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69)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68화(369/412)
#368. 월드시리즈(7)
누군가는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득점권 타율이 0.478에 달한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두 번의 타점 기회가 주어지면 그중 한 번은 반드시 점수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수혁을 1번 타자로 기용한다는 건 생산력 면에서 여러모로 아쉬운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단 한 번만 지면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에서 카디널스 벤치가 한수혁을 집중적으로 견제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벤자민 감독은 한수혁의 타점 생산력을 포기하는 대신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내렸다.
볼넷이든 안타든, 혹은 홈런이든, 무엇이든 좋으니 무조건 출루해 달라고.
따아악!
1회 말, 정면승부를 피해 날아온 유인구를 걷어 올린 한수혁이 2루 베이스를 밟았다.
감독이 내린 새로운 임무를 백 프로 수행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사 주자 2루, 메이저리그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타이 존슨의 차례가 돌아왔다.
“젠장, 타이. 당신과 이런 경기를 하게 돼서 유감이에요.”
“동감이야. 하지만 어쩌겠어. 이런 게 야구인데.”
“맞는 말이긴 하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경기는 저희에게 양보하는 게 어때요? 그동안 함께 지낸 시간을 생각해서 말이죠.”
“안 될 말이지.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저기 저 녀석에게 죽도록 얻어맞을 텐데?”
“…젠장, 저 녀석은 대체. 타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고작 4년차 루키가 저렇게 야구를 잘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글쎄,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니까. 어쨌든 이제 승부를 내보자고, 마르퀴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팀의 동료로, 그리고 중심타선의 일원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한 두 선수가 서로를 향해 승부욕을 불태웠다.
매년 3/4/5의 슬래시 라인에 30홈런 100타점 이상의 성적을 10년 넘게 유지 중인, 그야말로 살아 있는 타격 교과서 같은 타이 존슨이 빠져나간 후 카디널스 선수들은 잠시 패닉에 빠지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초 계획보다 반년 이상 빠르게 빅리그에 콜업된 신인 1루수 A.J.존스가 데뷔 첫 시즌 40홈런 100타점이라는 호성적을 내며 타이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메워줬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타이 존슨의 빈자리는 단순히 그런 숫자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어떤 경기에서든 팀의 중심을 잡아주던 베테랑 중의 베테랑, 그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한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을 들게 해주었던 세계 최고 선수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그럼에도 카디널스는 올 시즌 또 한 번 월드시리즈에 올랐고, 그들을 이끌던 캡틴과 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파앙
“스트라이크!”
“음, 지난번에 말을 할까 말까 했는데 찰스 공이 더 좋아진 거 같은데.”
“맞아요. 당신을 꼭 잡아내겠다고 기합이 확 들어 있거든요.”
“흐흐, 재미있군.”
오늘 월드시리즈 최종전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는 찰스 워싱턴은 지난 시즌까지 타이 존슨을 유난히 잘 따르던 그런 선수였다.
성격적으로 잘 맞기도 했고, 가족들끼리도 친분이 있었다.
그가 등판한 경기에서 타이 존슨이 유난히 홈런을 많이 때린 것도 한 몫을 했다.
그런 찰스 워싱턴이 던진 초구를 타이 존슨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잡아 당겼다.
따악!
1-2루 간을 총알 같이 가르는 타구.
하지만 수비력에 있어서는 내셔널 리그를 넘어 메이저리그 전체 최고라 불리는 코리 넬슨이 그 공을 낚아챘고,
“아웃!”
“아아, 빌어먹을!”
“저 개자식한테 도둑맞은 안타가 대체 몇 개야!”
“이봐, 한! 그냥 저 친구를 사버리는 건 어때? 돈이 부족해? 우리가 좀 모아볼까?”
타이 존슨이 1루에서 아웃 당하는 사이 한수혁은 3루까지 진출했다.
백 프로 만족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역할을 해낸 타이 존슨이 담담한 표정으로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1회 말 1사 3루,
이제 막 시작된 경기였건만, 벌써부터 관중석은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 * *
[3번 타자 DH 안토니오 가르시아]정규시즌, 한수혁이 리드오프로 나서고 그 뒤에 타이 존슨이 배치되는 경기에서는 항상 데릭 플레밍이 3번 자리에 서곤 했다.
상황에 따라 작전 수행이 가능한 데릭의 능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늘 벤자민 감독은 한수혁과 타이 존슨의 뒤에 토니와 데릭을 연달아 배치하는 모험적인 라인업을 선보였다.
지명타자 안토니오 가르시아, 올 시즌 타율 0.212, 출루율 0.345, 장타율 0.524, 45홈런 88타점이라는 한눈에 봐도 흥미로운 지표를 기록한 시애틀의 홈런 타자.
그는 생각했다.
왜 자신에게 3번 자리를 맡긴 걸까.
만약 이런 상황에서 평소대로 데릭이 3번 자리에 있었다면?
재치 넘치는 플레이가 특기인 그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깊숙한 내야 타구, 혹은 스퀴즈 번트 같은 걸로 3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의 선택은 데릭이 아닌 자신이었다. 한수혁과 타이 존슨 뒤, 어쩌면 시애틀 타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자리에 자신을 배치한 것이다.
순간 깨달았다.
감독이 뭘 바라고 있는지.
그건 바로 토니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장타였다.
“플레이!”
양 팀 3선발이 맞붙은 월드시리즈 마지막 경기,
아마도 감독은 오늘 경기에서 많은 득점이 나올 것이라 예측한 듯했다.
그렇기에 데릭에 비해 장타력이 앞서는 자신을 3번에 배치한 것이리라.
꾸욱
기대에 보답하고 싶다.
평소 자신이 정한 존이 아니면 절대 배트를 내지 않는, 고집 하나만큼은 메이저리그 최고라 해도 무방한 안토니오 가르시아가 배트 그립을 힘차게 말아 쥐었다.
그 순간, 몸 쪽 한가운데에서 공 한 개 정도가 낮게 들어오는, 평소의 그였다면 가만히 지켜봤을 공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토니의 배트가 힘차게 돌았다. 그가 감독, 그리고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만의 기준과 고집을 버린 것이다.
따아아악!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잘 맞은 타구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우아아아아!”
“가라! 가! 제발! 제발!”
토니 특유의 라이너성에 가까운 타구가 우익수 쪽을 향해 힘차게 비행했다.
그리고,
터엉
“아우! 저게 안 넘어가다니!”
“달려! 토니! 젖 먹던 힘까지 내보라고!”
우중간 펜스 가장 윗 단에 맞은 타구가 데구르르 우익수 앞으로 굴러갔다.
3루에 있던 한수혁이 거의 산책하듯 홈으로 들어왔고, 그 사이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낸 토니가 2루를 돌아 3루에 도착했다.
“흐아!”
3루 베이스를 밟은 채 숨을 헐떡이던 그가 관중들을 향해 힘찬 함성을 내질렀다.
선취득점, 이어지는 1사 3루 찬스.
그리고,
툭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럼에도 막기 힘들었던 데릭 플레밍의 절묘한 스퀴즈 번트에 토니마저 홈으로 들어오며 스코어 2 대 0.
벤자민 감독의 승부수가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 * *
1회 말 두 점을 먼저 올린 시애틀 매리너스,
타자들의 득점 지원을 받은 마이크 워렌이 더욱 힘을 냈다.
타이 존슨이 떠난 후 카디널스의 새로운 캡틴이자 중심타자가 된 제임스 맥코이를 시작으로 3할 20홈런 타자 말콤 피터스, 포수이면서도 20개 가까운 홈런을 기록한 마르퀴스 데일리까지.
카디널스의 4, 5, 6번 타자를 잘 막아낸 마이크 워렌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음료수를 들이켰다.
“마이크, 아직 말을 못한 것 같은데…….”
“뭔데, 레너드.”
“당신 오늘 정말 멋있는 거 알아요?”
“흐흐, 빈 말이라도 듣기 좋은데.”
“흠,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젠장, 이번 겨울에는 꼭 당신의 너클볼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 두고 보라고요.”
“기대하지, 어린 친구.”
올 시즌 백업포수로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인 레너드 존스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면 주전포수인 브루스 매튜스가 FA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백업 포수인 그가 마이크의 너클볼을 잡을 수 있게 되면 선수 운영이 보다 유연해질 것이다.
그렇게 레너드가 자신만의 각오를 다지는 사이, 선두 타자로 나선 짐 브라운의 잘 맞은 타구가 카디널스 중견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땅이 무너질 듯한 시애틀 팬들의 탄식이 울려 퍼졌고, 2루타를 도둑맞은 타자가 자신의 배트를 스스로 부러뜨렸다.
1사 주자 없는 상황, 브루스 매튜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준수한 수비력과 가끔씩 터지는 일발장타로 인해 FA 자격 취득 전부터 다른 팀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시애틀의 주전 포수.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지간하면 이 팀에 남을 생각이었지만 만에 하나 그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팀이 있다면 떠나게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자신의 진로나 몸값 같은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브루스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단 하나.
어떻게든 1루에 출루해 한수혁의 앞에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막강 상위 타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시애틀의 하위 타선, 그 하위 타선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브루스가 배트를 짧게 잡고 레벨 스윙을 준비했다.
올 시즌 평균자책점 3.51에 15승 7패를 기록한 기교파 투수 찰스 워싱턴.
메이저리그 평균에도 못 미치는 그의 포심에는 이런 접근법이 더욱 유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리고 그의 생각이 맞아 떨어졌다.
따악!
잘 맞은 타구가 1-2루 간으로 향했고, 카디널스가 자랑하는 최고의 2루수 코리 넬슨조차 그 타구를 잡아낼 수 없었다.
“좋아! 다시 한 번 가자!”
“아무 데도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매리너스에 딱 붙어 있으라고, 브루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을 향해 브루스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몇 번을 생각해도 아직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자신은 지금 매리너스의 유니폼을 입고 이렇게 1루 베이스를 밟고 있지 않은가.
“브루스! 브루스! 브루스!”
“메이저리그 최고의 포수!”
내년, 혹은 내년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저들과 헤어질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 브루스 매튜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매리너스의 유니폼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8번 타자 세컨베이스맨 리암 랜드먼]시애틀 매리너스의 감독 벤자민 레이놀즈의 가장 큰 장점은 상황에 따라 자신의 고집을 얼마든지 꺾을 수 있는,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면 오래된 야구 철학마저 포기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2회 말, 2 대 0 찬스에서 맞이한 1사 1루 찬스.
누군가는 자신의 소심함을 문제 삼을 수도 있지만, 번트 따위는 아웃카운트 낭비에 불과하다는 세이버매트리션들의 놀림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시아에서 야구를 하다 보니 멍청한 선택을 했다 비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벤자민 감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보내기 번트 사인을 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보기 힘든 1사 상황에 나온 번트였다.
툭
“세컨! 아니, 퍼스트!”
시애틀의 8번 리암 랜드먼이 감독의 기대에 부합하는 멋진 보내기 번트를 성공시켰다.
2사 주자 2루, 득점권 찬스에 9번 조쉬 올리버가 들어섰다.
올 시즌 아메리칸 리그 팀 홈런 1위에 빛나는 시애틀 매리너스 타선에서 유일하게 구멍이라 불리는 수비형 유격수.
적어도 이 선수에게만큼은 안타를 내줄 수 없다 다짐한 카디널스의 투수가 한 구 한 구 전력을 다해 공을 뿌렸다.
하지만 조쉬의 정신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올 시즌 2할 5푼에도 못 미치는 타율을 기록하며 매리너스 타선의 구멍이라 불리는 자신에게 믿음을 보내준 감독.
그 믿음에 고무된 조쉬 올리버가 모든 힘을 다해 투수에게 맞섰다.
따악!
“파울!”
7구까지 이어진 접전, 그리고,
“볼! 베이스 온 볼스.”
목표했던 적시타는 때려내지 못했다.
하지만 볼넷을 얻어낸 것만으로 충분했다.
경기장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1번 타자 서드베이스맨 한수혁]2사 주자 1, 2루 찬스.
듣기만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강렬한 베이스음, 그 박자에 맞추듯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린 한수혁이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