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4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43화(344/412)
#343. 시애틀의 왕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야구를 좋아하게 된 걸까?
물론 가장 큰 영향은 야구팬, 보다 정확히 말하면 워리어스 팬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이겠지만 뭔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10살짜리 꼬맹이에게 뭔가를 좋아하게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어머니의 영향이 있었다 해도 결국 나 스스로 야구가 갖고 있는 무언가에 끌렸다는 소리다.
음,
한 가지는 기억났다.
어머니 손을 잡고 잠실야구장을 찾을 때마다 느꼈던 청량한 잔디 내음.
어릴 때부터 아파트에 살았던 나는 탁 트인 푸른 잔디 앞에 설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해방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가끔은 술 취한 관중들이 욕을 하고, 불붙은 휴지통이 하늘을 날고, 가끔은 정신나간 인간들이 안전망을 타고 오르는 일도 있었지만 내게 야구장은 세상에서 가장 넓고 기분 좋은 놀이터였던 셈이다.
“좋아, 한 점 더 내보자. 할 수 있어!”
“고! 고! 매리너스!”
하지만 아쉽게도 철이 든 후 나는 진정으로 야구를 즐겨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언제나 내게 야구는 목표이자 숙제였을 뿐, 그걸 즐긴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내 평생의 숙원과도 같았던 워리어스 왕조 건설의 기틀을 마련하고, 내가 선수로서 어디까지 할 수 있냐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모든 과정이 즐거웠냐고 묻는다면?
글쎄, 아마도 아닌 것 같다.
예린이의 소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아이가 말했다.
내가 빨리 홈런 기록을 달성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기왕이면 우승도 했으면 좋겠다고.
깊은 생각 없이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내가 가장 잘하는 일로 그 아이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타석에 들어선 것만으로 온몸에 청량한 기운이 차 오른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야구장을 찾았을 때처럼 말이다.
“두고 봐. 우리도 계속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좋은 생각이야. 어디 한번 해보라고, 친구.”
두 번째 타석, 아직 얼굴에 앳된 끼가 남아 있는 에인절스 포수의 말을 가볍게 받아주고 마운드 위 류한결 선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1회 초 우리는 데릭의 3루타와 토니의 희생플라이로 두 점을 선취했다.
동점이면 모를까, 두 점 차로 뒤진 상황에서 무사에 선두 타자를 내보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올 시즌 내가 5할이 넘는 출루율을 기록하고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두 번에 한 번은 출루에 실패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류한결, 아니, 에인절스 벤치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승부를 걸어올 것이다.
어쩌면 오늘 경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승부.
그 한 번의 기회를 장타로 연결한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대놓고 홈런을 치라고 던져주는 올스타전 홈런더비에서조차 한 번 막히면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게 홈런이니까.
극도의 집중력과 배트 컨트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것이고, 난 이 세상 누구보다 그걸 잘 해낼 준비가 된 상태였다.
스르륵
KBO 시절 포심과 체인지업을 주 무기로 싱커와 커브, 슬라이더를 섞어 던지던 류한결 선배는 메이저리그 3년 차를 맞아 투구 패턴에 약간의 변화를 준 상태다.
예전보다 체인지업의 구사 비율이 떨어진 대신 역회전 공인 싱커의 비중이 훨씬 높아졌다.
머릿속으로 그가 던질 초구부터 승부구까지의 투구 패턴에 대한 계산을 마쳤다.
장타를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타이밍은?
초구.
노린다.
드드득
우타자에게는 가장 먼 바깥쪽 낮은 코스를 훑고 지나갈 류한결의 싱커.
내 목표는 바로 그것이다.
그 공을 장타로 연결하다 보면 손목에 약간 무리가 갈 수도 있지만,
괜찮다.
홈런 신기록을 세울 때까지만, 그리고 타이가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이런 순간을 위해 나는 지난 4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육체를 단련해왔다.
이제 그 육체를 써먹어야 하는 순간이다.
끄덕끄덕
마운드 위 류한결 선배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그가 뭔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언제 봐도 깔끔하고 시원한 그의 투구 폼.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최고의 좌완 투수로 기록될 그의 손끝에서 하얀 공 하나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하나, 그리고 둘,
따아아아아악!
– 어어어어어! 이거! 이거? 이거! 가나요? 가나요! 네! 갑니다! 한수혁 선수가 친 타구가 계속, 계속 날아갑니다! 타구를 쫓아가는 걸 포기한 우익수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봅니다! 홈런! 홈런! 젠장! 스티브! 드디어 터졌어요! 메이저리그 역사가 새로 써지는 순간입니다! 빌어먹을 74호 홈런이 드디어 나왔단 말이에요!
– 알아요! 나도 아니까 그만 소리 지르… 그래요, 그게 될 리가 없겠군요. 우리가 조용히 얘기했다가는 관중들의 내지르는 함성 때문에 아무것도 안 들리겠어요. 저도 모르겠네요. 자, 다들 들리십니까? 여기 에인절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팬들의 목소리가! 지금 이곳에서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약물로 얼룩졌던 메이저리그의 부끄러운 역사가 저 멀리 한국에서 날아온 한 청년에 의해 29년 만에 깨어졌습니다! 이제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타이틀은 시애틀 매리너스의 새로운 선장, 한수혁 선수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 * *
“넌 정말 잔인한 놈이여.”
“하하…….”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흠.”
“형, 쪽팔리니까 그만해요. 여기 민예린 씨도 계신데 눈물도 그만 흘리고요.”
“뭐셔?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이건 그냥 음식이 너무 매워서!”
“됐고, 이거나 드세요. 예린 씨도 어서 드시고요. 일단 먹고 얘기합시다.”
이동일이 배정된 틈을 타 예린이와 나는 오래 전부터 미뤄왔던 류한결 선배와의 저녁 식사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하필이면 우리가 에인절스를 스윕하며 19연승을 달성한, 거기에 류한결 선배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달성한 그날에 말이다.
원망이 가득 담긴 류한결 선배의 눈빛이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뭐, 음식이 맛있으니 됐다. 안 그래도 입맛 없었는데 갈비찜이 입에 짝짝 붙네.
“류한결 선수님 어머님이 해주신 음식 저희가 다 먹는 거 아닌가요? 괜히 민폐 끼쳐드리는 거 같아요.”
“어이구,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제수씨, 정 미안하시면 나중에 소개팅이라도 한 번…….”
“제수씨요? 어머,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왜요? 수혁이 저놈이 아직 프로포즈 안 한 거예요? 야, 인마, 예린 씨랑 너 사이, 우리나라를 넘어 미국인들까지 전부 다 아는데 대체 뭐 하는…….”
“어휴, 형은 또 주책을. 예린 씨 나이가 몇인데 벌써 결혼 타령이에요? 안 그래요, 예린 씨?”
“아뇨! 저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끝났지만… 혹시나 오빠가…….”
이상하게 꿍짝이 잘 맞는 류한결 선배와 예린이를 그냥 내버려두고 집안을 슥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류한결 선배가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패전 투수가 된 상태에서 상대 팀 타자와 식사하는 모습을 노출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 급하게 그의 집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사실 나도 이게 마음이 더 편하다. 이런 날 LA 시내를 돌아다니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다. 류한결 선배의 어머니가 해주고 가셨다는 갈비찜도 꽤 맛있고.
“그나저나 수혁아, 너 홈런 몇 개까지 더 칠 생각이냐? 아무리 못해도 한 개는 더 쳐야 한다. 이 상태로 시즌이 끝나면 저 형 쪽팔려서 한국 안 가겠다고 할지도 몰라.”
“홈런이요? 힘닿는 만큼 최대한 쳐봐야죠.”
“호오, 웬일이래? 그냥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말 줄 알았는데.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80개 찍어버려. 너도 잘 알겠지만 언제 다시 이런 순간이 올지 모르니까.”
이찬호 선배가 밀어주는 갈비찜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지인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저녁식사, 그리고 가볍게 주고받는 농담.
정말 별 것 아닌 이런 일이 예전에는 왜 그렇게 어려웠던 걸까?
정말 소개팅을 해주기로 한 것인지, 류한결 선배와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주고받고 있는 예린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만약 예린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니, 저 애가 먼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나는 대체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 * *
[마침내 깨진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 74호 홈런 터뜨린 한수혁 “경기 전 내게 힘을 불어넣어 준 내 소중한 사람, 예린이에게 가장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물론 그 다음으로 고마운 건 팬들이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올 시즌 우리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팀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믿고 지켜봐주길 바란다.”] [시애틀 팬들 “한수혁과 민예린은 시애틀의 왕과 왕비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우리는 그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에인절스전 4 대 2 승리로 시즌 19연승 달린 시애틀 매리너스, 메이저리그 최다 연승 기록 및 아메리칸 리그 승률 1위를 향해 거침없는 질주] [한수혁에게 74호 홈런 맞은 LA 에인절스 류한결 “수혁이가 그러더라. 시즌이 끝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홈런을 추가해서 최다 홈런 허용 투수 명단에서 내 이름을 지워주겠다고.”]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74호 홈런 볼의 주인은? 시애틀에서 날아온 매리너스의 광팬 니콜라스 모즐리(65) “내가 응원하는 팀이 평생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진출을 바라보고 있다. 홈런 볼? 당연히 한수혁에게 돌려줄 것이다. 그는 내게 홈런 볼 이상의 중요하고 값진 것을 안겨준 은인이니까.”] [PHOTO: 집으로 돌아온 매리너스 선수단, 영웅들을 맞아 환호하는 시민들] [2013년 시호크스(NFL) 이후 17년 만에 찾아온 시애틀의 우승 기회, 시애틀 시장 에드워즈 호프만 “매리너스가 사상 첫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할 경우 시 차원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들을 지원할 것.”] [팀 창단 이후 두 번째 100승 시즌을 맞이한 시애틀 매리너스의 마지막 일정은? 텍사스 3연전, 그리고 템파베이와의 3연전]“좋아, 오늘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먼저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하지. 그러니 내가 마운드에 있는 동안 어떻게든 점수를 내줘. 다들 부탁한다.”
“당연하지, 주장.”
포스트시즌 전 마지막 선발 일정을 맞이하게 된 라이언 티보우가 팀원들을 향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가자! 매리너스!”
“오오오!”
어릴 때부터 시애틀 매리너스의 팬이었던, 그리고 시애틀 팜에서 키워낸 최고의 투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차근차근 에이스 코스를 밟아온 라이언에게 오늘 경기는 여러모로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 연승과 아메리칸 리그 승률 1위로의 도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두 가지 목표를 위한 홈에서의 첫 걸음을 자신이 맡게 되었다는 데 대해 라이언은 크게 고무되었다.
오클랜드전에서의 사고로 인해 타이 존슨이 빠질 때만 해도 자칫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이후 매리너스 선수단은 더욱 단단하게 하나로 뭉쳤고, 누구 하나 빠졌다고 해서 쉽게 넘볼 수 없는 팀이란 걸 스스로 증명해냈다.
라이언의 시선이 오늘 3루수로 출전한 한수혁에게로 향했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저 녀석이 매리너스에 입단하면서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다른 팀 베테랑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던 젊은 선수들이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고, 시애틀만 보면 시비를 걸어대던 거친 녀석들이 되려 우리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플레이!”
심판의 경기 개시 사인과 함께 라이언이 힘찬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그의 손끝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공이 발사되었다.
파앙
“스트라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