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4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41화(342/412)
#341. 그 소원 이루어질 거다
그냥,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오후였다.
시즌 막판까지 토론토 제이스와 마지막 와일드카드를 놓고 경쟁 중인 LA에인절스와 우리의 경기는 시종일관 치열한 투수전으로 진행되었다.
이젠 어느 팀의 3선발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진정한 너클볼러로 각성한 마이크 워렌이 에인절스의 타선을 6이닝 2실점으로 막는 동안 우리는 토니의 적시타와 척 클락의 희생플라이로 2점을 냈다.
오늘도 나는 3타석 모두 볼넷으로 출루했다.
내일 경기 선발로 나설 예정인 류한결 선배와 몇 번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가에 깃든 씁쓸한 표정이 오늘 나에 대한 에인절스의 접근 방법을 고스란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플레이!”
그렇게 2 대 2,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7회 초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내 네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고의자동사구가 이루어졌다.
“타자, 1루로.”
“우우우우우! 진짜 한심해서 못 봐주겠군!”
“LA 이 샌님들아! 이것도 야구냐! 어? 야구야?”
“빌어먹을 에인절스 개자식들, 엿이나 처먹어!”
홈런볼을 잡기 위해 나비 채를 들고 몰려든 각양각색의 야구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야유를 퍼부어댔다.
하지만 독한 마음을 먹은 에인절스의 배터리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경기를 이어갔다.
토론토 제이스와 고작 승률 1푼 차이로 엎치락뒤치락 하는 상황인 만큼 팬들의 비난과 야유 정도는 그냥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이봐, 한, 솔직히 말하는 건데 너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그냥 우리는 이 경기에서 이기고 싶을 뿐이야.”
“알아, 그러니 닥치고 야구나 하자고.”
“좋아, 이런 상황에서 만난 게 아니었다면 더 재미있는 경기가 됐을 텐데.”
1루에 도착하니 에인절스의 베테랑 1루수인 레이몬드 퍼킨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알고 있다. 내가 투수라 해도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70개가 넘는 홈런을 기록 중인 타자와 승부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이대로 정규시즌이 끝나도 나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너무 견제를 받다 보니 조금 지치는 기분이랄까.
파앙
“세이프!”
그 와중에 내 발까지 신경을 쓰는 것인지 1루를 향해 몇 차례 견제구가 날아왔다.
견제구를 피해 스타트와 복귀를 반복하던 그때,
예린이와 눈이 마주쳤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1루 내야석 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 애와.
극성스러운 홈팬들이 몰려드는 자리인 만큼 웬만하면 다른 곳에 앉으라고 몇 번을 말했건만, 이상하게도 이곳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할 때면 항상 저 자리에 앉는 예린이다.
묘한 기분이 든다.
생각해보면 예전의 그녀 역시 그랬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항상 1루 쪽에 앉곤 했지.
파앙
“스트라이크!”
7회를 마무리하기 위한 초구가 날아들고, 다시 1루 베이스로 돌아와 예린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순간,
“음……!”
난생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기분, 당장이라도 속에 있는 걸 모두 게워낼 것 같은 울렁거림, 그리고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잇따라 찾아왔다.
그 생경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봐? 한? 왜 그래? 괜찮아? 이런 젠장, 타임! 타임!”
내 이상을 눈치챈 주루 코치가 재빠르게 타임을 요청하고 덕아웃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트레이너! 이쪽으로! 빨리! 한이 이상해!”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크게 울리는지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만 소리치라고 말하고 싶건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제기랄, 한! 나를 봐. 이쪽을 봐. 그래, 괜찮아?”
“괜찮은 거야? 응? 괜찮은 거지?”
“잠시만요, 한! 이봐!”
마치 동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그들이 외치는 말들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라운드에 주저앉은 채 예린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찮…….”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안전망에 달라붙어 나를 향해 뭔가 소리치고 있는 그 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채 그 애를 바라볼 뿐이었다.
“안 되겠어. 그냥 교체 사인을 내야 할 것 같은데?”
“그래? 그 정도야?”
아니라고,
교체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마치 예린이에게 종속된 무언가처럼 그 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찌이이잉
모든 청각이 차단되는 것 같은 기분 나쁜 공명음과 이명이 동시에 날 덮쳐왔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불쌍한 사람, 나는 당신이 좀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회귀 전 내 삶에 유일하게 나를 인간답게 대해주던 그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그렇기에 이제는 그냥 잊기로 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이잉
그 목소리는 또 한 번의 이명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내 기억 속에 아직 선명히 남아 있는 그녀의 얼굴이 하나하나, 마치 조각처럼 차례로 떠올랐다.
그렇게 떠오른 조각들이 하나하나 합쳐지더니 나를 바라본 채 뭔가를 소리치고 있는 예린이의 얼굴과 겹쳐졌다.
“……!”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유 같은 건 모른다. 원리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조차 없다.
그냥 알게 되었다.
내가 찾던 그녀, 그리고 민예린.
그 둘이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다는 걸,
아니, 어쩌면 둘이 하나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걸.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인종, 생김새, 무엇 하나 일치하는 게 없다.
그나마 가정해볼 수 있는 건 딱 하나.
그녀도 나처럼 회귀를 했다면?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걸 나는 너무나도 잘 안다.
솔직하다 못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예린이의 성격을 감안하면, 그 애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미 내가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뭘까?
“한? 한? 아무래도 대주자를 불러야겠어. 일단 일어나보라고.”
“…괜찮아요.”
“음? 정말? 정말 괜찮은 거야?”
“순간적으로 좀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괜찮습니다.”
“아냐, 아무리 봐도 그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진짜 괜찮습니다. 체력이 떨어져서 그래요. 아직 동점인데 제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음… 좋아, 그럼 이제부터 내가 널 주시할 거야. 조금이라도 이상한 거 같으면 바로 교체 요청을 할 거고.”
“그러시죠. 저도 무리해서 뛸 생각은 없으니까요. 정말 괜찮아서 그런 겁니다.”
“좋아, 심판, 경기 재개해도 될 거 같습니다.”
내가 아무 일도 없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트레이너가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경기가 재개되었고, 토니가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되며 이번 이닝 역시 득점 없이 끝나고 말았다.
* * *
“정말 괜찮은 거지?”
“전혀 문제없습니다. 그냥 잠깐 그랬던 겁니다, 감독님.”
“좋아, 자네 판단을 존중하지. 대신 경기 끝나는 대로 바로 검사는 받아보자고.”
“알겠습니다.”
내가 1루 베이스 위에서 잠깐 정신을 놓은 후 2이닝이 훌쩍 지나갔다.
그라운드 위에서 수비를 하며 다시 한 번 아까 그 순간을 떠올렸다.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어떤 이유로 예전 그녀와 예린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예린이라는 것이다.
이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사실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따아악!
9회 초, 시애틀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
선두 타자로 나선 데릭이 좌익수 앞으로 떨어지는 깨끗한 안타를 뽑아내고 1루로 출루했다.
나는 심판에게 양해를 구하고 타석이 아닌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잠시만, 죄송합니다. 심판, 아주 잠시만.”
내가 달려간 곳은 예린이가 서 있는 1루 안전망 앞이었다.
“예린아!”
“어? 오빠? 왜요? 타석에 안 들어가고 여긴 왜요?”
“됐고, 소원 하나만 말해봐. 빨리, 시간 없어.”
“소원이요? 음… 갑자기?”
“그래, 아무 거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는지, 아니면 주변에서 바라보는 다른 관중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예린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닫혔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순간 내 소원은… 오빠가 빨리 홈런 기록 세워버리고, 부담 벗어던지고, 기왕이면 시애틀이 우승도 하고, 헤헤, 뭐 그 정도? 소원이라고 하긴 좀 그렇죠?”
“아니, 충분해. 그 소원 이루어질 거다.”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서둘러 타석으로 돌아왔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시계를 보던 주심이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한 번만 더 그러면 경고야.”
“죄송합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 있었거든요.”
“흠, 그래. 자네가 심판을 존중한다는 건 잘 알고 있어. 그러니 이번 한 번은 넘어가도록 하지.”
기분이 풀린 주심이 경기재개를 명하자 나와 데릭을 신경질적으로 번갈아 바라보던 에인절스의 마무리 투수가 신중한 자세로 투구동작에 들어갔다.
오늘 나는 네 번의 타석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배트를 휘둘러보지 못했다.
하지만 9회 초 2 대 2 동점상황, 무사 1루 상황에서 자동고의사구가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맞히기도 힘들고, 설사 맞아도 병살타를 유도할 수 있는 유인구가 날아올 것이다. 정 안 되면 볼넷이 되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담은.
나는 그간 투수들의 집중견제에 시달리며 그런 공들을 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상대 투수들이 던지는 나쁜 공에 계속 이끌려 다니다가는 포스트 시즌에서의 타격감까지 망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야 깨닫게 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람,
민예린, 그 아이가 말했다.
내가 하루라도 빨리 홈런 기록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시애틀이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그 애의 입에서 처음 나온 소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들어준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상대 투수의 투구 레퍼토리를 감할 때 무사 주자 1루 상황에서 우타자에게 던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공은 바깥쪽 낮은 코스 커터.
저들의 의도대로 맞히기도 힘들고, 맞혀봐야 내야 땅볼이 나올 확률이 높은 그 공을 치기 위해 타격 준비에 들어간다.
툭툭
디딤발을 놓을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배터박스 우측 상단 위치의 흙을 잘 고르고,
타격 순간, 손목에 가해질 힘을 계산해 미리 그 압력에 대비하고,
결국 관건은 손목 힘이다.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공과 배트가 만나는 순간 내 손목의 힘이 버텨주지 못하면 내야 땅볼, 혹은 1루 측 파울이 될 게 뻔한 일이니까.
신중해야 한다.
내가 빠져나가는 공마저 건드리려 한다는 걸 알면 상대 배터리는 아예 배트가 닿지 않는 곳으로 공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기회는 딱 한 번,
드드득
내가 평생 동안 맞이한 그 어떤 타석보다 더 긴장되는 순간이다.
저 애가 내게 처음으로 한 부탁, 나에게는 그걸 들어줄 의무와 책임이 있다.
때린다, 때려낸다.
파앗!
마침내 투수의 손끝에서 떠난 하얀색 야구공이 매끄러운 궤적을 그리며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따아아아악!
부드러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든 불합리함을 오직 힘 하나로 돌파하려는 의지가 담긴 내 스윙이 그 공과 한 점에서 만났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가, 간다, 간다, 간다아아아!”
“제발 이쪽으로! 이쪽으로, 이쪽으로!”
그라운드 안 모든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춘 채 내가 때려낸 타구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눈에 봐도 외야수가 잡기에는 무리가 있는 큰 타구, 이제 남은 건 저 공이 파울 라인 안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냐 뿐이었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타구가 우익수의 머리를 넘기며 천천히 스핀을 먹어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움직임을 보였다.
“안 돼! 가지 마! 이리, 이리 오라고!”
“오, 하느님!”
우측 외야에 앉은 관중들이 나비 채를 흔들며 사방으로 뛰어다녔고, 덕아웃에 앉아 있는 우리 팀 선수들이 모두 뛰어 나와 타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측 외야를 비행하던 타구가 마침내,
터어엉!
우측 폴대에 상단에 직격하는 순간,
“됐다아아아아아!”
“흐아아아아!
“드디어! 하느님, 맙소사! 이게 꿈은 아니겠지!”
시즌 73호,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1위,
약물과 오명으로 얼룩졌던 그 기록 위에 내 이름이 덧대여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