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4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40화(341/412)
#340. 각성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대요? 시즌도 다 끝나 가는데 고작 3경기 치르겠다고 LA까지 원정을 다녀오라니.”
“그러게 말이다. 예린아, 아무튼 다시 말하지만 넌 굳이 따라올 필요 없어. 복귀 준비하려면 너도 바쁘잖아.”
“아뇨, 오빠 요즘에 체력 떨어진 게 눈에 보이는데 혼자 보내면 또 대충 샌드위치나 먹고 말 거 아니에요. 제가 따라가야죠.”
“괜찮다니까. 3경기 정도는 별 문제 없어.”
“노노! 이 얘기는 그만,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건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오빠는 신경 쓰지 말고 경기에만 집중하시면 돼요.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요? 마지막까지 파이팅!”
생각지도 못한 레너드의 홈런에 힘입어 우리는 클리블랜드, 오클랜드, 캔자스시티, 휴스턴에 이어 디트로이트까지 스윕하며 연승 숫자를 16으로 늘렸다.
이제 남은 건 LA에인절스와의 원정 3연전, 그리고 홈으로 돌아와 치르게 될 템파베이 3연전, 텍사스 3연전뿐이다.
길고 길었던 162경기의 대장정이 마침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막판에 잡힌 에인절스와의 원정 3연전이 좀 걸리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런 살인적인 일정이 한두 번도 아니고.
별도 이동일이 배정되었다는데 위안을 삼을 수밖에.
“자, 그럼 전 제 집에 가서 마지막으로 가져갈 짐 정리할게요. LA에서 봐요, 오빠.”
“예린아.”
“네?”
“고맙다.”
“헤헤, 별 말씀을.”
올 시즌 내가 별다른 부상이나 체력 저하 없이 한 시즌을 풀로 치러낸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제이콥과 민예린, 바로 두 사람이다.
내 전담 트레이너로서 매일 매일 완벽한 관리 프로그램을 짜 준 게 제이콥이라면 민예린은 그 프로그램을 전달받아 내 부족한 면을 채워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먹는 것에 별다른 욕심이 없는 타입이다.
특히나 미국에 오고 나서는 맛있는 걸 먹는 즐거움은 고사하고, 가끔은 뭔가를 입에 넣고 씹는 것조차 귀찮을 때가 있다.
그런 나를 위해 민예린은 구단 측과 협력해 나를 위한 별도 식단을 짜주기도 하고, 여력이 될 때는 이렇게 직접 따라나서며 내 먹을 거리를 전적으로 책임지기도 한다.
솔직히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내가 뭐라고,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주나 하는 그런 생각.
“저 그럼 진짜 가요!”
“그래, LA에서 보자.”
이전 삶에서, 그리고 이번 삶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이 빚을 다 갚을 날이 올까.
* * *
“음, 이번에는 그냥 밥을 얼려갈까? 아냐, 아무리 그래도 갓 지은 밥보다는 못 하지. 좋아, 평소대로 밥솥과 쌀을 가져가는 걸로.”
민예린의 집,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오직 한수혁 하나만을 위해 특별히 작곡한 테마곡을 무한 재생으로 틀어놓은 민예린이 LA로 떠날 원정 짐을 챙기고 있었다.
한수혁이 입이 짧은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1년 내내 일정한 신체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프로선수에게는 상당한 약점이다.
홈경기를 치를 때는 그나마 구단에서 한수혁을 특별 관리해주지만 원정 때가 문제이다.
경기 전 선수들이 프레이크나 바나나 같은 걸로 가볍게 허기를 채울 때도 한수혁은 그저 기계적으로 양배추 즙, 혹은 단백질 쉐이크 한 포 정도나 마시는 게 전부다.
격렬한 경기를 치른 후 빠진 열량을 채우기 위해 다른 선수들이 엄청난 음식을 먹어치울 때도 한수혁은 그저 정해진 식단 외에는 도통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수혁이 먹는 것에 관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민예린은 그가 조금이라도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매일 요리를 연구하고, 그의 곁을 지키며 식사를 거르는 일이 없도록 돕고 있다.
“고기는… LA 가서 살까? 공항에서 내려서 바로 마트부터 들러서?”
뭐가 그리 신나는지 계속 혼잣말을 하며 짐을 챙기던 그녀가 마침내 그 일을 모두 끝내는 데 성공했다.
빠진 게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 그녀가 곧바로 침대에 누운 후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잘 자요, 오빠.”
* * *
벌떡
LA로 향하는 전용기 안,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까지 꾸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꽤 오랜만에 꾸는 꿈이다.
회귀 전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던 그 여자,
이제는 찾는 걸 포기하고 그냥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던 그 여자가 무슨 이유인지 꿈에 나타났다.
등을 돌린 채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서럽게,
지켜보는 내가 눈물이 날 정도로 아주 서럽게 울고 있었다.
모르겠다.
예전 그녀가 나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이 뭔지 잘 알고 있지만, 미안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녀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저, 너무나도 척박하고 외로웠던 내 삶에 유일한 빛이 되어 주었던 그녀에게 사람 대 사람으로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를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후 나는 머릿속에서 그녀를 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다시 꿈속에 나타난 걸까.
그녀의 집이 있는 곳, 오렌지카운티로 떠나는 이 시점에서 말이다.
“음? 한,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어?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니, 별 거 아니에요. 뭔가 좀 떠올라서.”
“떠오르다니 뭐가? 혹시 10타석 연속 무안타 행진 중인 데릭 저 녀석의 기록이라도 떠오른 건가?”
“젠장, 애덤. 굳이 남의 아픈 곳을 그렇게 헤집을 필요는 없잖아요.”
“아니, 너한테는 좀 그래도 돼. 타이도 없는데 너까지 삽을 푸니까 한에게 좋은 공이 전혀 안 가잖아. 잘 좀 해봐, 데릭.”
“하아, 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한, 두고 봐. 오늘 다시 출루왕이 뭔지 내가 확실히 알려줄 테니까.”
LA로 향하는 전용기 안, 애덤 머피의 농담에 데릭이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불태웠다.
다른 선수가 이런 말을 했으면 싸움이 났어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지만 그 말을 한 게 빅리그에서만 20년을 넘게 뛴 애덤이다.
만약 타이가 있었다면 그가 해줬어야 할 말을 애덤이 대신 한 셈이다.
어쨌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고작 9경기,
필요한 홈런 개수는 2개.
모르겠다.
기왕이면 올해 시애틀의 첫 월드시리즈 진출과 단일 시즌 최다 홈런이라는 기록을 동시에 세우고 싶긴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저 좀 자야겠네요. 데릭, 나 한 숨 자게 그만 떠들고 자리로 돌아가.”
“좋아, 우리 다 같이 이 친구가 푹 잠들 수 있게 협조 좀 해주자고.”
떠들썩했던 시애틀의 전용기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LA에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꿈속에 그녀가 나타나지 않기를 빌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오빠, 경기 전에 먹을 도시락 준비됐어요. 제가 들고 들어갈까요?”
– 아냐, 바깥 공기도 쐴 겸 내가 받으러 나갈게. 관계자용 게이트 있는 쪽에서 보자. 여기 주변에 주차하려는 차들 많으니 조심하고.
“알았어요. 기다릴 테니 천천히 나오세요.”
오늘 경기 전 한수혁이 먹어야 할 필수 영양소가 담긴 도시락, 그 도시락을 품 안에 꽉 안은 민예린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와의 약속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경기 시간이 꽤 남았건만 벌써부터 야구장 주변 주차장들이 하나둘 들어차고 있다.
잠시 후면 이곳 야구장 주변이 팬들이 몰고 온 자동차로 가득 들어차게 될 것이다.
인근에서 온 LA에인절스의 팬들, 원정 나온 시애틀 팬들, 그리고 한수혁의 홈런 신기록을 보기 위해 모여든 라이트 팬들까지.
“오늘은 꼭 홈런이 나와야 할 텐데…….”
지금 이 순간 민예린이 바라는 건 단 하나, 한수혁의 홈런 신기록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루라도 빨리 한수혁이 신기록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야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한수혁이 즐거울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저쪽 맞지?”
“응, 예린아. 맞네.”
매니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민예린이 원정 선수단이 드나드는 게이트를 향해 걸음 속도를 높였다.
저 멀리, 트레이닝복 차림의 한수혁이 눈에 띄었다.
얼굴까지는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그가 한수혁이라는 걸 알수 있었다.
“오빠!”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한수혁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한수혁이 이쪽으로 휙 방향을 틀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민예린의 입가에 큰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그때,
끼이이이익!
“아아악!”
“어! 뭐야! 예린아!”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매니저가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별 일은 아니었다.
혼잡한 주차장에서 속도를 높이던 차가 어린아이 하나를 발견하고 급정거를 했고, 마침 옆에 있던 한수혁이 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을 뿐이다.
그런데, 민예린의 반응이 너무 이상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아니, 눈앞에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한수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린아, 예린아? 예린아! 왜 이래, 야, 정신 차려. 무슨 일이야? 응? 어디 안 좋아? 병원으로 갈까?”
당황한 매니저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어쩔 줄을 몰라 했고, 뒤늦게 그녀의 상황을 알게 된 한수혁이 전력을 다해 이쪽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민예린은 창백한 얼굴로 한수혁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예린아! 매니저님, 얘 왜 이러죠?”
“모르겠어요.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주저앉아서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예린아! 예린아!”
“안 되겠다. 매니저님, 얘 데리고 병원부터 가보세요. 그게 나을 거 같네요.”
“네? 아, 네, 그렇죠. 병원. 알겠습니다. 진짜 그게 낫겠네요. 예린아, 내 손 잡아봐. 일단 일어서자, 응?”
매니저가 내민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민예린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냐, 별 일 아니야. 병원은 무슨, 나 괜찮아.”
“야,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너 얼굴이 완전 창백해. 기절했다 쓰러졌을 때랑 똑같다고. 일단 병원부터 가보자.”
“아냐, 잠깐 어지러워서 그랬어.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봐. 이제 괜찮아.”
“그래? 아니, 수면이 부족한데 왜 비명을… 음, 혈색이 좀 돌아온 것 같기도 하고. 진짜 괜찮아?”
“응, 괜찮아. 수혁 오빠, 저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혀 안 괜찮아 보여. 병원부터 가라니까.”
“아뇨, 저 원래 빈혈이 좀 있잖아요. 괜찮아요. 이 정도로 매번 병원 가면 저 일상생활 불가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시애틀 돌아가면 주치의에게 가볼게요. 그럼 됐죠?”
“음, 불안한데,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야구장 들어가되, 조금이라도 이상 생기면 바로 병원으로 가는 걸로. 매니저님, 옆에서 잘 좀 봐주세요.”
“물론이죠, 한수혁 선수, 저만 믿으세요. 오늘 경기 잘하시고요.”
“감사합니다. 예린아, 그럼 나 들어간다.”
“네, 아, 오빠, 이거, 도시락 가져가셔야죠.”
“아, 맞다. 그거 받으러 온 거지. 고맙다. 잘 먹을게.”
“별 말씀을요. 들어가시고 경기 끝나고 봐요.”
“그래.”
민예린에게서 도시락을 받아 든 한수혁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구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민예린,
그런 그녀의 눈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이상해. 이건 대체 누구의 기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