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40)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39화(340/412)
#339. 파트너
회귀 전 내 선수 생활에서 가장 화려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고 월드시리즈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바로 그때일 것이다.
하지만 팀이 아닌 나 개인으로만 놓고 본다면 시애틀을 사상 첫 월드시리즈에 진출시켰던 바로 그 순간이 내 예전 삶의 전성기라 볼 수 있었다.
투수로서 시즌 17승, 거기에 타자로서는 54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그럼에도 그때의 난 스스로에게 전혀 만족하지 못했던 거 같다.
그냥 욕심이 좀 과했고,
너무 어렸기에 만족을 하는 법을 몰랐다.
그리고 내가 또 한 가지 실수를 한 건 언제까지나 그런 영광의 순간이 계속 될 거라 착각했다는 거다.
사람들이 보내는 환호성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바로 다음 해 어깨가 박살 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회귀라는 걸 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쯤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쓸쓸히 이곳 T모바일파크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예전에는 참 대단했지, 그렇게 찬란했던 시절의 기억을 곱씹으며 말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인간은 무엇이 소중한지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의 바로 옆에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지금 살아 숨 쉬는 순간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닫지 못한 채 언제 찾아올지 모를 불확실한 미래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곤 한다.
누군가 내게 준 두 번째 기회,
그것으로 인해 나는 아주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플레이!”
지난 이틀간 치러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시즌 4, 5차전 경기에서 시애틀의 연승 행진은 계속되었다.
디몬 앤더슨 주니어가 등판한 첫날 경기에서는 척 클락의 쓰리런 홈런에 힘입어 6 대 4로 승리, 그리고 다음 날 경기에서는 라이언 티보우가 8이닝 3실점으로 호투하며 또 한 번 승리.
연승 숫자는 15로 늘어났고, 우리 팀을 찬양하는 팬들의 목소리는 더욱더 커져갔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난 두 번의 경기에서 내가 하나의 홈런도 추가하지 못했다는 거다.
어쩔 수 없다. 단일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 옆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기 싫은 투수들이 날 미친 듯이 피했으니 말이다.
타이라도 있으면 좀 나았겠지만.
글쎄,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조금 더 느긋하게 마음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괜히 홈런을 때리겠답시고 무리한 스윙을 하다가는 포스트시즌까지 망칠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지금 생각해야 할 건 공격이 아닌 투구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감독은 오늘이 이번 시즌 내 마지막 선발 등판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연승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포스트시즌을 대비해 선발투수들의 체력을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양팀 간의 시즌 마지막 경기, 선두타자로 나선 디트로이트의 패트릭 메이슨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몸 쪽 하드싱커’
끄덕
언제부터인가 내 전담 포수가 되어버린 레너드 존스의 사인에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승이라는 건 곧 흐름이다. 지난 15번의 경기에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던 이 흐름을 최대한 오래 유지시키는 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파앙
“스트라이크!”
지난 WBC에서부터 나와 몇 번 상대해본 적 있는 패트릭 메이슨은 정교한 선구안을 바탕으로 투수에게 많은 공을 던지게 만드는, 약간 클래식한 타입의 리드오프다.
그렇기에 어설픈 유인구 따위는 필요 없다.
때릴 테면 때리라는 마음으로 빠른 승부를 걸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바깥쪽 낮은 코스, 구종은 커터.’
끄덕
파앙
따악!
“파울!”
빠져나가는 커터를 무리하게 받아친 패트릭 메이슨의 배트가 부러지고, 그 잔해를 정리하기 위해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다.
오늘 경기를 포함, 우리에게 남은 건 고작 10경기.
동부지구의 양키스, 중부지구의 화이트삭스, 그리고 서부지구 시애틀의 우승이 거의 확정적인 가운데 와일드카드 3장 중 2장은 레드삭스와 애슬레틱스의 것이 될 확률이 높다.
마지막 와일드카드 한 장이 문제인데, 남은 경기 결과에 따라 LA에인절스, 혹은 토론토 제이스 중 한 팀이 가져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는 얘기는 포스트시즌에서 류한결, 이찬호 선배와 승부를 벌이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바깥쪽 체인지업’
끄덕
곧바로 포심으로 가는 게 조금 더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레너드 녀석의 자립심과 판단력을 키워주기 위해 그냥 녀석이 유도하는 대로 던지기로 했다.
다른 포지션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포수는 쉽게 키워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경험과 실수가 중첩되고, 그것이 충분히 발효된 후에야 비로소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포수가 된다는 뜻이다.
공 하나하나 던질 때마다 내가 매번 녀석의 멱살을 잡고 올바른 길로 갈 수는 없는 거다.
가끔은 녀석이 시키는 대로 쫓아갔다가 그곳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
물론 그걸 위해 경기를 내줄 수는 없지만.
스륵
현 시점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체인지업을 준비하고,
녀석이 원하는 곳으로 정확하게,
슈웅
따악!
“센터!”
내 예감이 맞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페트릭 메이슨이 배트가 돌았다.
중견수 쪽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타구,
객관적으로 보아 안타가 될 확률이 높은 그런 코스로 공이 날아갔지만,
터억,
우리 팀의 센터에는 이제 정말 믿음직한 중견수가 된 데릭 플레밍이 서 있었다.
정확한 타구 판단으로 잘 맞은 타구를 건져낸 데릭이 머리 위로 공을 힘껏 들어 올리며 힘차게 소리 질렀다.
“가자! 매리너스!”
“오오오!”
* * *
“좋아, 난 준비됐어.”
“무슨 소리야?”
“1루로 걸어 나갈 준비됐다고. 그러니 자동고의사구를 신청할 거면 빨리 하라고, 개자식아.”
“…각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게 있는 법이야.”
“입장? 좋아, 그럼 내 입장을 말해주지. 우리는 오늘 너희를 완전히 박살 낼 거야. 원정에서 3연패를 당한 너희 팬들은 공항으로 뛰쳐나와 날계란을 던져대겠지. 그따위로 할 거면 차라리 우리 집 개한테 야구를 시키라고 외치면서 말이야.”
“…쓸데없이 디테일하군.”
“됐고, 전 이닝에서 내가 던진 공들 기억하지? 그런 공은 못 던져도 적어도 배트가 닿을 법한 곳에 공을 던지란 말이야. 개자식들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내게 좋은 공이 들어올 리 만무하다.
파앙
“베이스 온 볼스.”
“우우우우, 저 비겁한 디트로이트 거지 놈들!”
“차라리 휴스턴 그 머저리들이 나았어. 이놈들은 아예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법 자체를 모르는군!”
또 한 번의 볼넷이 나오고 온 사방에서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어제와 그제, 이틀간의 경기에서 내게 볼넷이 쏟아지자 사무국, 그리고 메이저리그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서 고의사구가 얼마나 야구를 좀먹는지에 대해 실컷 떠들어댔지만 역시나 특별한 효과는 없는 것 같다.
결국 이런 순간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내 뒤의 동료들이다.
‘뛸까요?’
‘아니, 절대, 네버, 허락할 수 없어. 그냥 기다려.’
덕아웃을 향해 도루 사인을 내자 수석코치가 격렬한 반대사인을 보내왔다.
하긴, 시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괜히 도루를 하다가 부상을 입게 될 수도 있으니까.
특히나 오늘처럼 선발로 등판하는 날에는 나도 모르게 몸이 살짝 처지게 마련이고, 그런 작은 차이가 가끔 부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어쩔 수 없다.
도루는 포기하고, 그보다는 투수의 신경을 건드려 척의 타격을 도울 수밖에.
파앙
“세이프!”
뛸 듯 말 듯 신경을 건드리자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 된 투수가 연거푸 견제구를 던져왔다.
야구라는 게 결국 이런 거다.
때로는 별 의미 없는 행동들이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모여 승패로 이어지기도 한다.
회귀 전 나는 그런 사실을 몰랐기에 지금보다 훨씬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해야만 했다.
파앙
“세이프!”
“우우우우! 그만하고 빨리 승부나 해! 비겁자 놈들아!”
그런 그렇고,
타석에 선 척 클락의 표정이 꽤나 어두워 보인다.
타이가 빠진 후 우리 팀에서 가장 부담이 커진 선수가 있다면 바로 저 녀석이다.
내게 집중되는 상대 투수들의 견제, 그 뒤를 받쳐야 하는 부담감.
아무리 무덤덤한 척이라 해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 없다.
반쯤 감긴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던 녀석이 눈에 독기를 품은 채 투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따악!
몸 쪽으로 말려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제대로 받아쳤지만, 그곳에는 이미 디트로이트의 유격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웃!”
파앙
“아웃!”
“제길! 또야! 또!”
“어떻게 좀 해봐! 타이가 없다고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면 안 되잖아!”
“홈런! 저 친구가 홈런을 칠 수 있게 도와주라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덕아웃으로 향하는 척 클락, 그런 그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동료들,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다.
“괜찮아. 오늘 나는 단 한 점도 안 내줄 생각이니까. 천천히 다시 시작해보자고.”
* * *
– 아, 고동식 위원님. 오늘 경기가 잘 안 풀리는군요. 조쉬 올리버 선수의 병살타가 나오면서 무사 1루 상황이 순식간에 2사 주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시애틀에서만 세 개의 병살타가 나왔습니다.
– 네, 아무래도 15연승을 달리면서 선수단에 상당한 피로가 누적된 걸로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피로도는 정신적인 피로를 포함한 겁니다. 아무래도 한수혁 선수의 홈런 기록까지 걸려 있다 보니 시애틀 선수들이 느끼는 부담이 꽤나 큰 것 같아요.
– 역시 이럴 때면 타이 존슨 선수의 부재가 커 보이죠?
– 맞습니다. 오클랜드 그 멍청이들만 아니었으면 한수혁 선수가 벌써 홈런 신기록을 세우고도 남았을 겁니다.
– 오늘만큼은 위원님의 말을 가로막고 싶지가 않군요. 정말 그렇네요. 당장이라도 나올 것 같던 73호 홈런이 벌써 며칠째 감감 무소식이네요.
– 디트로이트 3연전 동안 한수혁 선수에게 쏟아진 고의성 사구만 8개입니다. 사실상 타격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죠. 아무리 한수혁 선수라고 해도 공이 와야 홈런을 칠 것 아니겠습니까? 아, 세계 최고 리그의 선수들이 저런 창피한 짓을 하리라고는 정말 몰랐습니다. 실망이에요. 메이저리그.
– 자, 홈런도 홈런이지만 일단 경기부터 이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한수혁 선수의 시즌 마지막 선발 등판이기도 하니까요.
– 당연하죠. 아직 8회와 9회, 두 번의 공격 기회가 남았습니다. 한수혁 선수 타석도 한 번 더 돌아올 거고요. 힘내야 합니다. 시애틀.
* * *
7회말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는 올 시즌 홈런이 단 한 개도 없는 백업포수.
그렇기에 고동식을 포함 모든 사람들이 이번 이닝 공격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 타석에 서 있는 레너드 존스 본인을 제외하고 말이다.
“플레이!”
클리블랜드에서 트레이드되어 와 단숨에 시애틀의 백업 포수 자리를 꿰찬 레너드 존스.
주전 포수인 브루스 매튜스에 비해 부족한 점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벤자민 감독은 그의 공격적인 경기 운영을 높게 평가하며 가능한 많은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한수혁이 등판하는 날에는 레너드가 마스크를 쓰는 일이 잦아졌고, 자연스럽게 전담포수 비슷한 존재가 되었다.
올 시즌 한수혁과 호흡을 맞춰 꽤나 많은 승리를 일궈냈던 레너드 존스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승리의 지분 90% 이상은 한수혁의 몫이었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한수혁이 시키는 곳에 미트를 가져다대고, 뒤로 공을 흘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게 전부였다.
그 정도만 해도 팀은 승리했고, 선수단에서 레너드가 차지하는 영역은 점점 넓어져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약간, 아니, 상당히 큰 문제가 발생했다.
타이 존슨이 빠지고, 상대 투수들이 한수혁에게 고의사구를 남발하며 7회 말까지 승패의 향방을 점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적어도 한 번이라도, 한 시즌 동안 딱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승리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이번 시즌 레너드에게 야구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 소중한 파트너를 위해 말이다.
“플레이!”
투수 리드에 있어서는 상당히 공격적인 레너드이지만 타석에서의 그는 선구안을 바탕으로 출루를 우선시하는, 약간은 수동적인 타입의 타자였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태도를 버려야 할 때다.
2사 주자 없는 상황, 설사 자신이 살아나간다 해도 다음 타자가 타석에서는 별로 기대할 게 없는 9번 타자이다.
그렇기에 레너드는 빅리그에 데뷔한 후 처음으로 새로운 접근법을 택하기로 했다.
드득
스탠스를 최대한 넓히고, 낮은 공을 때릴 수 있도록 그립의 위치를 조절하고,
올 시즌 타율이 2할에도 못 미치는 풋내기 타자인 자신.
그런 자신에게 볼 카운트를 잡아내기 위해 날아올 초구,
마운드 위 투수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99마일의 포심에 모든 포커스를 맞춰서,
딱 한 번,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마치 한수혁을 연상시키는,
따아아아악!
멋진 스윙과 함께 경쾌한 타격음이 구장에 울려 퍼졌다.
“오오오?”
“뭐야! 이게 뭐야!”
“잘 맞았다! 젠장, 잘 맞았다고!”
“레너드! 난 네가 해낼 줄 알았어!”
흥분한 시애틀 팬들이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질러댔고, 한수혁이 홈런을 칠 때만 움직인다는 한국의 팝가수가 안전망 꼭대기에 기어올라 레너드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터엉
좌측 펜스를 넘어간 타구가 관중석 중단에 떨어졌다.
“우아아아아아아!”
경기장이 무너질 듯한 엄청난 함성을 들으며 레너드가 1루를 향해 출발했다.
“멋진 스윙이었어, 레너드.”
주루 코치의 칭찬에 얼굴이 벌개진 레너드가 1루를 돌아 2루, 3루, 그리고 홈으로 들어왔다.
쿵
0의 행렬이 이어지던 T모바일파크 전광판에 1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덕아웃으로 들어오는 레너드를 가장 먼저 반긴 건 그가 세상 누구보다 존경하는 파트너이자 선수인 한수혁이었다.
“수고했어, 친구. 이제 뒤는 내게 맡겨.”
그 말을 듣는 순간 레너드는 생각했다.
야구를 하길 정말 잘했다고.
내가 야구를 해온 건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였던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