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3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31화(332/412)
#331. 우승을 노리는 팀에서 뛴다는 건
“좋아, 난 준비됐어.”
“음? 무슨 준비?”
“오늘 네 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낸 후에 너에게서 시계를 선물 받을 준비 말이야.”
“흠.”
클리블랜드의 홈구장인 프로그레시브 필드,
지난 삶에서 내 두 번째 팀의 홈구장이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이곳에 올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니, 무거워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 내 기분을 눈치챈 것인지 오늘 호흡을 맞추게 될 레너드 존스가 되도 않는 농담을 걸어왔다.
“레너드 너, 친정팀 상대로 퍼펙트게임 같은 걸 하게 되면 살해협박을 받게 될지도 모를 텐데?”
“괜찮아. 한 번이라도 퍼펙트 게임 캐처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대로 두어도 리그 최고의 포수가 될 녀석의 꿈치고는 상당히 소박하다.
퍼펙트게임,
그거야 뭐 내 뒤를 몇 년 따라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흠.
“괜히 내가 부담 같은 걸 준 건 아니겠지, 한?”
“전혀.”
“좋아, 다행이야. 그럼 준비해보자고.”
올해가 빅리그 데뷔 시즌이라는 걸 감안하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녀석이다.
같은 데뷔 시즌이라 해도 나야 이미 다 겪어본 일을 두 번째 하는 것이지만 저 녀석은 정말로…….
가만, 혹시 저놈도?
아니, 그렇다고 보기에는 아직 실력이 너무 미미…….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라커룸 벽에 오늘 스타트 라인업이 붙었다.
1번 중견수 데릭 플레밍
2번 투수 한수혁
3번 우익수 척 클락
4번 좌익수 짐 브라운
5번 1루수 라파엘 오수나
6번 3루수 리암 랜드먼
7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
8번 포수 레너드 존스
9번 2루수 로니 몬타릭
내가 3루 자리를 비우고, 거기에 지명타자인 토니가 빠지고, 설상가상 타이마저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선발에서 제외되며 라인업이 많이 헐거워 보인다.
초반에 확실한 승부를 내지 않으면 조금 길게 던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 * *
1회초 시애틀 매리너스의 공격이 오랜만에 선발 출장한 라파엘 오수나의 병살타로 득점 없이 끝난 가운데 1회말 클리블랜드의 공격 차례가 돌아왔다.
올 시즌 거의 전 경기에서 리드오프로 출전 중인 좌익수 넬슨 비야가 타석에 들어섰다.
“레너드, 잘 지냈지?”
“나야 뭐 괜찮게 지내고 있지. 너희는 어때?”
“젠장, 솔직히 말하면 끔찍해. 저기 관중석을 봐. 오늘은 우리 팬보다 홈런 볼을 잡으러 온 팬들이 더 많은 것 같아.”
“음, 그래도 매일 경기에 나설 수 있는 건 역시 좋은 일 아닐까? 나처럼 네다섯 경기에 한 번 선발로 출전하는 것보다는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제길, 야구나 하는 게 낫겠군.”
“좋아. 오늘이나 내일 식사나 한번 같이 하자고.”
“다른 녀석들에게 전달해둘게.”
클리블랜드에 있던 시절 제법 친분이 두터웠던 두 사람이 대화를 마치고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레너드 존슨은 생각했다.
다른 팀도 아닌 친정팀이기에 조금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어쨌든 상대는 탱킹 중인, 홈팬들에게조차 야유를 받고 있는 명백한 약팀.
그리고 마운드 위에는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 중인 리그 최강의 투수.
이럴 때는 굳이 어렵게 갈 필요 없다.
한수혁은 구속과 구위뿐만 아니라 제구력 역시 갖춘 완벽한 투수이니까.
‘몸 쪽 낮은 코스, 싱커’
끄덕
처음 배터리를 이뤘을 때만 해도 일방적으로 경기를 리드하던 한수혁이 어느 순간부터 레너드에게 사인을 양보하기 시작했다.
어지간해서는 다른 선수를 잘 인정하지 않는 한수혁이었기에, 그걸 받아들이는 레너드 입장에서는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사인이 오간 후 숨 돌릴 틈도 없이 한수혁의 초구가 날아들었다.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타자 몸 쪽 가장 낮은 코스를 훑고 지나가는 102마일 하드싱커.
타석에 서 있던 넬슨 비야가 처연한 표정으로 레너드를 돌아보았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치냐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조금 불쌍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고삐를 늦출 수는 없다.
이제 자신은 클리블랜드가 아닌 시애틀의 선수이니까.
지금 레너드에게 필요한 건 친정팀에 대한 측은지심이 아닌 현재 팀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향상심이었다.
그리고 그건 레너드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이기도 했다.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중앙 가장 낮은 코스를 스치고 지나가는 스플리터.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탄성이 나올 정도로 좋은 공이다. 그러니 타자가 손도 못 대고 쳐다볼 수밖에.
한수혁이라는 투수가 정말 무서운 건 다른 투수들이 어쩌다 한 번 던질까 말까 한, 소위 말하는 긁히는 날의 투구를 거의 매일 밥 먹듯이 한다는 점이다.
AI 볼 판정 시스템이 도입된 후 투수에게 필요한 능력치 중 제구력의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타자가 보기에는 땅으로 처박히는 브레이킹 볼이 존을 스쳐 지나갔다는 이유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기도 한다.
그런 공을 던질 수만 있다면 기존 스트라이크 존에 익숙한 타자들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닌 셈이다.
그리고 한수혁은 현재 리그에서 그걸 가장 잘하는 투수였다.
물론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라는 타이틀도 함께 가진.
슈웅
부웅
“스윙! 아웃!”
“…진짜 너무하네.”
“팬들이 더 아우성치기 전에 얼른 들어가. 나중에 경기 끝나고 전화할게.”
“젠장, 연락하지 마. 그냥 다 꺼져 버려.”
* * *
경기 전부터 예상되었던 한수혁의 호투, 반대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클리블랜드 선발투수의 역투로 0 대 0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3회초 시애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첫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났던 시애틀의 리드오프 데릭 플레밍이 침착한 자세로 타격을 준비했다.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1위와 중부지구 4위라는 성적표만 봐도 알 수 있듯 여러모로 전력 차가 나는 경기.
하지만 저 팀 역시 엄연한 빅리그 팀이다. 방심하다가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뜻이다.
지난 타석에서는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삼진을 당했다.
한수혁에게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나름 20홈런을 목전에 둔 상황인 만큼 자기도 모르게 스윙이 커진 탓이다.
마음 속으로 다시 한 번 상기해본다.
‘나는 리드오프다. 이 아메리칸 리그, 아니,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리드오프가 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몇 번이고 그 말을 중얼거린 데릭이 배트를 짧게 잡고 투수를 노려보았다.
파앙
“볼.”
욕심을 냈으면 배트가 나갔을 수도 있을 유인구를 잘 참아냈다.
올 시즌 데릭을 유심히 지켜본 전문가들은 그가 장타에 대한 욕심을 버리면서 오히려 한 단계 성장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전년도에 비해 장타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그 외 모든 타격지표가 상승한 것이 그 증거였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리드오프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적어도 한 개 지구 1위 팀의 리드오프 정도는 충분히 책임질 수 있게 된 데릭의 방망이가 투수가 던진 공을 멋지게 받아쳤다.
따악!
“어쩐지, 그래 웬일로 안 맞는다 했다. 이제 시작이구나!”
“이딴 걸 내 돈 주고 보러 들어오다니!”
“젠장, 지금이라도 환불해줘!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경기장을 3분의 1 정도 채운 클리블랜드의 팬들이 자기 팀 선수들을 향해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질 걸 알면서, 팀이 승리가 아닌 탱킹을 선택했다는 걸 알면서,
그럼에도 비싼 티켓을 구입해 경기장을 찾은 클리블랜드 팬들은 다음 타자의 등장을 보며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2번 피처 한수혁]오늘 경기의 선발투수이자 현 시점 리그 최고의 투수이자 타자.
투타 겸업의 원조인 오타니 쇼헤이를 까마득히 넘어서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어쩌면 그들이 살아 생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완벽한 야구 선수.
쿵
그가 한 발을 들어 힘차게 배터박스를 내려찍었다.
마치 거인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묵직한 발자국이 타석에 새겨졌다.
2회까지 예상 외의 호투를 보여주던 클리블랜드 선발투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외야 관중석에 나비 채가 만들어낸 물결이 넘실거렸다.
한참 동안 사인이 오갔고 결국 공을 던져야 할 순간이 왔다는 걸 깨달은 투수가 창백한 표정으로 초구를 뿌렸다.
바깥쪽 낮은 코스에 어정쩡하게 걸쳐 들어오는 유인구.
그와 동시에 한수혁의 배트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따아아아아아악!
시즌 69호 홈런,
메이저리그 역사상 배리 본즈와 마크 맥과이어 단 두 명만이 밟아본 70홈런 고지까지 딱 한 발이 남게 되었다.
* * *
“젠장, 레너드. 너랑 이러고 있는 걸 우리 팀 팬들이 보게 되면 아마 내 SNS를 닫아야 할지도 몰라.”
“괜찮아. 예전부터 느꼈지만 이 집에 손님이 들어오는 꼴을 본 적이 없으니까.”
“다 들린다, 이 자식들아.”
“아, 마스터. 들렸어요? 하하.”
클리블랜드 시내와는 반대쪽 블럭에 위치한, 낡다 못해 허름하기까지 한 작은 펍.
그곳에 오늘 한수혁과 완벽한 호흡을 맞춰 팀을 승리로 이끈 레너드 존스와 클리블랜드의 주전 좌익수 넬슨 비야, 2선발 훌리오 아다메스, 마무리 지미 맥카운 등 몇 명의 선수들이 맥주잔을 맞대고 있었다.
한수혁이 선발 등판했던 오늘 경기는 초반 팽팽했던 분위기가 무색하게 10 대 2, 시애틀의 완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퍼펙트게임과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한수혁은 5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후 곧바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팀이 5회까지 일곱 점을 낸 상황에서 굳이 투타 겸업을 하는 그를 더 던지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9승과 함께 0.59의 평균자책점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 한수혁.
그리고 시즌 69호 홈런을 날리며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까지 불과 다섯 개만을 남겨놓게 된 괴물 타자 한수혁.
당연한 일이지만 두 팀의 선수들이 모인 이날 술자리의 화제는 단연 한수혁이었다.
“레너드, 솔직히 말해봐. 그 녀석 인간이 아니지? 한국의 반도체 기술로 만든 최첨단 사이보그 같은 거지? 그런 거지?”
“그럴 리가.”
“젠장, 오늘 그 홈런은 정말 다시 봐도 말이 안 돼. 그 공을 그렇게 받아쳐서 거기까지 날려버린다고?”
“홈런은 그렇다 치고 하드싱커가 105마일이 나온다는 게 대체 말이 돼? 그걸 인간이 치라고 던지는 거야?”
“진짜 엿 같은 건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게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거야. 그 둘이 따로 있어도 끔찍한 판국에 말이지.”
“홀리 쉣…….”
클리블랜드 옛 동료들의 푸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레너드가 들고 있던 맥주잔 속 맥주를 반 정도 비웠다.
내일 경기에는 다시 주전 포수인 브루스가 복귀를 하겠지만, 그래도 원정 일정 중에 맥주 한 잔 이상을 마시는 건 절대 안 될 말이다.
그런 레너드를 슬쩍 바라본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한숨을 푹 쉬며 들고 있던 잔을 비워버렸다.
“제길, 마스터, 이 맛없는 맥주 한 잔 더 줘요.”
“뭐? 기껏 잘 마셔놓고 맛이 없다고?”
“이러니 손님이 없죠. 아무튼 줘요.”
아무리 탱킹 중인 팀이라 해도 시리즈를 치르는 중에 술을 많이 마신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짓이다.
하지만 지금 클리블랜드에는 그걸 지적할 만큼 연륜 있거나 의욕이 넘치는 베테랑도,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고 팀을 지도하는 코치들도 없다.
꼴찌가 되기 위해 일부러 시즌을 포기한다는 건 바로 이런 거다.
패배에 익숙해지고 나태함에 점점 물드는 것.
한때 그 팀의 일원이었으나 지금은 세상 그 무엇보다 승리를 갈망하게 된 레너드가 씁쓸한 표정으로 옛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적당히들 마셔. 내일 경기해야지.”
“…하아. 그래, 하긴 해야지. 그나저나 레너드, 어때? 우승을 노리는 팀에서 뛰는 기분 말이야.”
“솔직히 말해도 될까?”
“당연하지.”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클리블랜드에서 뛸 때는 루키라서 그냥 경기에 뛰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그렇지 사실 내가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았거든.”
“젠장,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군.”
“그런데 여기, 음, 시애틀에서는 모든 게 달라.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내가 해야 할 일들, 그리고 이뤄야 할 일들이 한 가득 떠오르지. 어떨 때는 그 일이 아주 미미하기도 하고, 또 오늘처럼 운 좋게 선발로 나서는 날에는 꽤나 그럴듯하기도 해. 하지만 그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내가 그 팀의 일원이라는 거지. 모든 준비를 무사히 마치고 경기 준비를 기다리는 그 기분, 그래, 그때야 비로소 나는 살아 있다는 걸 느껴. 너희들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