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4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45화(346/412)
#345. 누군가의 마지막
‘좋아,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9월 확장 로스터 때 콜업되어 그간 중간 계투로 몇 차례 등판했던 21세의 루키 사무엘 라모스.
올 시즌 투수 한수혁의 엄청난 활약을 보며 그를 인생의 스승이자 우상으로 생각하게 된 그가 선발등판 준비를 끝마쳤다.
“사무엘, 투구 수가 좀 늘어나더라도 최대한 신중하게 가야 할 거 같아. 내 말 이해했지?”
“동의해, 친구. 모든 타자가 내 마지막 상대다 생각하고 던질 생각이야.”
“좋아.”
그런 사무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포수 레너드 존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올 시즌 빅리그에 데뷔한 풋내기 포수이지만 그는 한수혁과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추며 스스로의 기량을 입증해낸 검증된 포수이기도 하다.
한수혁과 배터리를 이룰 때는 빠른 승부를 가져가는 걸 즐기던 그가 자신에게는 최대한 많은 유인구를 던지자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타석에 선 타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선봉장, 지난 시즌 중견수 부문 골드글러브에 빛나는 맥스 로렌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올 시즌, 시애틀의 데릭 플레밍과 함께 최고의 중견수 자리를 다투고 있는 텍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선발로서 맞이한 첫 타자가 그런 거물이라는 게 너무나 부담스러워진 사무엘이 고개를 살짝 돌려 3루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그가 서 있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경쟁 상대조차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시즌을 보낸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 한수혁이.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한수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갑자기 가슴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한참 동안 고민하던 사무엘은 마침내 그 해답을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용기였다.
용기,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감정.
“가자!”
“오오! 좋아! 루키, 화끈하군!”
“고! 고! 매리너스!”
투수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함성을 동료들이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 순간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몸 쪽, 공 한 개 정도 빠지는 포심.’
고개를 끄덕인 사무엘이 힘찬 기세로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빼려던 공의 제구가 흔들리며 존 안으로 밀려 들어왔지만 타자는 배트를 내밀지 못했다.
103마일,
전광판에 찍힌 숫자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 * *
“바비, 오늘 경기는 온전히 너에게 맡기지.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덕아웃에서 먼저 사인이 나가는 경우는 없을 거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감독님.”
“좋아, 다시 한 번 축하하네. 자네의 빅리그 마지막 경기를.”
이미 한참 전에 와일드카드 쟁탈전에서 밀려난 텍사스의 마지막 목표는 내년 시즌에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에 있었다.
물론 그 전에 하나 해야 할 일이 있긴 했다.
비록 단 한 번도 최고라 불린 적은 없지만 루키 시즌부터 지금까지, 15년이라는 세월을 텍사스 한 팀에서만 뛴 베테랑 투수 바비 듀란트.
그의 현역 마지막 선발 등판경기가 무사히 치러져야 했다.
일정이 조금 꼬인 탓에 홈에서 은퇴 경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텍사스 구단은 바비의 헌신을 기념하기 위한 조촐한 식전 행사를 준비했고, 시애틀 역시 여기에 적극 협조했다.
그렇게 생애 마지막 선발 등판을 준비한 바비 듀란트가 1회 말 시애틀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오늘 경기는 시작부터 텍사스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정규 시즌 등판 일정을 마감한 한수혁을 대신해 등판한 루키.
그가 1회부터 103마일의 광속구를 뻥뻥 뿌려대며 텍사스의 세 타자를 연속 범타로 처리했다.
덕아웃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바비 듀란트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물론 자신은 전성기에도 103마일의 공을 던지지는 못했다.
자신과 사무엘 간의 공통점이라고는 같은 좌완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광속구가 아닌 사무엘의 젊음, 그것을 부러워하는 그런 마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언제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누군가 새로운 야구 인생을 시작하는 지금, 자신은 길고 길었던 현역 생활을 정리해야만 한다.
[1번 타자 서드베이스맨 한수혁]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듯한 강렬한 베이스 연주음과 함께 시애틀의 리드오프가 타석에 들어섰다.
시즌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 0.421의 타율에 출루율 0.534, 장타율 1.027, 홈런 75개라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타자.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저게 정말 인간이 맞긴 한 건가?
하필이면 은퇴 경기에 저런 괴물과 상대하게 된 게 불행일 수도 있지만,
글쎄, 바비 듀란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지난 15년간 자신은 단 한 번도 메이저리그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평범한 투수였다.
4선발, 혹은 5선발로 팀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온 그런 존재.
경기 전 감독은 말했다.
오늘 경기는 오롯이 자신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덕아웃에서 자동고의사구를 요청할 일도, 혹은 고의사구를 지시할 일도 없을 거라고, 타자와 어떻게 상대하든 그건 모두 바비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플레이!”
타석에 들어선 한수혁의 표정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시즌 내내 마치 초월적인 존재가 하찮은 존재들을 바라보듯 투수들을 내려다보던 그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야구 선수로서 모든 것을 다 이룬 덕일까.
피식.
그 순간 바비는 한수혁에게 던질 공을 결정할 수 있었다.
최고의 선수에게 어울리는, 자신이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을 던질 것이다.
끄덕
사인을 받은 포수가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고 포수 미트를 앞으로 내밀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바비가 힘찬 자세로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스륵
그의 손끝에서 바비의 15년 야구 인생을 담은 최고의 공이 한수혁을 향해 쏘아졌다.
바깥쪽 낮은 코스로 맹렬하게 파고드는 89마일 포심.
그리고,
따아아아아악!
소리만 들어도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엄청난 타격음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바비는 굳이 고개를 돌려 타구를 확인하지 않았다.
타석에 선 한수혁이 자신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다른 팀 선수들에게는 세상 다시없을 폭군처럼 굴던 한수혁의 진심 어린 모습에 바비의 얼굴에도 비로소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 * *
“좋아, 이제 자네 차례야. 우리 루키의 선발 데뷔 승을 만들어주자고.”
“물론입니다, 보스.”
현역 마지막 선발등판에 나선 텍사스의 베테랑 바비 듀란트와 선발 맞대결에 나선 시애틀의 루키 사무엘 라모스는 5회까지 텍사스에 단 두 점만을 내주는 기대 이상의 호투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사이 한수혁은 매 타석 정면승부를 걸어오는 베테랑을 상대로 홈런 1개 포함 3타수 3안타, 3득점을 기록하며 팀이 올린 모든 득점을 홀로 책임졌다.
그렇게 시애틀이 한 점 차로 리드하는 가운데 벤자민 감독은 5회까지 91개의 공을 던진 사무엘을 내리고, 대신 말린스에서 데려온 롱릴리프 칼튼 벨을 마운드에 올렸다.
메이저리그 최다 연승 기록까지 단 2승만이 남은 상황,
하지만 벤자민은 남은 경기에서 절대 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시애틀에게 필요한 건 최다 연승 기록이 아닌 사상 첫 월드시리즈 진출, 그리고 우승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계획대로 철저히 마운드를 운용해야 한다.
여기서 욕심이 난다고 다음 날 선발을 당겨쓰거나 마무리 투수를 미리 올렸다가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면 삽시간에 팀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믿을 차례다. 지난 한 시즌 동안 자신이 지도한 선수들을 말이다.
따악!
“아웃!”
다행히도 칼튼 벨은 그런 벤자민 감독의 믿음에 결과로 보답했다.
시애틀이 더 이상 추가점을 내지 못하고 6회와 7회를 보내는 사이, 칼튼 벨 역시 매 이닝 주자를 내면서도 점수만은 주지 않았고, 그렇게 3 대 2 팽팽한 접전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8회 초가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시애틀이 애덤 머피를 내보낼 것이라 예상했다.
여전히 믿음직하지 못한 시애틀의 뒷문을 홀로 지키며 1.9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
하지만 벤자민 감독의 선택은 애덤이 아닌 댈빈 슈워츠였다.
시즌 중반까지 필승조와 임시 마무리로 뛰며 수없이 많은 승리를 날려버린 젊고 싱싱한 좌완 투수.
“댈빈, 부담 갖지 마. 그냥 평소와 같은 시즌의 한 경기일 뿐이야.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우린 널 믿어.”
“알겠습니다. 보스.”
벤자민 감독이 생각하는 포스트시즌 최상의 시나리오는 리그 정상급이라 불리는 1, 2, 3, 4선발이 완벽하게 한 경기씩을 책임지는, 가능한 중간계투진의 투입 없이 선발에서 바로 마무리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야구라는 게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결국 포스트시즌에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팀의 필승조라 할 수 있는 댈빈 슈워츠와 조나 버로우, 제이크 하워드 같은 투수들이 어느 정도 자신의 몫을 해줘야 한다.
투수는 얻어맞으면서 큰다.
설사 오늘 경기가 자신의 이 선택으로 인해 물거품이 된다 해도 벤자민 감독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누가 뭐래도 댈빈 슈워츠는 현재 시애틀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였으니까.
하지만,
따아아악!
8회 초 투아웃까지 잘 잡아낸 댈빈 슈워츠가 텍사스의 9번 타자에게 홈런을 허용하는 순간,
벤자민 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 *
그것은 마치 운명의 장난과도 같았다.
현역 마지막 선발로 등판한 투수가 9이닝 동안 단 3점만 내주며 완투 페이스를 보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하필이면 9회 말 마지막 위기에서 당대 최고의 타자를 상대하게 되었다는 것.
3 대 3으로 팽팽하게 맞선 두 팀, 감독의 배려 속에 또 한 번 마운드에 오른 바비 듀란트가 시애틀의 5번, 6번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냈다.
텍사스 감독은 약속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9회까지는 온전히 그에게 맡기겠다고.
이제 그에게 필요한 건 아웃카운트 단 하나.
그것만 올리면 그는 마지막 선발 등판 경기에서 9이닝 3실점으로 호투한, 제법 괜찮은 투수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긴장이 풀어진 것일까?
아직 체력은 충분하건만 갑작스럽게 제구가 흔들리며 시애틀의 7, 8, 9 세 명의 타자에게 연속 출루를 허용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2사 만루 위기.
그리고 다시 그가 타석에 들어섰다.
오늘 홈런, 3루타, 2루타까지 3개의 안타를 기록하며 홀로 시애틀의 공격을 이끈 이 시대 최고의 타자 한수혁.
바비 듀란트가 자기도 모르게 덕아웃을 바라보았다.
9회를 보장받긴 했지만 여기서 만약 감독이 팀의 승리를 위해 마운드에서 내려가라 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텍사스의 감독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순간, 바비 듀란트의 몸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아드레날린이 마구 솟구쳤다.
오늘은 그의 야구 인생 마지막 경기이다.
언제나 어깨 상태를 점검하고, 작은 부상에도 시즌 아웃을 걱정해야 했던 나이 든 투수는 이제 없다.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건 어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타자를 잡아낼 수 있는 투수뿐이었다.
끄덕
포수를 향해 먼저 사인을 보낸 바비 듀란트가 자신의 현역 마지막이 될 공을 던지기 위해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이제는 너무 많이 반복해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진 투구 폼.
나이를 먹으며 역동성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완숙함이 극에 달한 투구 폼에서 하얀 공 하나가 떠올랐고,
따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그 공이 아무도 없는 3루 베이스 위를 타고 넘는 순간,
바비 듀란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당신의 은총이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텍사스 마운드를 15년간이나 지켜온 베테랑 투수의 마지막 은퇴 경기, 그리고 한수혁의 시즌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