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3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37화(338/412)
#337. 어떻게 안 거죠
”이봐, 한.”
“왜요, 타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널 따라 이 팀으로 옮겨온 거야.”
“흠.”
“비가 와서 그런가, 조금 센치해지는군. 어쨌든 기왕 말을 꺼낸 김에 마무리를 짓자면 세인트루이스에서 나는 뭐랄까, 약간 목표의식을 잃었던 것 같아. 그 팀은… 내가 없어도 충분히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팀이었고, 팀 동료들은 베테랑인 내 눈치를 보기에 바빴지. 뭐랄까,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된 기분이랄까.”
“뭔지 알 것 같네요.”
“좋아, 역시 넌 말이 통하는군. 어쨌든 시애틀에 오고 나서는 하루하루가 즐거워. 매일 뭔가에 도전하는 기분이랄까. 이제 시즌이 얼마 남지 않았군. 어떻게 해서든지 포스트시즌에는 합류할 테니 우리 최고의 시즌을 만들어 보자고.”
아직까지도 손가락에 기브스를 한 타이 존슨은 훈련에 전혀 참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경기장에 출근해 선수단과 함께하고 있다.
휴스턴과의 3연전 두 번째 경기를 앞둔 T모바일파크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갑작스런 타이의 고백 아닌 고백을 들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리 회귀를 했다 해도 언젠가 내게도 저런 시기가 올 것이라는 걸.
이미 한 번 맞이해보긴 했지만 좀처럼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그런 시기가 올 거라는 생각 말이다.
과연 나는 그때, 어떤 목표를 갖고 그라운드에 오를 수 있을까.
내 두 번째 선수 생활의 말년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자, 제군들, 오늘은 평소 경기에 뛰지 못한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기로 했어.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마. 우리는 연승 중이고, 팀 역대 두 번째 최다승을 목표로 달리고 있는 팀이니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주전들이 투입될 거야. 그리고 한, 자네는 오늘도 2번 타자야. 문제없겠지?”
“당연하죠, 감독님.”
“좋아, 다른 선수들 같으면 이런 말조차 부담이 될 수 있겠지만 자네는 좀 다르니까. 힘껏 스윙해. 저 멍청이들의 공을 담장 밖으로 날려버리라고.”
“그게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이죠.”
“바로 그거야.”
기분 좋은 표정을 지은 벤자민 감독이 감독실로 돌아가고, 선수들이 라인업 용지 앞으로 모여들었다.
1번 중견수 헨리 에르난데스
2번 좌익수 한수혁
3번 지명타자 안토니오 가르시아
4번 1루수 라파엘 오수나
5번 포수 브루스 매튜스
6번 3루수 리암 랜드먼
7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
8번 우익수 카일 섀너한
9번 2루수 로니 몬타릭
선발투수 마이크 워렌
“오! 좋았어!”
“드디어!”
“흠, 오늘은 휴식이군. 어쩔 수 없지.”
나와 브루스, 리암, 조쉬, 토니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백업, 혹은 루키로 구성된 파격적인 라인업.
오랜만에 선발로 출전하게 될 선수들이 활짝 웃는 가운데 휴스턴과의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빌어먹을 개자식들아, 너희는 정말 재수 없는 놈들이야. 알아?”
“흠, 역시나 예상대로네.”
“뭐? 이런 시건방진 루키 놈이.”
“잠깐 내 말을 들어봐. 방금 전에 한수혁이 그러더라고. 포수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그냥 턱을 갈겨버리고 자기 뒤로 도망오라고.”
“…….”
“이 말을 전하면 포수가 입을 닥칠 거라더니 정말 맞았네. 역시 그는 대단해.”
1회 초 휴스턴의 공격이 득점 없이 끝난 가운데 시애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9월 확장 로스터로 팀에 합류한 후 첫 선발출장하게 된 헨리 에르난데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타격 자세를 취했다.
선수단 보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유망주 여럿을 트레이드로 내보내야 했던 시애틀, 그런 시애틀에 몇 남지 않은 유망주 중 하나가 바로 헨리였다.
확장 로스터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헨리는 크게 감격했다.
빅리그 데뷔야 언젠가 이뤄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보다는 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는 한수혁, 그의 멋진 경기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오늘은 그런 그와 테이블 세터를 이뤄, 그리고 중견수와 좌익수로 수비 공간을 공유하며 뛸 수 있게 되었다.
먼 훗날, 누군가 자신에게 인생 최고의 순간이 언제였냐 묻는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오늘이라고 답할 수 있으리라.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 기분이 좋아진 헨리가 예리한 눈으로 초구를 골라냈다.
파앙
“볼.”
동료들에게는 한수혁을 추종하는 ‘얼간이 1’ 정도로 불리고 있는 헨리이지만, 마이너 시절 그의 평가는 데릭 플레밍을 능가하는 중견수가 될 수도 있는, 최고의 포텐을 가진 외야 유망주였다.
물론 지금 당장만 놓고 보면 많은 것이 부족했다.
마이너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투수들의 공에 대응하기에는 갖고 있는 파워나 타격 매커니즘 등 여러 면에서 손질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이미 완성된 무기 하나가 있었다.
그건 시애틀 팜의 타자들 중 최고라 꼽히는 선구안이었다.
“베이스 온 볼스, 타자 1루로.”
“예쓰!”
풀카운트 접전 끝에 마지막 볼을 골라낸 헨리 에르난데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1루를 향해 뛰어 나갔다.
그의 호들갑에 휴스턴 포수 프레드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2번 타자 레프트필더 한수혁]등 뒤에서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척,
이제 듣기만 해도 자동반사로 욕부터 튀어 나오는 등장음악과 함께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
야구로나, 주먹으로나, 그 어떤 쪽으로나 덤빌 엄두가 나지 않는 괴물 중의 괴물.
한수혁 때문이었다.
“오늘은 다른 놈이 나올 줄 알았더니 또 너군.”
“…제발 닥치고 야구만 하자고.”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야. 애초에 너희들이 하는 걸 야구라 부를 수 없는 게 문제이지만.”
어제 홈런을 쳤으면 됐지, 대체 뭐가 불만인지 자신들만 만나면 시비부터 걸어오는 한수혁.
사실은 그가 탱킹이라는 행위 자체를 경멸한다는 걸 알 리 없는 프레드가 인상을 푹 쓴 채 투수에게 사인을 보냈다.
‘너 던지고 싶은 대로 던져.’
‘진짜?’
‘어차피 감독 저 인간도 경기에 손 놔버린 지 오래고, 젠장, 내가 어디로 던지라고 해봐야 너 내 말 안 들을 거잖아. 그러니 네 멋대로 해버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투수와 마음 속 대화를 나눈 포수 프레드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포구 자세를 취했다.
정말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경질이 확정된 감독이나, 정신의 반쯤은 휴양지로 떠난 거나 마찬가지인 선수들.
그 와중에 혼자 뭐라도 해보겠다고 열심인 투수가 안쓰러울 뿐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의욕이 남아 있는 투수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기로 했다.
‘진담이야. 네가 던지고 싶은 대로 던져.’
‘좋아, 그럼 초구는 일단 몸 쪽 높은 커브.’
‘별로 권하고 싶진 않지만 네가 그걸 꼭 던지고 싶다면.’
타자의 머리 쪽으로 날아오다 존 안으로 휘어 들어오는, 빅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거란 평가를 받는 커브.
그 공을 던지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파앙
“세이프!”
1루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며 신경을 건드리는 주자, 일단 저 녀석부터 확실하게 묶어놔야 한다.
그렇게 몇 차례 견제구가 날아가자 1루 주자의 리드폭이 눈에 보일 정도로 좁아졌다.
만족스러운 표정이 된 투수가 드디어 한수혁에게 초구를 던질 준비를 마쳤다.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초반 3이닝을 책임지는 것이다.
아무리 잘 던져도, 반대로 아무리 못 던져도 그 전에 마운드를 내려갈 일은 없을 것이라 감독은 약속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빅리그로 올라와 처음으로 잡은 선발 기회다.
지금 투수에게 필요한 건 승리가 아니라 가능성이다. 리그 최강팀 시애틀을 상대로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비록 첫 타자에게 볼넷을 내주기는 했지만,
괜찮다.
그는 게임으로 치면 잡몹에 불과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메이저보다는 마이너가 더 어울리는 루키에 불과하니까.
게임에서도 그렇지만 야구에서도 마찬가지로 통하는 법칙이 있다.
보스만 잡아낼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 상관없다.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건, 보스의 시체 앞에 선 용사에게 시비를 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잡아낸다.
저기, 야구 실력으로나 펀치로나 메이저리그 최강이라 불리는 남자를,
반드시 잡아내리라.
자기 암시에 성공한 투수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용기에 감탄하며 힘찬 투구동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따아아아아아아악!
마치 공이 쪼개지는 듯한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그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미처 몰랐다.
한수혁은 그냥 보스 같은 게 아니란 걸.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 같은 존재라는 걸.
“좋았어! 휴스턴의 투수, 너! 이름이 뭐지! 젠장, 상관없어. 넌 앞으로 리그 최고의 투수가 될 거야!”
“너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노라! 이름 모를 투수여! 감히 한수혁에게 정면 승부를 건 걸다니, 바보 같은 놈아!”
“앞으로 1개, 아니, 2개만 더 치면 돼! 이제 정말 다 왔다고!”
들고 있던 배트를 힘차게 바닥에 내리 꽂은 한수혁이 두 손을 번쩍 들고 그라운드를 돌기 시작했다.
경기장이 무너질 듯한 엄청난 함성, 그리고 뒤를 따라오는 자신에 대한 야유를 듣던 투수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젠장, 내 이름은 스캇이라고… 이름 모를 멍청이가 아니라…….”
* * *
6 대 4, 두 점 차로 뒤진 휴스턴의 9회 초 마지막 공격.
지난 8이닝을 네 점으로 막으며 승리투수 요건을 갖춘 마이크 워렌이 마운드에서 내려가고, 시애틀의 새로운 마무리 투수 애덤 머피가 팀의 승리를 지키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두 점 앞서 있긴 하지만 3, 4, 5 클린업으로 이어지는 휴스턴의 마지막 공격.
방심은 절대 안 된다.
승리를 굳히기 위해 2루 자리에 로니 대신 조나단이 들어가고, 우익수 자리에도 원래 주인인 척 클락이 투입되었다.
하지만 벤자민 감독은 선발 중견수로 출전한 루키 헨리 에르난데스만큼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주전인 데릭 플레밍이 등에 약간의 불편을 호소한 탓도 있지만, 오늘 경기에서 1타수 1안타를 기록하고 수비에서도 큰 실수를 하지 않는 헨리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좀 더 앞으로, 좀더, 오케이, 거기서 좌측으로, 그래, 우측이 아니고 좌측으로 세 걸음. 좋아. 바로 거기.”
“네, 한. 고마워요.”
헨리의 옆에서 수비 위치를 잡아주고 있는 한수혁을 믿어서이기도 했다.
그의 지시를 받아 수비 위치 조정을 마친 헨리 에르난데스는 생각했다.
‘원래 3루수잖아. 한국에서는 유격수였고.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외야 수비에 능숙하지?’
오늘 한수혁은 좌익수 자리에서 두 번의 멋진 수비를 보여줬다.
파울라인을 벗어나는 타구를 끝까지 따라가 잡아내기도 하고, 홈런이 될 뻔한 타구를 점핑캐치로 건져내기도 했다. 오늘 시애틀이 두 점 차로 앞서고 있는 건 모두 한수혁의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시애틀 루키 중 외야수비에 있어 최고라 평가받은 헨리가 보기에 한수혁은 타고난 외야수였다.
빠른 발과 순간적인 타구 판단, 그리고 따라 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송구 능력을 모두 갖춘 지상 최강의 외야수.
‘하긴, 그렇게 치면 원래 투수구나.’
엄밀히 말하면 그랬다. 한수혁의 포지션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투수 겸 타자라 봐야 했다. 3루수 수비조차 그에게는 부업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하는 걸 그만둔 헨리가 허리를 살짝 굽히고 수비 자세를 취했다.
저 멀리 마운드에 선 팀의 최고참 애덤 머피가 휴스턴의 3번 타자를 향해 초구를 던졌다.
그 순간.
따아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헨리가 있는 쪽을 향해 날아왔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스타트를 끊은 헨리가 전력을 다해 타구를 쫓았다.
한 발, 그리고 두 발,
거의 다 따라 잡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백이면 백, 중견수 앞 안타가 될 타구. 하지만 헨리는 이 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두 점 차 승부에서 선두 타자를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 공을 쫓던 헨리가 눈앞에서 낙하운동을 하고 있는 야구공을 향해 힘차게 몸을 날렸다.
“흐아압!”
설사 다이빙 캐치에 실패한다 해도 한수혁이 뒤를 받쳐줄 거라는 생각, 그라면 이미 다음 플레이를 대비하고 있을 거란 믿음이 헨리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촤아아악
터억
그렇게 몸을 날린 헨리의 글러브 속으로 타구가 빨려 들어왔다.
자신의 모험이 성공으로 끝났음을 깨달은 헨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글러브 속의 공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아웃!”
“좋아! 루키! 대단한 플레이였어! 우리 팀에 멋진 녀석이 들어왔군!”
“그대로만 해! 그럼 내가 네 유니폼을 열 장 사줄 테니까!”
등 뒤에서 쏟아지는 관중들의 함성에 얼굴이 붉어진 헨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시선에 누군가 잡혔다.
자신의 예상대로 이미 백업 위치까지 달려와 있던 한수혁이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헨리가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한! 당신의 말이 맞았어요! 앞으로 가 있지 않으면 절대 못 잡았을 거예요. 대체 어떻게 안 거죠? 공이 그쪽으로 올지 어떻게 안 거예요? 말해줘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