겠습니다, 감독님!”
“좋아, 그럼 라인업 확인하고 잠시 후에 그라운드에서 보자.”
감독의 말대로였다.
현재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에서 양키스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는 현재 페이스를 유지할 경우 아메리칸 리그 와일드카드 1순위가 유력한 팀이다.
대진표상 디비전 시리즈에서 붙을 일은 없겠지만, 만약 보스턴이 양키스를 꺾는다면 챔피언십에서 우리와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시즌 종료까지 불과 31경기만이 남은 시점에서 중요하지 않은 경기가 있겠냐만은 특히나 가을야구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은 팀들하고 상대할 때는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야구에서 기선제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거니까.
“라이언, 별 문제는 없는 거지?”
“네, 타이. 아주 좋아요. 더할 나위 없이.”
“좋아. 저 극성맞은 보스턴 놈들의 기세에 밀리지 말라고.”
“물론이죠. 하야시에게 배운 명상이 큰 힘이 되고 있어요.”
“흠, 효과가 좀 있긴 한가?”
“확실히요. 뭐랄까, 욕설과 야유를 보내는 놈들을 보면서 이렇게 상상하는 거죠. 저건 사람이 아니다. 감자나 배추 같은 뭐, 그런 물체 같은 거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다. 들리지 않는다. 이런 식의 암시랄까?”
“그게 뭐야? 흐흐, 그러다 자칫하면 열반에 들겠군.”
이번 3연전에는 라이언과 나, 마이크, 이렇게 우리 팀의 1, 2, 3선발이 차례로 등판한다.
공교롭게도 보스턴 역시 1선발인 알렉스 데이비스를 시작으로 2선발 라파엘 실바, 3선발 브라이언 베일리 등 최고의 투수들이 등판할 예정이다.
말 그대로 총력전이다.
벽으로 다가가 감독이 붙여 놓은 라인업을 확인했다.
1번 3루수 한수혁
2번 1루수 타이 존슨
3번 중견수 데릭 플레밍
4번 우익수 척 클락
5번 지명타자 안토니오 가르시아
6번 좌익수 짐 브라운
7번 포수 브루스 매튜스
8번 2루수 리암 랜드먼
9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
투수 라이언 티보우
이기기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는, 리그 최고의 포수 제리 와그너를 의식해서인지 감독은 오늘 나를 1번으로 배치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아니, 어쩌면 홈런 기록을 세우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뭐가 어찌 되었든 나는 오늘 홈런 기록과 팀 승리, 둘 중 어느 것 하나 포기할 마음이 없다.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 된다.
* * *
“알렉스, 잘 알겠지만 좋은 공은 절대 안 돼요. 절대.”
“알아, 내가 그렇게 정신 나간 놈은 아니잖아.”
“아뇨, 당신 정신 나간 거 맞아요. 좀만 수틀리면 곧바로 존 한복판에 포심을 꽂아 넣을 거란 걸 말이죠.”
“흐흐, 들킨 건가.”
“젠장, 평소 같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버려두겠지만… 알잖아요? 저놈은 진짜 위험해요.”
“좋아, 명심하도록 하지. 잔소리 그만하고 돌아가서 공 받을 준비나 해.”
“약속한 겁니다? 그럼 믿고 돌아가요?”
1회초 시애틀의 공격, 마운드 위로 올라간 보스턴의 포수 제리 와그너가 인상을 쓴 채 홈플레이트로 돌아왔다.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2위를 달리고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 그리고 서부 지구 1위를 질주 중인 시애틀 매리너스.
두 팀의 1, 2, 3선발이 맞붙는 이번 3연전은 보스턴에게도 상당히 중요했다.
만에 하나, 이번 3연전에서 스윕이라도 당한다면 서부 지구 2위를 달리고 있는 오클랜드에 승률이 뒤지는 최악의 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생각하면 순위는 한 단계라도 높은 게 좋다.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진 보스턴의 야전사령관 제리 와그너가 자리에 앉아 포구 자세를 취했다.
“승부해! 승부하라고!”
“도망가면 죽여 버릴 거다! 무조건 승부해!”
“양키스를 넘어서고 싶다며? 그럼 좀 더 근성을 보여 봐! 사나이의 모습을 보여주라고!”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정도의 고함과 야유가 쏟아진다.
이쯤 되면 이곳이 홈구장인지 원정구장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3루 측 한 구석에 모여 있는 시애틀 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기저기 다른 유니폼을 입은 다국적 연합군들이 보스턴 선수들을 향해 야유를 보내고 있다.
저들의 목적은 단 하나, 한수혁의 홈런을 보는 것,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걸 잡아내는 것.
하지만,
제리 와그너는 절대 한수혁과 승부를 벌일 생각이 없었다.
오늘 보스턴의 감독은 제리에게 볼 배합과 관련된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가끔 데이터에 따라 참고할 수 있는 사인이 나오긴 하겠지만 최종 결정은 배터리가 알아서 하라는, 상당히 파격적인 지시였다.
물론 거기에는 오늘 마운드에 선 투수가 이 팀의 최고참 중 하나이자 사이 영 상 4회 수상에 빛나는 베테랑 알렉스 데이비스라는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볼 배합에 대한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상 제리는 절대 한수혁에게 좋은 공을 줄 생각이 없었다.
홈런 기록? 그런 건 상관없다.
만약 신기록을 허용한 배터리의 이름에 자신이 올라간다 해도 제리는 그런 것에는 콧방귀도 안 뀔 인간이었다.
그는 그저 지는 게 싫을 뿐이다.
한수혁에게 승부를 벌였다가 홈런을 내줄 확률이 그를 걸어 내보내고 다음 타자에게 추가타를 맞는 것보다 더 높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1번 타자 서드베이스맨 한수혁]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드디어 그 징글징글한 괴물이 타석에 들어섰다.
시즌 초반에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보면 볼수록 기가 질리는 인간이다.
시즌이 종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가운데 타율이 4할 2푼이라니.
오늘 보스턴의 선수들, 그리고 팬들이 더욱 흥분한 건 만약 한수혁이 현재 페이스를 그래도 유지할 경우 이 팀의 레전드인 테드 윌리암스가 갖고 있는 이 시대 마지막 4할 타자라는 타이틀을 빼앗기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봐, 한, 잘 지냈지?”
“그럭저럭 먹고는 살았지.”
“오! 오늘은 내 말에 대답을 하는군.”
“내가 사교성이 아주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
“좋아, 그런 의미에서 초구 헛스윙 한 번 부탁해.”
“헛소리를 아주 정성스럽게 하는 경향이 있군.”
“뭐라 말해도 상관없어. 네가 헛스윙만 해줄 수 있다면. 그럼 내 부탁 들어줄 거지, 친구?”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시즌 첫 3연전 때는 한마디도 하지 않던 무뚝뚝한 놈이 제리 와그너의 말에 하나하나 대답을 해주었다.
그 김에 한번 흔들어볼까 했지만 턱도 없는 일이었다.
직접 말을 섞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다른 팀에서 뛰는 선수들, 특히 포수들을 통해 한수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야구 실력만큼이나 끔찍한 트래시토크 실력을 갖춘 인간이라고 말이다.
말 몇 마디에 흔들릴 놈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제리 와그너가 피치컴을 이용해 투수에게 초구 사인을 보냈다.
‘바깥쪽 완전히 빠지는 슬라이더’
결국 이런 순간 믿을 수 있는 건 마운드 위에 선 투수의 실력이다.
나이를 먹어 전성기 때에 비해 폼이 많이 내려왔지만 사이 영 상을 무려 5번이나 차지한, 현역 투수 중 최고의 커리어를 가진 알렉스 데이비스가 제리의 리드에 따라 힘차게 초구를 던졌다.
슈웅
파앙
“볼.”
“젠장, 아까운 공이었어. 안 그래?”
“맞아,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왔으면 그대로 후려쳐 넘겨버리려고 했거든.”
“…….”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 전 영상으로 본 한수혁의 홈런이 떠올랐다.
원바운드성으로 들어온 공을 받아쳐 펜스를 넘겨버린, 그 말도 안 되는 타구.
조금 더 확실하게 공을 빼야겠다고 다짐한 제리가 신중한 자세로 2구째 사인을 보냈다.
‘몸 쪽 낮은 곳으로 확실하게 떨어지는 체인지업’
아주 약간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곧바로 장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괴물.
하지만 제리가 완전하게 도망가지 않고 이렇게 유인구나마 던질 수 있는 건 지금 마운드 위에 선 투수를 믿어서다.
한때 100마일을 넘겼던 강속구는 온데간데없지만 그를 사이 영 위너로 서게 만들어주었던 칼 같은 제구력은 여전히 살아 있었으니까.
자신이 처음 포수 마스크를 끼었을 때부터 호흡을 맞춰온, 이제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는 최고의 파트너가 제리를 향해 힘차게 공을 뿌렸다.
슈웅
그의 요구대로 아주 제대로 제구 된, 몸 쪽 낮은 곳으로 들어오다 떨어지는 원바운드성의 체인지업.
재빠르게 무릎을 꿇은 제리가 공을 잡기 위해 블로킹 자세를 취하던 그때,
따아아아악!
“커헉!”
몸 쪽 가장 깊숙한 곳에서 뚝 떨어지며 바닥에 처박히는 공을 한수혁이 마치 골프를 치듯 그대로 당겨버렸다.
어마어마한 타격음과 함께 새까맣게 솟구친 타구가 펜웨이파크 좌측, 11.3미터 높이의 그린몬스터가 버티고 있는 곳을 향해 비행하기 시작했다.
“와라! 이쪽으로! 이쪽으로!”
“제발!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 여기에 달렸어! 내 쪽으로 와줘!”
“힘을 내! 야구공아! 할 수 있어! 넌 오늘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거야!”
그린 몬스터 위 좌석에 앉아 있던 관중들이 너도나도 글러브와 나비 채를 꺼내들고 한수혁의 타구를 기다렸다.
45도 각도로 솟아올라 좌측 펜스를 향해 힘차게 날아가는 타구와 그 자리를 119년간 지켜온 거대한 녹색의 벽의 대결.
그 승부의 승자는 무게 145g에 불과한 야구공이었다.
터엉
2022년 양키스의 애런 저지가 세운 단일시즌 역대 최다 홈런 7위 기록 옆에 한수혁의 이름이 함께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안 돼! 내 거야!”
“제발! 제발!”
“비켜! 다 비키라고!”
관중들이 내민 글러브와 나비 채를 피해 관중석 의자를 강타한 야구공이 데굴데굴 굴러가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공을 잡기 위해 우르르 몰려 들었다.
덩치 큰 남자, 툭 치면 넘어질 것 같이 마른 여자,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어린 소년 등 수십의 인파들이 몰려들어 홈런볼 쟁탈전을 벌였다.
“만세! 내가 잡았다!”
“젠장! 코앞에서 복권을 놓치다니!”
“아아아,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치열한 볼 쟁탈전이 끝난 것인지 누군가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타석에 그대로 선 채 자신이 때려낸 타구를 감상하던 한수혁이 배트를 옆으로 툭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정면 승부를 하지 그랬어. 이렇게 도망가다 맞으면 더 쪽팔리잖아, 안 그래?”
“…….”
메이저리그에서 트래시토크로는 누구에게도 밀려본 적이 없는 제리 와그너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