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5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53화(354/412)
#353. 29년 만에 찾아온 승리
“길게 말하지 않겠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전문가라는 놈들이 우리 팀에 대해 이렇게 떠들어댔지. 온통 물음표 투성이인 그런 팀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정규시즌이 끝난 지금 우리는 어떤가? 그 물음표를 모두 느낌표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내가 이 시애틀이라는 팀에 오래 있던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너희가 역대 최고의 매리너스라는 거다. 혹시 내 말에 이의 있는 사람 있나?”
“없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8년 만에 포스트시즌 경기를 지켜보게 된 팬들 앞에서 오클랜드 저 멍청이들을 박살 내주는 것. 어때, 잘할 자신 있나?”
“물론입니다, 보스!”
“내가 기대하던 대답이야. 자, 스타팅 명단이다.”
전국 중계를 위해 시간 차를 두고 진행되는 디비전 시리즈 1차전 경기.
가장 마지막에 배정된 우리와 오클랜드 간의 경기에 앞서 양 리그 디비전 시리즈 3경기가 일찌감치 끝났다.
언제나 그랬지만 가을이 깊어갈수록 각 팀이 보유하고 있는 전력의 차가 그대로 경기에 반영되고 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중부지구 우승팀 화이트삭스를 꺾고 올라온 LA 에인절스는 타이슨 바샴이 등판한 양키스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5 대 0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내셔널 리그 쪽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원한 우승 후보라 할 수 있는 LA 다저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각각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시카고 컵스를 가볍게 제압하며 먼저 1승을 거뒀다.
그리고 이제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1번 중견수 데릭 플레밍
2번 투수 한수혁
3번 1루수 타이 존슨
4번 우익수 척 클락
5번 좌익수 안토니오 가르시아
6번 포수 브루스 매튜스
7번 3루수 리암 랜드먼
9번 2루수 로니 몬타릭
9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
“오랜만에 타이 이름이 써 있는 걸 보니 뭔가 좀 이상한데?”
“그러게?”
“빌어먹을 자식들, 흐흐.”
누군가의 말처럼 정말 오랜만에 타이의 이름이 새겨진 라인업 용지를 보니 뭔가 꽉 찬 느낌이 든다.
그를 대신했던 녀석들도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서른 중반의 나이에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타이 존슨의 빈자리를 대신할 만큼은 아니었으니까.
“한, 잘 부탁해.”
“걱정하지 말고 내일 경기 준비나 잘해, 라이언.”
“좋아. 아, 미아와 라일리가 행운을 빈다고 전해 달라더군.”
정규시즌이 끝난 후 감독은 나를 불러 선발 등판일정에 대한 논의를 나눴다.
결론은 그거였다.
4선발 체제로 운영될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라이언을 대신해 에이스 자리를 맡아 달라는 것.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정규시즌에서야 내가 체력 문제로 가끔 등판을 건너뛸 수 있어 1선발 자리를 양보했지만 포스트 시즌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르니 말이다.
내가 걱정한 건 1선발 자리를 뺏긴 라이언의 사기였는데,
“솔직히 말하면 홀가분한 기분까지 드는군. 잘 부탁해, 새 에이스.”
잘 받아들이는 것 같으니 그다지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하다.
어쨌든 전문가들의 말처럼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매리너스의 성패는 선발 투수들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달렸다.
최대한 길게, 되도록 마무리 투수에게 바로 인계가 가능하도록 이닝을 먹어줘야 한다.
그리고 그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 * *
“다들 잘 들어. 저 녀석들하고 절대 충돌을 일으키지 마. 특히 한수혁, 저 녀석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마.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는 놈이 아니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분란을 일으키려는 놈이 있으면 바로 그라운드 밖으로 쫓아내버릴 거야. 명심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싸움이 아니라 경기에서의 승리라는 걸.”
제리 와그너의 부상 덕을 보긴 했지만 어쨌든 전력에서 한 수 위로 평가받던 보스턴 레드삭스를 누르고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와일드카드 결정전 1차전에 등판한 후 사흘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한 에이스 데빈 맥퍼슨을 다시 마운드에 올린 감독은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당부했다.
절대 시애틀, 특히 한수혁과 충돌을 일으키지 말라고.
올 시즌 시애틀과의 두 번의 벤치 클리어링 덕분에 정규 시즌의 거의 3분의 1을 주전 포수 없이 치러야 했고, 자칫하면 에이스 없이 가을야구를 치를 뻔했다.
한수혁과 부딪혀서는 안 된다. 그건 두 번 고민할 필요도 없는 오클랜드 입장에서는 절대적인 명제였다.
하지만,
그런 오클랜드 감독의 당부는 사실 그닥 쓸모없는 일이었다.
이미 오클랜드 선수들은 한수혁에게 엄청나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웅
“스윙! 아웃!”
1회 초, 오랜만에 마운드에 오른 한수혁이 오클랜드의 1, 2, 3번 타자를 공 7개만에 삼자 범퇴로 처리했다.
그를 상징하는 107마일 포심, 완숙의 경지에 다다른 104마일 하드싱커, 그리고 같은 폼에서 나오는 87마일 체인지업에 오클랜드 타자들은 전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학살,
같은 레벨의 선수들 간의 경기라 볼 수 없을 정도의 학살, 그 자체였다.
그리고 1회 말, 시애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젠장…….”
“몸 쪽 공은 되도록 요구하지 않을 테니 조심하자고.”
“그냥 모든 타석에서 고의사구로 내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뒤에 타이, 저 자식이 돌아왔는데?”
“빌어먹을…….”
시즌 막판, 벤치 클리어링의 원인을 제공했던, 그 결과 한수혁에게 박살이 났던 데빈 맥퍼슨과 데스몬드 킹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승리해 디비전 시리즈에 올라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다음 상대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바로 그 괴물이 있는 팀이니 말이다.
그런 오클랜드 배터리의 상태와 상관없이 경기가 시작되었다.
[1번 타자 센터필더 데릭 플레밍]올 시즌 4할에 가까운 출루율과 20개의 홈런, 그리고 37개의 도루를 기록한, 공수주를 겸비한 시애틀의 선봉장.
시즌 초반, 한수혁을 경계하던, 하지만 이제 세상 그 누구보다 한수혁을 존경하고 존중하게 된 그가 투수가 던진 초구를 받아쳤다.
따악!
“우아아!”
“좋아! 멋진 시작이야!”
“오클랜드, 개자식들! 맛이 어떠냐!”
고작 안타 하나가 나왔을 뿐이건만, T모바일파크를 가득 메운 5만 명에 가까운 시애틀 팬들이 미친 듯이 함성을 질러댔다.
29년 만에 차지한 지구 우승은 둘째 치고, 이 팀이 가을야구에 진출한 것 자체가 무려 8년 만이다.
오랜 시간, TV 앞에서 다른 팀들이 벌이는 가을잔치를 바라봐야만 했던 시애틀 팬들이 경기장 안,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채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그리고,
[2번 타자 피처 한수혁]그가 들어섰다.
아직 결정된 사항은 아니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신인왕, MVP, 골드 글러브, 실버 슬러거, 행크 애런 상, 사이 영 상 등 주요 타이틀을 싹쓸이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시대, 아니, 메이저리그가 생겨난 이래 역대 최고의 선수라 할 수 있는 한수혁이.
“끄아아아아아!”
“나 미쳐! 오빠!”
“가져! 날 가지라고! 빌어먹을! 퍼킹 매리너스!”
그가 타석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가볍게 배트를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경기장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T모바일파크를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과 열기가 오클랜드 선수들을 질식하게 만들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데빈 맥퍼슨이 맥 빠진 얼굴로 초구를 던졌다.
무사 1루 상황에서 볼넷을 줄 수도 없기에,
제발 잘못 건드리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던진,
바깥쪽 낮은 코스에 형성된 91마일 투심.
하지만 기적은 없었다.
한수혁의 배트가 힘차게 뻗어나갔고,
따아아아악!
“우어어어어어어어!”
“한수혁이 또 오클랜드를 박살 내버렸다!”
“넌 우리의 신이야! 아니, 야구의 신이야!”
그가 친 타구가 좌측 펜스를 넘어 외야 관중석 최상단에 떨어지고,
한수혁을 상징하는 강렬한 베이스 연주음이 경기장이 떠나가라 연주되고,
이제 1회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술을 마신 건지 얼굴이 벌개진 팬들이 안전망에 달라붙어 난리를 치고,
“멋진 광경이야. 안 그래?”
“…….”
다이아몬드를 한 바퀴 돈 한수혁이 데스몬드 킹에게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니, 대답은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1회 말,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한 채 두 점을 내주고 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하지만 아직 악몽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한수혁만 아니었다면 올 시즌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타자가 되었을 타이 존슨이 씨익 웃으며 타석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자식들, 너희는 오늘 이 경기장에서 기어 나가게 될 거야.”
“…….”
2미터가 넘는 거한의 으르렁거림에 데스몬드 킹의 입이 굳게 닫혔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대체 뭘 믿고 이놈에게 빈볼을 던졌던 건지 스스로의 상태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데스몬드 킹이 투수를 향해 초구 사인을 보냈다.
끄덕
그와 마찬가지로 멘탈이 완전히 무너진 투수가 힘없는 표정으로 초구를 뿌렸고,
따아아아악!
또 한 번의 거대한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빌어먹을…….”
데스몬드 킹의 입에서 깊은 한숨과 함께 욕설이 흘러 나왔다.
그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시애틀 이놈들이 없는 지구로 트레이드 요청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더 이상 이놈들과 얽혔다간 숨이 막혀 못 살 것 같다고 말이다.
* * *
“투수 교체가 필요할까?”
“아뇨, 그냥 제가 끝까지 던지겠습니다.”
“좋아, 에이스다운 대답이군. 그럼 오늘 경기는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한수혁과 타이 존슨의 백투백 홈런, 그리고 7회 터진 안토니오 가르시아의 석 점 홈런을 묶어 시애틀이 6점을 내는 동안 마운드 위 한수혁은 오클랜드 타자를 완전히 압도했다.
8이닝 15K, 무실점의 압도적인 투구.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불펜에서 몸을 풀던 투수들이 모두 철수하고, 한수혁이 마지막 9회를 마무리하기 위해 마운드 위로 올랐다.
파앙
“스트라이크! 아웃!”
포스트시즌 들어 3번으로 자리를 옮긴 리그 정상급의 좌타자 맷 로빈슨이 공 세 개 만에 허무하게 삼진으로 물러났다.
투구 수가 100개에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02마일이 나오는 하드싱커.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이 역대 최고의 구종 중 하나로 선정한 그 공이 오클랜드 타자들을 잔인하게 유린했다.
그야말로 알고도 치기 힘든, 진정한 마구라 불러도 좋은 그런 공.
따악!
“아웃!”
4번 훌리오 페냐가 포수 팝 플라이로 아웃되며 이제 오클랜드에게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하나.
오클랜드의 주전포수이자 한수혁과 이런저런 악연으로 얽힌 데스몬드 킹이 타석에 들어섰다.
“솔직히 말하는 건데 말이야.”
“…뭘.”
“오늘 경기는 지나칠 정도로 싱거웠어. 잔뜩 겁먹어서 눈도 못 마주치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것 말이야.”
“빌어먹을…….”
“우리 목표는 월드시리즈야. 그러니 이 지겨운 경기를 빨리 끝내야겠어. 얼른 삼진이나 먹고 꺼지라고.”
브루스의 도발에 데스몬드 킹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끄응…….”
저 멀리 마운드 위에 선 한수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잠깐 치솟았던 용기와 분노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부웅
“스윙!”
부웅
“스윙!
105마일 포심과 102마일 하드 싱커에 배트조차 대지 못하고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
한수혁의 손끝에서 마지막 승부구가 떠났고, 이미 사기를 완전히 잃은 데스몬드 킹이 무기력한 표정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부웅
“스윙! 아웃!”
“우아아아아아!”
기적 따위는 없었다.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그리고 한수혁이 예견한 것처럼,
시애틀은 오클랜드에 완승을 거뒀다.
무려 29년 만에 맛본 디비전 시리즈에서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