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50)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49화(350/412)
#349. 벤치클리어링 공헌도
“사장님, 이게 대체……?”
“흠, 다니엘, 자네도 전혀 몰랐나 보군.”
“전혀요. 아니, 진짜 너무 놀라서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동감이야. 이 바닥에서 굴러먹으면서 이렇게 놀란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군.”
“갑자기 깜짝 발표를 한다기에 대체 뭔가 했더니… 오 마이 갓!”
정규시즌의 대단원을 장식할 마지막 경기를 앞둔 시애틀 매리너스 사장실.
다니엘, 그리고 매리너스의 운영을 책임지는 사장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쪽에서도 리그 규정이니 뭐니 이거 저거 검토하느라 시간이 좀 걸린 모양이야.”
“…말 그대로 깜짝 발표군요. 팬들이 많이 놀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 * *
ESPN 전국 중계가 예정된 시애틀 매리너스와 템파베이 레이스 간의 시즌 최종전.
아침 일찍 일어나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한수혁이 민예린의 무릎을 벤 채 오늘 상대할 레이스 투수의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제 승리로 인해 시애틀은 메이저리그 정규시즌 최다 연승 기록을 24경기로 늘렸고, 또 하나의 홈런을 때려낸 한수혁은 빅리그 최초 78홈런의 주인공이 되었다.
오늘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아메리칸 리그 전체 승률 1위, 그러니까 디비전 시리즈 1번 시드 획득을 확정 지은 시애틀 매리너스, 그리고 한수혁.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목표는 시즌 25연승, 그리고 앞으로 그 누구도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80홈런 고지였다.
“예린아. 지금 몇 시지?”
“네, 오빠. 이제 9시 10분이요. 조금 더 누워 있으셔도 돼요.”
“그렇구나. 아, 예린아.”
“네?”
“나 그냥 은퇴할까?”
“풉!”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한수혁의 말에 민예린이 입에 물고 있던 녹차를 그대로 뱉고 말았다.
“으, 으, 으, 은, 은퇴라니요?”
“농담이야. 뭘 그렇게 놀라? 그보다 음… 이거 닦아야겠네. 끄응…….”
얼굴 반쪽에 녹차 세례를 뒤집어쓴 한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하지만 민예린의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농담이라고는 했지만,
왠지 그 말 속 어딘가에 진심이 숨겨져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은퇴라니, 한수혁이 없는 야구라니.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다. 아니,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민예린이 생각하는 야구는 말 그대로 한수혁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오빠가 많이 힘든 건가…….”
한국에서 3년, 그리고 다시 미국에서 1년,
그가 얼마나 많은 걸 이뤄냈고, 그걸 위해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민예린이었다.
투타 겸업을 위해 거의 수도승에 가까운 자세로 매일 매일 자신을 관리하는, 야구는 스포츠가 아닌 레저라 비웃는 이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한수혁.
그런 생활을 4년이나 해왔으니 지칠 때도 됐다 싶었다.
“예린아, 이왕 일어난 김에 슬슬 아침 먹을까? 구장 나갈 준비도 해야 하고.”
“오빠.”
“음?”
“힘 드시면 그만두셔도 돼요. 오빠 남은 인생, 제가 먹여 살릴게요.”
한수혁이 서울 워리어스의 구단주이자, 시애틀 매리너스의 최대 주주라는 걸 아는 단 세 사람. 그중 하나가 민예린이다.
그렇기에 이건 단순히 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민예린은 그저 한수혁이 조금이라도 편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각오를 내비친 것뿐이었다.
피식
그 말을 들은 한수혁은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1% 진심과 99%의 농담이 섞인 그런 말이었다.
힘들긴 하다.
남들은 4년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는 프로에서만 20년의 시간을 보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오늘처럼 유난히 햇살이 따뜻한 날에는,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좋은 날에는,
사랑하는 이의 무릎을 베고 그 바람과 햇살을 즐기는 게 너무 즐거운 날에는,
그냥 모든 걸 그만두고 이대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침 그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그리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가 옆에 있었기에 그런 속마음을 슥 흘려보내본 것뿐이다.
하지만,
“예린아.”
“네?”
“전에 네가 그랬잖아. 내가 야구하는 게 제일 멋있다고? 내 경기를 보러 야구장에 오는 게 세상에서 제일 즐겁다고.”
“네, 네, 맞아요. 그렇게 말했죠. 그때 그건…….”
“됐어. 그거면 충분해. 그냥 한번 해본 소리에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자꾸 그 속에 뭐가 있나 고민하는 거, 그거 진짜 안 좋은 버릇이다. 하지 마. 그보다는 우리 빨리 밥 먹자. 배고프다.”
“오빠…….”
“너도 오늘은 경기 전 행사 때문에 빨리 나가봐야 하잖아. 밥 든든히 먹어.”
한수혁의 뜻하지 않은 말에 잠깐 출렁거렸던 마음이 그가 던진 따뜻한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민예린은 생각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오늘처럼만 지낼 수 있다면,
그가 야구를 하든 안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는 그런 생각이 든다.
어릴 적부터 바쁜 아버지와 단둘이 지내며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에 목 말라왔던,
철이 든 후에는 가수 활동 때문에 개인적인 시간을 거의 가져보지 못했던 민예린.
그녀 역시 한수혁만큼이나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다.
오랜 시간 혼자만의 삶에 갇혀 있던 외로운 아이가 이제야 비로소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으니까.
* * *
“젠장, 이게 다 무슨 일이야? 25연승이 걸린 시즌 마지막 경기 티켓 가격이 고작 10달러라고? 게다가 주차비는 무료?”
“그뿐이야? 우리가 방금 본 민예린 공연만 해도 최소 500달러의 가치를 갖고 있다잖아.”
“미친 게 분명해. 구단주가 연승에 취해 완전히 미쳐버린 거야.”
“흐흐, 알게 뭐야. 우리야 싼 값에 공연도 보고 경기도 보고, 그냥 즐기면 된다고.”
“이러다가 올 시즌 초처럼 또 경영난이니 뭐니 헛소리를 할까 봐 그러지. 차라리 그럴 거면 그냥 티켓을 비싸게 파는 게 낫다고.”
“그건 맞아. 하지만 안심해. 구단주 그룹이 교체되고 나서 꽤나 재정이 안정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까.”
“흠, 믿음은 안 가지만 뭐 어쩔 수 없군. 아, 그나저나 오늘 경기 후 깜짝 발표는 또 뭐야?”
“글쎄, 내 사촌동생이 이 구단 홍보팀에서 일하는데 그놈도 전혀 모르겠다더군.”
시즌 최종전을 기념하는 민예린의 축하공연이 끝나고 그라운드 정리가 한창인 상황.
올 시즌 아메리칸 리그 전체 승률 1위를 차지한 팀의 마지막 경기를 보기 위해, 그리고 한수혁이 때려낼 또 하나의 홈런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팬들.
그들 사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매리너스 클럽하우스에서는 벤자민 감독이 마지막 경기에 나설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어차피 오늘 져도 지구 우승, 그리고 아메리칸 리그 1번 시드는 확정되었으니 괜히 힘 빼지 말고 대충해도 되겠다는 그런 생각.”
“전혀! 감독님! 저희 중에 그런 멍청이는 없습니다. 안 그래, 라이언?”
“그래.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거 보니 없는 거 같아. 데릭.”
“하하.”
“좋아, 다행히도 그런 멍청이는 내 팀에 없는 것 같군. 자, 이 시점에서 내가 할 말은 딱 하나뿐이야. 우린 올 시즌 내내 최고였고, 다가올 포스트시즌에서도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할 거라는 거. 각자 여러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오늘은 딱 하나만 생각하자고. 최고의 팀을 보기 위해 몰려든 최고의 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보여주자는 생각 말이야.”
“알겠습니다! 감독님!”
“좋아, 오늘 스타트 라인업이다. 점수 차가 벌어지면 경기 감각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선수 교체를 할 거야. 선발 명단에 없다고 해서 기죽지 말고, 언제든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두라고. 자, 그럼 다 같이, 고! 매리너스!”
“매리너스!”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아준 감독이 클럽하우스를 빠져 나가고, 그가 있던 자리에 오늘 경기에 선발로 나설 선수들의 이름이 나붙었다.
1번 3루수 한수혁
2번 중견수 데릭 플레밍
3번 우익수 척 클락
4번 지명타자 안토니오 가르시아
5번 좌익수 짐 브라운
6번 1루수 라파엘 오수나
7번 포수 브루스 매튜스
8번 2루수 리암 랜드먼
9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
투수 조나 버로우
한수혁이 리드오프 자리에 서고, 1루수 자리에 타이 존슨 대신 라파엘이 들어간 걸 제외하면 매리너스의 핵심 주전들이 모두 포함된 라인업.
올 시즌 주로 중간계투에서 뛰었던 조나 버로우를 앞세운 시애틀 매리너스가 드디어 2030시즌 최종전을 시작했다.
* * *
지난 시즌 라이언 티보우의 뒤를 이어 매리너스의 2, 3, 4선발로 뛰었던 댈빈 슈워츠, 제이크 하워드, 조나 버로우는 올 시즌 한수혁을 비롯한 이적생들에게 선발 자리를 양보하고 중간계투로 물러나 팀을 위해 헌신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즌 중반까지는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중간계투로 밀려난 세 명의 투수는 새로운 임무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이는 곧 시애틀의 뒷문 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나마 말린스에서 데려온 칼튼 벨이 롱릴리프로 자리 잡고, 하반기가 시작되기 직전 애덤 머피가 합류한 후에야 사정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플레이!”
처음 빅리그로 콜업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성장세를 보여준 젊은 투수 조나 버로우.
내년 시즌, 다시 선발진 합류를 위해 필살의 각오를 다지고 있는 그의 99마일 포심이 레이스 리드오프의 몸 쪽 깊숙한 곳에 날아와 박혔다.
파앙
“스트라이크!”
라이언이나 한수혁만큼은 아니더라도 공의 구위만큼은 시애틀 내에서 손꼽을 수준인 조나 버로우다.
그의 진심이 담긴 공을 잡아낸 브루스가 자기도 모르게 타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 정말 멋진 공이지?”
“떠들 기분 아니니까 입 닥쳐.”
“워워, 왜 그래? 난 그냥 가볍게 물어봤을 뿐인데.”
“너희 팀 3루수가 우리 포수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면 네 입에서 그런 말이 안 나올 거다.”
“흠.”
평소 한수혁이 상대팀 포수들에게 겁을 주고 다닌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브루스가 그쯤에서 말을 멈추고 승부에 집중했다.
생각해보면 정말 웃긴 일이다.
고작 프로 4년 차, 심지어 빅리그에서는 1년 차 루키에 불과한 어린 선수가 상대 팀의 경험 많은 베테랑 포수들을 겁주고 다닌다는 것 말이다.
타자에게서 시선을 거둔 브루스가 투수를 향해 다음 공 사인을 보냈다.
‘다시 한 번, 같은 코스로.’
끄덕
조나 버로우처럼 구속과 구위에 비해 제구력이 부족한 투수와 호흡을 맞출 때는 템포를 조금 빠르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
너무 오래 생각을 하거나, 혹은 투수가 따라오기 힘든 공을 요구할 경우 자칫 자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투수를 믿고, 그가 던지는 공을 믿고,
신속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퍼억!
“으윽!”
물론 그러다 보면 지금처럼 본의 아니게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음, 고의는 아니었지만 내가 대신 사과하지, 친구. 공이 손에서 빠진 것 같아.”
“빌어먹을, 실수라고?”
“이런, 친구.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설마 투수에게 달려갈 건 아니지? 혹시 그런 마음이 들면 저기 3루 쪽을 봐. 그래, 거기. 한이 심각한 표정으로 여길 바라보고 있잖아? 그러니 빨리 1루로 나가라고. 겨우 엉덩이에 맞은 것뿐이잖아.”
“…개자식들.”
엉덩이에 볼을 맞은 레이스 타자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1루로 쩔뚝쩔뚝 걸어 나갔다.
그리고 3루에 있던 한수혁이 마운드 위로 올라가 몇 마디를 건네자 조나 버로우의 안색이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순간 브루스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세이버매트릭스 계산 항목에 벤치 클리어링 능력에 따른 팀 공헌도 항목을 넣어야 하지 않겠냐는 그런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