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6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63화(364/412)
#363. 월드시리즈(2)
1회 초, 카디널스가 자랑하는 1, 2, 3번 막강 상위타선을 공 아홉 개로 완벽하게 잠재운 한수혁.
경기 시작 전까지만 해도 전의가 활활 타오르던 카디널스 덕아웃이 순식간에 침묵에 잠겼다.
너무 대단한 것을 보니 욕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세계 최고 무대에서 뛰는, 특히 그중에서도 최고 중의 최고라 불리는 카디널스 선수들이었지만 그들의 눈에도 한수혁은 이레귤러 그 자체였다.
마치 어린 시절, 그러니까 자신들이 아마추어이던 시절, 빅리거들이 뛰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격차에 카디널스 선수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경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회 공격이 허무하게 끝나긴 했지만 아직 여덟 번의 정규이닝 공격이 남아 있었고, 야구는 9회 말 투아웃까지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변수 투성이의 스포츠였으니까.
그런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에이스 앤드류 데이비스가 마운드로 올랐다.
“앤드류, 방금 전 저 녀석의 투구는 머릿속에서 지워. 절대 따라하려고 해서는 안 돼. 내 말 이해했지?”
“젠장, 알아.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해볼게.”
“좋아, 원래 작전대로 천천히, 한 구 한 구 신중하게, 그렇게 가보자고.”
투수라는 존재는 상대 타자뿐만 아니라 투수에게도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상대 팀 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광속구를 뿌리며 시원시원하게 삼진을 잡아내는 걸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지고, 보다 강한 공을 뿌리기 위해 이를 악물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앤드류 데이비스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투수였다.
최고 102마일의 포심을 주무기로 하는 이 젊은 에이스는 올해 239이닝을 던지며 21승 6패, 평균자책점 2.01, WAR 8.01을 기록한, 메이저리그 양대 리그를 통틀어 한수혁 다음으로 좋은 성적을 거둔, 그야말로 에이스 중의 에이스였다.
타이 존슨이 시애틀로 이적한 후 팀의 리더가 된, 자존심 하나만큼은 모든 빅리거들 중에서 가장 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가 지금 한수혁의 잔재를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 역시 강속구를 마구 뿌려대며 상대를 힘으로 누르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 자신은 한수혁, 타이 존슨으로 이어지는 리그, 아니,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테이블세터를 상대해야 한다.
타율 0.421, 출루율 0.530, 장타율 1.019, OPS 1.550, 홈런 79개 172타점이라는, 게임에서조차 나오기 힘든 성적을 기록한 한수혁을 상대하고 나면 타율 0.357, 출루율 0.488, 장타율 0.652, 홈런 47개, 135타점을 기록한 살아 있는 전설 타이 존슨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고 그 둘 모두를 거를 것인가?
바로 그 뒤 타자가 0.355의 타율에 홈런 20개 도루 37개를 기록한,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리드오프 데릭 플레밍이다.
결국 결론은 하나다.
도망갈 수 없다. 아니, 도망가려 해도 도망갈 곳이 없다.
이제부터 앤드류 데이비스가 할 수 있는 건 전력을 다해 한 타자, 한 타자를 상대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1번 타자 피처 한수혁]등골이 서늘해지는 베이스 연주음과 함께 한수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얼마 전 타이 존슨과 전화통화를 하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한수혁이 자신을 존중하고 있다고. 특히 하드싱커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고.
‘나보다 훨씬 좋은 공을 던지면서?’
물론 한수혁은 회귀 전을 기준으로 이야기한 것이기에 앤드류는 그 말의 진짜 속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자신이 던지는 공 중 가장 좋은 공은 하드싱커라는 것. 적에게조차 인정을 받은 최고의 공이라는 것.
그렇기에 앤드류는 한수혁과의 승부에서 결정적인 순간 하드싱커를 꺼내들기로 마음먹었다.
파앙
“볼.”
바깥쪽 존에 살짝 걸치듯 던진 커브가 볼 판정을 받았다.
평소 한수혁의 패턴대로라면 배트가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을 그런 공.
하지만 한수혁은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듯 그 공을 흘려보냈고, 앤드류의 머릿속은 조금 더 복잡해졌다.
‘몸 쪽 공을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포심?’
투수의 얼굴이 혼란에 휩싸이자 홈플레이트 뒤 카디널스의 야전 사령관 마르퀴스 데일리가 큰 목소리로 그를 독려했다.
“괜찮아! 공 좋아, 앤드류! 이대로만 가자고!”
피치컴을 통해 재빠르게 다음 사인이 전달되었다.
‘몸 쪽 꽉 찬 포심.’
원하는 곳에 공을 던진다는 게 쉬울 리 없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타자의 몸 쪽 공을 제구한다는 건 투수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일 중 하나다.
그럼에도 앤드류의 머리가 망설임 없이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올 시즌 앤드류 데이비스를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준 강력한 포심이 한수혁의 몸 쪽을 향해 날아갔다.
파앙
“스트라이크!”
자신의 생각보다 더 잘 던져진, 그야말로 만점을 줘도 아깝지 않을 공이 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앤드류와 한수혁의 눈이 마주쳤다.
앤드류는 깨달았다.
그가 웃고 있음을, 자신만큼이나 이번 승부를 즐기고 있음을.
‘좋아!’
세계 최고의 선수가 자신과의 승부를 즐기고 있음에 고무된 앤드류가 포수를 향해 먼저 사인을 보냈다.
‘바깥쪽에 걸치는 하드싱커’
‘정말? 공 한두 개 정도 빼보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저 녀석을 상대로 그런 꼼수는 소용없어. 힘과 힘의 승부다.’
앤드류의 뜻이 확고함을 깨달은 포수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다.
세계 최고의 팀을 가리는 경기, 1회 첫 번째 승부에서 도망가는 피칭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힘 대 힘의 대결, 그건 올 시즌 앤드류 데이비스를 내셔널 리그 최고의 투수로 우뚝 솟게 만들어준 비결이기도 했다.
끄덕
배터리 간의 사인 교환이 끝나고, 앤드류 데이비스가 천천히 투구동작에 들어갔다.
이제 고작 1회가 시작되었을 뿐인데, 고작 공 두 개를 던졌을 뿐인데.
마치 한 경기를 다 치른 듯한 피로감이 밀려온다.
물고 있는 마우스피스에서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앙 다문 앤드류 데이비스가 전력을 다해 한수혁에게 공을 던졌다.
헛스윙, 혹은 땅볼이라도 유도할 수 있기를, 저 괴물의 얼굴에 당혹감이라는 감정을 심어줄 수 있기를 기원하며,
그의 모든 것을 담은 100마일 하드싱커가 바깥쪽 낮은 코스를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하지만,
따아아악!
공이 쪼개지는 듯한 타격음과 함께 총알 같은 타구가 우익수 쪽으로 날아갔다.
맞는 순간 장타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타구였다.
“좋아! 달려! 달리라고!”
“아우! 이게 안 넘어가다니!”
그렇게 날아간 타구가 우익수 키를 넘어 우측 펜스 최상단을 강타한 후 파울라인 밖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시애틀 팬들의 아우성과 함성에 질린 카디널스의 우익수가 잠깐 공을 더듬었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전력을 다해 내달린 한수혁이 3루에 도착했다.
“세이프!”
“그렇지! 바로 이거지!”
“카디널스 이 자식들아, 맛이 어떠냐!”
여유 있게 3루에 도착한 한수혁이 헬멧을 벗고 관중들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맞는 순간 홈런이 될 거라 생각했던 앤드류 데이비스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혼자 중얼거렸다.
“하아, 진짜 미친놈이네.”
방금 전 앤드류가 던진 하드싱커는 단언컨대 지금까지 그가 던져온 수천, 수만 개의 공 중 가장 뛰어난, 다시 던지라 해도 던질 수 있을까 싶은 완벽한 공이었다.
머리를 좌우로 털어 찝찝함과 황망함을 억지로 털어버린 앤드류가 다음 타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2번 타자 퍼스트베이스맨 타이 존슨]한때 앤드류가 가장 존경했던, 세인트루이스라는 거함을 이끌고 메이저리그를 재패했던 전설적인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기기 위해, 그리고 야구를 즐기기 위해 시애틀로 이적하겠다는 타이 존슨의 말.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그가 마치 처음으로 큰 경기에 나서게 된 루키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모든 게 납득이 되었다.
아주 약간 남아 있던 타이 존슨에 대한 원망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아직 배울 게 많은 자신을 두고 왜 다른 팀으로 떠났는지 따지고 싶던 마음이 스스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대신,
반드시 이기고 싶다는, 더 나은 야구를 위해 이곳을 떠난 옛 스승이자 동료에게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 치솟아 올랐다.
나이를 먹으며 예전 같은 파괴력은 사라졌지만 그 부족한 부분을 경험으로 완벽하게 커버한, 살아 있는 전설 타이 존슨.
그를 향해 앤드류 데이비스의 모든 것을 담은 하드싱커가 날아갔다.
그리고,
따아악!
예전 카디널스에서 뛰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안타나 홈런 따위에는 전혀 욕심이 없다는 듯한 가벼운 스윙이 그 하드싱커를 강타했다.
터억
“세이프!”
담장 앞까지 달려간 우익수가 타구를 잡아내고 태그업을 한 한수혁이 거의 산책하듯 홈으로 들어오며 1 대 0.
항상 자신이 중심이어야 했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야만 직성이 풀렸던 타이 존슨이 겨우 희생플라이 하나에 크게 만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한수혁과 타이 존슨을 보며 앤드류 데이비스를 왠지 모를 부러움을 느꼈다.
그들과 싸우기보다는 함께하고 싶다는, 현재로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그런 생각이 앤드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 *
“조금만 더! 그래, 조금만!”
“한수혁! 부탁해! 시애틀은 널 사랑한다고!”
“오빠! 힘내요!”
내셔널 리그 최고의 투수 앤드류 데이비스, 그리고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타자이자 투수인 한수혁.
월드시리즈 1차전 승리를 놓고 치열하게 진행되었던 두 에이스 간의 혈투가 서서히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앤드류 데이비스의 투구는 완벽했다. 역시 내셔널 리그 사이 영 후보 1순위라는 명성에 걸맞은, 그야말로 대단한 투구였다.
다만 상대팀에 그보다 더 대단한 선수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1회 말 3루타에 이은 득점, 그리고 6회말 2루타에 이은 또 한 번의 득점,
비록 8회 말 대결에서 삼진 하나를 잡아내긴 했지만 오늘 앤드류 데이비스는 시애틀의 모든 타자를 완벽하게 막아내고도 한수혁을 잡아내지 못해 패배 직전에 몰려 있었다.
잘 맞은 타구라고는 한수혁에게 맞은 안타 두 개가 유일했다. 그나마도 득점 역시 타이 존슨의 희생플라이, 데릭 플레밍의 스퀴즈 번트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광판에 새겨진 2와 0의 대비는 그가 패전투수가 될 순간이 멀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저벅저벅
카디널스의 마지막 공격을 잠재우기 위해 그가 마운드에 올랐다.
8회 초 수비까지 카디널스의 타자 중 그 누구도 1루를 밟는 걸 허락하지 않았던,
24명의 타자를 상대로 18개의 삼진을 뽑아낸,
팀의 사상 첫 월드시리즈 진출 무대에서 퍼펙트를 기록 중인 한수혁.
“플레이!”
마지막 세 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마운드에 오른 한수혁은 새삼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오늘 자신이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경기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팀의 사상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기원하는 수십만의 시애틀 시민들, 그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소중한,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한수혁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염원을 등에 업고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신기하기는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냥,
오랜 시간 뭔가에 쫓기듯 살아온, 끝없이 솟아오르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야구를 해오던 그에게 상당히 신기한 체험이었을 뿐이다.
한수혁의 시선이 저 멀리 1루 관중석에 위치한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상큼한 풀내음을 느끼게 해주는 어떤 소녀를 바라보며,
피식
자기도 모르게 활짝 미소를 지은 그가 포수 미트를 향해 전력으로 공을 뿌렸다.
파아앙!
“스트라이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