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6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67화(368/412)
#367. 월드시리즈(6)
얼마 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니,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그냥 떠올랐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경기장 앞에서 트럭에 뛰어드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던 기억.
나는 왜 그때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지금까지 몇 번이고 고민을 해봤지만 뚜렷한 대답을 찾진 못했다.
그냥 이타심, 혹은 동정심 같은 걸로 덮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찝찝한, 회귀 전 내 성격과 행동패턴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힘든 일임에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나와 눈이 마주쳤던, 내 품 안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그 아이의 얼굴,
그 얼굴 한가운데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가 들어 있었다.
이제는 거의 기억에서 잊혀진, 아니, 잊으려 애써 온,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예린이와 어떤 관계가 있음에 분명한 그녀,
그랬다.
그 아이의 눈빛과 얼굴은 내가 한동안 찾아다녔던 그녀를 닮아 있었다.
아마도,
아마도 나는 오래전 나를 떠나간, 나 스스로 떠나보낸 그녀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한 게 아니었을까?
“한, 여기서 뭐 해?”
“그냥, 그라운드 좀 보고 있었죠.”
“싱겁긴, 이제 슬슬 들어가서 준비해야지.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았어.”
“준비야 뭐… 옷만 갈아입으면 되는 거고. 아무튼 알았어요.”
“좋아, 라커룸에서 보자고. 친구.”
클럽하우스에서 그라운드로 이어지는 기다란 통로,
그 끝자락에 기대 텅 빈 그라운드를 바라보던 내게 타이가 말을 걸어왔다.
잠깐 상념에 빠져 있던 내 의식이 급격하게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길고 긴 시간의 터널을 뚫고 달려와 다시 한 번 이 무대에 섰다.
예전 삶에서는 은퇴 직전의 나이가 되어서야 도달할 수 있었던 월드시리즈 우승의 기회가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어느새 10월을 지나 11월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녁 바람이 차지 않고 상쾌하게까지 느껴진다.
우리 팀의 승리를 바라는 팬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여기까지 달려온 동료들,
아주 오래 전, 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억지로 이 무대에 서야 했던 내가 그토록 바라던,
완벽한 우승의 기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두 번째 삶을 살아낸 후에야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또 한 번 그라운드로 나선다.
* * *
“올 시즌 내가 작성한 마지막 라인업이다. 솔직히 말하지. 이걸 완성하는 데 라인업 용지를 열 장 넘게 찢어야 했어. 챔피언을 가리는 마지막 경기 라인업을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 아직 배우지 못했거든. 맞아. 나 역시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큰 무대는 처음이라는 뜻이지. 그렇기에 나는 지난 여섯 번의 경기에서 우리가 3승 3패를 한 건 전적으로 내 탓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뭐래도 너희는 올 시즌 메이저리그 최고의 팀이고, 오늘 나는 그 최고의 팀이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는 라인업을 준비했다. 장담한다. 오늘 경기가 끝났을 때 우리는 트로피를 들고 큰 목소리로 외치게 될 거야. 퍼킹 월드시리즈라고 말이지.”
벤자민 감독의 말에 라커룸 안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기가 질리거나 혹은 긴장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을 정리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끝낸 선수들이 벽으로 다가와 라인업 용지를 확인했다.
1번 3루수 한수혁
2번 1루수 타이 존슨
3번 지명타자 안토니오 가르시아
4번 중견수 데릭 플레밍
5번 우익수 척 클락
6번 좌익수 짐 브라운
7번 포수 브루스 매튜스
8번 2루수 리암 랜드먼
9번 유격수 조쉬 올리버
투수 마이크 워렌
53년 만에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그리고 그 첫 번째 기회에서 사상 첫 우승까지 노리게 된 시애틀 매리너스.
올 시즌 그 기적을 가능케 했던 주역들의 이름이 거기 새겨져 있었다.
뒤가 없어진 카디널스가 어떤 작전으로 나올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이라 봐야 할 리드오프 한수혁 카드.
그리고 그 뒤를 받치는 최고의 파트너 타이 존슨, 중심타선의 시작이자 하위타선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맡아줄 데릭 플레밍, 포스트시즌 들어 최고의 타격감을 유지중인 45홈런 타자 안토니오 가르시아, 시즌 내내 중심타선을 든든히 지켜줬던 척 클락, 짐 브라운, 사상 첫 올스타 시즌을 보낸 브루스 매튜스, 그리고 말린스에서 트레이드되어 와 주전 자리를 꿰찬 공격형 2루수 리암 랜드먼, 올 시즌 골드글러브 수상이 확정적인 조쉬 올리버까지.
9명의 타자 이름이 마치 탑을 이루듯 차곡차곡 쌓여 있는 가운데 그 아래 오늘 경기를 책임질 선발 투수 마이크 워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선수들이 시선이 마이크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야구 인생에 있어 가장 기념비적인 경기를 맞게 된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약속하지. 무슨 일이 생기든 상대 투수보다 오래 마운드를 지킬 생각이야. 그러니 다들 날 좀 도와달라고 친구들.”
* * *
경기가 시작되기 전 내게 다가온 마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떨려서 공을 집기가 힘들 정도야. 젠장,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좋을까?’
다저스 시절 중간계투로나마 월드시리즈를 경험한 마이크 워렌이었지만 팀의 우승이 걸린 최종전에 선발로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언제나처럼 평소 같은 마음으로 던지라고 해봐야 어차피 안 들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던져요. 어차피 당신은 너클볼러잖아요? 그냥 한복판에 던지고 신에게 기도해 보자고요.’
‘젠장… 맞는 말이야. 그런데 어쩌지? 너무 지기 싫은데? 어떻게든 이기고 싶다고.’
‘그 부담은 제가 가져가죠. 마이크,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냥 던져요. 1점을 내주면 2점, 2점을 내주면 3점을 가져올 테니. 그건 우리 타자들의 몫이니까요.’
물론 그 말 한마디에 모든 불안감이 사라지는,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이크는 내 말에서 아주 작은 단서 하나를 잡아낸 듯했다.
어차피 야구는 누가 더 많은 점수를 내느냐에 달린 거라는 걸.
그런 면에서 시애틀은 믿을 수 있는 타자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믿어야 한다. 경기 중 무슨 일이 벌어지든 동료들을 믿고 자신의 패턴을 지켜내야 한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조금 불안하던 내 마음이 금세 평온해졌다.
마운드 위, 자신의 임무를 위해 모든 걸 다 해낼 준비가 된 나이 든 투수 하나가 서 있었다.
“플레이!”
경기가 시작되고 카디널스의 톱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정규 시즌에서도 좋았지만 이번 포스트시즌 들어 거의 5할에 육박하는 타율을 기록 중인 흑표범 그랜트 딕슨.
‘몸 쪽 낮은 코스, 너클볼’
귀에 꽂은 인이어에서 마이크가 던질 초구에 대한 정보가 흘러 나왔다.
너클볼러가 마운드에 있을 때는 수비 위치를 잡는 게 조금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다음에 던질 공이 어떤 궤적을 그릴지 알 수 없기에 타구의 방향을 예측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감이다.
이제는 프로에서만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나의 감을 믿어야 한다.
스륵
평소에도 와인드업보다는 세트 포지션으로 던지길 즐기는 마이크가 천천히 투구동작에 들어갔다.
우투수가 좌타자에게 던지는 몸 쪽 공.
일반적인 브레이킹 볼의 궤적이라면 1-2루 간 타구가 나올 확률이 높겠지만,
“조쉬! 긴장!”
“음.”
왠지 내 예감은 그 반대였다.
내 목소리에 유격수 조쉬가 곧바로 반응했고, 다음 순간 몸 쪽으로 파고 드는 역회전성 너클볼이 배트와 충돌했다.
따악!
유격수 오른쪽으로 향하는 총알 같은 타구.
다행히 내 경고에 미리 타구를 주시하고 있던 조쉬가 있는 힘껏 몸을 날려 그 타구를 건져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송구를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 순간 조쉬가 기지를 발휘했다. 넘어진 채 조쉬가 글러브 안 공을 튕기듯 내게 토스했고, 그 공을 맨 손으로 잡아채 1루로,
터억
슈웅
“아웃!”
“으아아아아! 그래! 바로 이거야!”
“조쉬! 한! 너희는 세계 최고의 수비수들이야!”
“빌어먹을 그랜트, 드디어 저 자식을 깔끔하게 잡아내는군!”
이번 시리즈 들어 그랜트 딕슨에게 처절하리만치 당해온 시애틀 팬들이 목이 터져라 함성을 외쳐댔다.
낯선 너클볼을 제대로 받아쳤던 그랜트 딕슨이 허탈한 듯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배트를 주워 들었다.
“자! 이대로만 가자고, 친구들!”
“좋아!”
“하나씩 하나씩, 차분하게!”
타이 존슨의 선창에 다른 야수들이 큰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경기 초반, 긴장감에 휩싸였던 시애틀의 내야에 조금씩 평온과 안정이 찾아왔다.
[2번 타자 레프트 필더 트래비스 리드]그렇게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카디널스의 2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30-60을 기록한 톱타자 뒤에 3할 40홈런 타자라니,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정말 산 넘어 산이다.
오늘 카디널스의 1, 2, 3, 4번 타자는 모두 30홈런 이상을 기록한, 그야말로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장타 허용률이 높은 너클볼러에게는 천적이나 마찬가지인 타선이다.
떨어지는 너클볼을 걷어 올려 담장 밖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힘 있는 타자들.
그렇기에 오늘 마이크에게 기대하는 건 그가 던지는 너클볼이 평소보다 훨씬 더 심한 변화를 보여주길, 던지는 투수조차 짐작할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 주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파앙
“스트라이크!”
초구 헛스윙을 한 트래비스 리드가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존 한가운데로 들어온, 그 어떤 변화가 일으키지 않은, 말 그대로 배팅볼에 가까운 공이었기 때문이다.
저 녀석처럼 게스히팅을 즐기는 타자와 너클볼의 상성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오늘 3번으로 나선 A.J.존스 같은, 공 보고 공 치기 유형의 배드볼히터가 오히려 너클볼을 공략하기에는 훨씬 수월하다 할 수 있다.
물론 그 모든 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다.
어차피 배트 중심에 걸리면 넘어가는 건 마찬가지이니까.
나 역시 너클볼만으로 한 경기를 책임져본 적이 있기에, 지금 마이크가 얼마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도와야 한다.
내 쪽으로 향하는 타구는 무조건 건져낸다는 각오로.
파앙
“볼.”
중간지점에서 한 번 솟구쳐 올랐다가 다시 홈플레이트 앞에서 확 가라앉은 어이없는 움직임을 보인 공을 타자가 그냥 흘려보냈다.
문득 회귀 전 처음 마이크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이 가진 마지막 유산이 이대로 리그에서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나이 든 너클볼러.
그때 마이크는 어떤 마음으로 내게 너클볼을 권했던 걸까.
이제는 물어볼 곳도, 확인해줄 사람도 없는,
그냥 나 혼자만의 공상과도 같은 기억을 허공에 흩트리며 다음 수비를 준비했다.
‘몸 쪽 높은 코스’
타자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괜찮은 선택이다.
물론 제대로 제구가 되어야 하고 그만큼 좋은 변화를 보여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지만 말이다.
괜찮다.
어차피 세상에 완벽한 계획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
스륵
빠른 공 승부를 결심한 마이크가 전력을 다해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너클볼을 던졌다.
그리고,
따아악!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3루 베이스라인을 향해 총알 같은 타구가 날아왔다.
그냥 두면 아마도 파울이 될 게 확실한 그런 타구.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려본다.
마운드 위에서 불안감과 싸우고 있는 투수를 위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시애틀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터억
“아웃!”
“한수혁! 역시! 네가! 메이저리그 최고야!”
“젠장, 저걸 잡아내다니! 저 친구가 우리 3루수라고! 다들 믿어져?”
“맛이 어떠냐? 카디널스 자식들아!”
하마터면 놓칠 뻔했지만 여기서 그런 티를 낼 필요는 없겠지.
글러브 속에서 공을 꺼내 마이크에게 던져주며 크게 소리쳤다.
“좋아요. 지금처럼 이쪽으로 다 보내요. 내가 다 잡아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