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2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23화(324/412)
#323. 우리는 레드삭스다
사이 영 상 5회 수상이라는 현역 최고의 커리어를 가진 베테랑 알렉스 데이비스, 보스턴 팜에서 키워낸 차세대 에이스 라파엘 실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데려온 2025시즌 사이 영 위너 브라이언 베일리, 거기에 마이애미 말린스에서 트레이드해온 앤디 딕슨까지.
에이스인 알렉스 데이비스의 노쇠화가 조금 아쉽긴 하지만 투수진에서만큼은 리그 최강 중 하나라 불리는 레드삭스가 양키스와의 상대전적에서 밀린 건 타선의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번 타자를 맡고 있는 중견수 잭 로저스나 2번으로 주로 나서는 우익수 맷 케프, 그리고 3번 타자인 제리 와그너까지는 아주 훌륭하다.
문제는 그 뒤를 받쳐줄 타자들이 조금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리 와그너는 지난 스토브리그가 너무 아쉬웠다.
투수진을 보강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만약 그 돈으로 타이 존슨과 한수혁을 한 묶음으로 데려왔다면?
그럼 올 시즌 동부지구의 최강자는 양키스가 아니라 레드삭스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제리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플레이!”
한수혁의 선제 홈런으로 시애틀이 한 점을 앞서 나가는 가운데 2번 타자로 나선 타이 존슨이 타석에 들어섰다.
2미터가 넘는 키와 그에 어울리는 체격을 갖춘,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진정한 거인.
“타이, 저 친구는 진지하게 골프를 노려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 공을 받아쳐 그린몬스터를 넘기다니.”
“흐흐, 알렉스가 많이 놀랐겠군. 가서 위로 좀 해주지 그랬어.”
“안 그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요. 그러니 빨리 삼진 좀 먹어줄래요? 알렉스가 울기 전에 말이죠.”
“그것 참 바람직한 헛소리군.”
타이 존슨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제리가 다시 포구 자세를 취했다.
볼수록 기가 질리는 타선이다.
60개가 넘는 홈런을 치고 있는 4할 타자가 1번에 들어서고, 그 바로 뒤에 현역 최고의 커리어를 가진 거인이 버텨서다니.
저런 선수들이 1, 2번을 치는 건 반칙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피치컴을 통해 투수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 마운드에 서 있는 투수가 애송이가 아닌, 투수 쪽에서 타이 존슨과 맞먹는 커리어를 자랑하는 알렉스 데이비스라는 거다.
고작 선제홈런 한 방 정도에 흔들릴 투수가 아니라는 뜻이다.
‘바깥쪽으로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
시즌 초반 3연전을 치르며 발견한 타이 존슨의 약점,
물론 이 대단한 커리어를 가진 타자는 그 약점을 경기 중에 극복해내는 기적을 선보였다.
그럼에도 제리가 요구한 초구는 바깥쪽 공이었다.
슈웅
파앙
“볼.”
타이 존슨은 매년 600타석 이상을 소화하며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을 빅리그에서 보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어차피 얕은 수를 써봐야 모두 그의 계산 아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이길 확률이 높은 곳을 집중적으로 노린다.
조금 다른 의미로 정면승부인 셈이다.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예요, 타이. 알렉스의 공은 아직도 끝내주거든요.”
“맞아. 확실히 그래. 내 방망이만큼은 아니지만.”
“멋진 말이네요.”
투수와 타자 모두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이다.
그렇기에 이 순간 포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승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 발 물러서는 것이다.
구속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알렉스가 던지는 포심에는 세월의 힘이 담겨 있다.
볼 끝에 힘이 있어 맞추기도 힘들고, 설사 맞춘다 해도 장타가 잘 나오지 않는 공이라는 거다.
몇 차례 사인을 주고받은 알렉스가 타이 존슨을 향해 2구를 뿌렸다.
두 베테랑의 승부수가 한 점에서 부딪혔다.
슈웅
따악!
“서드!”
“빨리! 좀 더 빨리!”
3루 베이스 라인을 타고 빠져나가려던 타구를 3루수가 다이빙캐치로 잡아냈다.
전력을 다해 1루로 질주하는 타이 존슨.
리그 정상급으로 분류되던 주력은 세월 앞에 모두 사라졌지만 전력으로 질주하는 그의 발걸음에는 경기에서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세이프!”
간발의 차로 세이프가 선언되고,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려던 보스턴의 감독이 제리 와그너의 손짓에 다시 주저앉았다.
제리가 보기에 판독을 해봐야 어차피 세이프가 나올 타이밍이었다.
선제 홈런에 이어 또 다시 찾아온 무사 1루 위기.
본래 이 팀의 리드오프인 데릭 플레밍이 건드렁거리는 자세로 타석에 들어서자 제리 와그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 나왔다.
“젠장, 정말 끔찍한 라인업이군.”
* * *
1회초 공격에서 시애틀은 한수혁의 선제홈런과 타이 존슨, 데릭 플레밍의 연속 안타, 그리고 안토니오 가르시아의 희생플라이가 터지며 2점을 선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나마 마운드에 선 투수가 보스턴의 에이스이자 베테랑인 알렉스 데이비스였기에 그 정도 선에서 막아낸 것이었다.
경험이 없는 투수였다면 1회에 게임이 완전히 터져버렸을지 모를 정도로 시애틀의 기세는 강력했다.
“괜찮아, 이제 1회가 지났을 뿐이야. 두 점 정도는 우리도 얼마든지 낼 수 있다고.”
“제리 말이 맞아. 다들 힘내자고.”
아무리 다른 팀 팬들이 섞였다 해도 여전히 전체 관중석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보스턴 팬들의 응원 속에 레드삭스의 1회 말 반격이 시작되었다.
지난 시즌 0.350의 타율에 0.469의 출루율, 그리고 25개의 홈런과 29개의 도루를 기록한 보스턴의 돌격대장 잭 로저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플레이!”
2점을 등에 업고 한층 어깨가 가벼워진 라이언 티보우가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저었다.
‘일단 스트라이크부터 잡고 시작하자고.’
‘초구부터 스트라이크? 흠, 좋아. 친구. 그러면…….’
바깥쪽 코스에 걸친 투심 사인이 나왔고 라이언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한수혁의 조언을 수용하며 싱커성의 움직임을 보이게 된 투심이 타자에게 가장 먼 바깥쪽을 향해 날아왔다.
따악
“파울!”
잭 로저스의 날카로운 스윙이 그 공을 따라왔지만 배트 끝단을 스치며 파울.
원하던 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게 된 라이언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음 사인을 기다렸다.
‘몸 쪽 스플리터, 최대한 낮게.’
마운드 위에 선 투수가 한수혁이었다면 주문이 좀 더 구체적이었을 것이다.
스트라이크 존 가장 낮은 쪽을 스치듯 들어오다 땅바닥에 처박히는 스플리터를 던지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라이언 역시 좋은 투수이기는 하지만 한수혁만큼의 제구력은 갖고 있지 못했다.
그렇기에 브루스가 낸 사인은 볼이 되어도 상관없으니 최대한 낮게 던지라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라이언이 신중한 자세로 두 번째 공을 던졌다.
슈웅
파앙
“볼.”
“스윙이에요!”
“아니, 돌아가지 않았어.”
3루심의 의견을 물은 주심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브루스 역시 금세 수긍하고 자리에 앉았다.
상관없다. 배트가 제대로 돌지 않은 건 브루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마운드에 선 투수를 돕고, 타자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제스처일 뿐이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유인구를 한두 개 던져보는 것도 괜찮겠지만 이렇게 컨택 능력과 선구안을 동시에 갖춘 타자를 상대할 때는 조금은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
타자의 눈을 흐리기 위한 유인구가 먹히지 않을 경우 자칫 볼 카운트만 불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커터, 존 중앙으로, 이번에도 최대한 낮게.’
한가운데로 들어오다 좌타자의 몸 쪽으로 말려들어오는 컷패스트볼.
고개를 끄덕인 라이언이 전력을 다해 공을 뿌렸다. 그리고 동시에 잭 로저스의 배트가 힘차게 돌았다.
따악!
배트가 부러지고, 힘이 죽은 타구가 3루를 향해 데굴데굴 굴러갔다.
거의 번트나 다름없이 느리게 굴러가는 타구,
순간 라이언의 등 뒤에서 한수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라이언이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히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뒤에서 달려오던 한수혁이 맨 손으로 공을 잡아 그대로 1루를 향해 송구했다.
“아웃!”
“젠장! 저걸 저렇게 쉽게 처리한다고?”
“진짜 미친놈이군! 제기랄! 왜 저런 놈을 못 데려온 거야!”
자리에 주저앉은 라이언을 일으켜주며 한수혁이 말했다.
“상대하기 힘들면 그냥 한 대 맞히고 내 뒤로 도망 와.”
“흐흐, 생각해보지.”
“좋아.”
* * *
양키스의 라인업이 이름만 들어도 그 화려함이 느껴지는 스타군단의 이미지라면 보스턴의 라인업은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추면서 형성된 끈끈함이 느껴지는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끈끈함이 라이언의 발목을 잡아챘다.
따아아악!
“그래! 바로 이거지!”
“이제 시작이야! 넘겨버려! 따라 잡아보자고!”
레드삭스의 2번 맷 케프가 라이언 티보우의 스플리터를 받아쳐 그린몬스터를 직격하는 2루타를 만들어냈다.
좌익수인 짐 브라운이 침착하게 처리하지 않았다면 자칫 3루타가 되었을지도 모를 까다로운 타구였다.
그렇게 1사 주자 2루 상황이 만들어졌고, 보스턴의 간판타자 제리 와그너가 타석에 들어섰다.
“이봐, 브루스.”
“왜.”
“우리가 아까 한수혁 타석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한 걸 잊지 말라고. 도망가지 말란 뜻이야.”
“정정당당? 땅바닥에 공을 패대기쳐 놓고 정정당당?”
“어쨌든 홈런이 됐잖아? 그 김에 양키스 그 꼴 보기 싫은 놈들의 기록도 깼고 말이야. 그러니 우리 딜을 하는 건 어때? 여기서 내게 볼넷 대신 승부를 거는 거야. 그럼 나도 다음 타석에 한수혁 그 친구에게 승부를 거는 거지. 어때, 딜?”
“웃기지 마. 널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이런, 좀 더 인류애를 길러보라고, 친구. 그렇게 불안과 의심 속에 살면 건강에도 별로 안 좋다니까.”
“자자, 친구들.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쯤 하고 야구나 하자고. 둘이 더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경기 끝내고 따로 데이트를 하든지.”
두 팀의 주전 포수 간에 오갔던 쓸데없는 대화가 주심의 중재로 중단되었다.
어차피 진심이라고는 1미리 그램도 담기지 않은, 말 그대로 아무 쓸데없는 트래시토크다.
1사 주자 2루, 이런 상황에서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타자인 제리 와그너와 정면 승부를 할 이유 따위 어디에도 없다.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커터’
끄덕
올 시즌 한수혁과 타이 존슨이 이 정도의 성적을 기록한 데는 그 뒤에서 묵묵히 뒷받침을 한 척 클락과 짐 브라운, 안토니오 가르시아 같은 타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리그 정상급의 1, 2, 3번 타자를 갖고도 보스턴의 득점 생산력이 중상위권에 머물고 있는 건 그 뒤를 받치는 타자들이 아직 덜 여물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랜 시간 리그 정상급 전력을 유지해온 보스턴에게는 신인들을 키워낼 시간이 충분치 않았으니 말이다.
어쨌든, 지금 이 시점에서 브루스는 제리 와그너와 승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슈웅
파앙
“볼.”
바깥쪽에서 더 바깥쪽으로 빠져 나가는 컷패스트볼.
꼼짝도 않은 채 그 공을 지켜본 제리가 브루스를 향해 말했다.
“정말 이러기야?”
“억울하면 뒤에 루카스 앤더슨이라도 데려다놓던지.”
“누구? 루카스? 이런 젠장, 양키스랑 우리 사이에 전쟁이라도 나길 원하는가 보군.”
또 몇 차례 의미 없는 트래시 토크가 오가고, 라이언의 손에서 2구가 발사되었다.
슈웅
부웅
“스윙!”
존 중앙으로 들어오는 포심처럼 보이던 공이 홈 플레이트 앞에서 뚝 떨어지며 땅에 처박혔다.
포심 궤적에 맞춰 나오던 제리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고, 라이언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젠장, 당했군.”
“멋진 공이지. 안 그래?”
“인정해.”
아랫입술을 꽉 깨문 제리가 다시 타격 자세를 취했다.
지난 시즌까지도 그랬지만, 올 시즌 라이언은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투수가 되었다.
방금 공은 포심과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정말 이상적인 스플리터였다.
‘그렇다면…….’
자신과 정면 승부를 할 생각이 없는 상대 배터리.
이 상황에서 들어올 공이란 게 뻔하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공, 혹은 몸 쪽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공
갑자기 제리의 머릿속에 방금 전 타석 한수혁이 보여준 스윙이 떠올랐다.
‘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몇 차례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제리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몸의 중심을 뒤에 두었다.
몸 쪽 낮은 코스의 공이 들어오길 기원하며.
그리고,
슈웅
라이언이 던진 또 하나의 스플리터가 그 곳으로 파고드는 순간,
따아악!
한수혁의 그것을 따라한 제리의 어퍼스윙이 공과 한 점에서 만났다.
“좋아! 그래! 바로 이거지!”
“가라! 가라! 가!”
제리가 때려낸 타구는 한수혁의 그것처럼 멀리 날아가진 못했다.
하지만 좌중간을 가른 큰 타구는 2루에 있던 잭 로저스를 불러들이기에 충분했다.
“세이프!”
2 대 0의 점수를 2 대 1로 만드는 멋진 안타를 때려낸 제리가 2루 베이스 위에서 크게 소리쳤다.
“할 수 있어! 우리는 레드삭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