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7화(38/412)
#37. 피하겠다면 밟아주지
상대팀에서 멋진 플레이가 터져 나올 때마다 야구팬들은 저도 모르게 뒷목을 잡게 된다.
시프트를 뚫고 얄밉게 내야를 빠져나가는 적시타, 우리 팀 야수들을 바보처럼 보이게 만드는 주루 플레이, 미처 예상 못한 기가 막힌 작전 등등.
뭐가 어찌되었든 그런 걸 당하는 순간 혈압상승은 기본이다.
하지만 상대팀의 플레이에 당하면서도 짜증 대신 감탄이 나오는 경우가 딱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거대한 홈런이다.
야구팬이라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아치를 그리는 홈런.
– ···방금 지린 놈 있냐? 솔직하게 거수
﹂후후 난 지릴 줄 알고 미리 기저귀를 준비했지
﹂겨우? 난 그냥 변기에 앉아서 보고 있었는데?
﹂무슨 탄도 미사일도 아니고, 저 각도로 전광판 최상단을 맞추다니 ㄷㄷ···
﹂매) 솔직히 나도 지렸다··· 는 페이크고 씨발 저게 넘어간다고?
﹂매) 반칙 아냐? 비겁하게 무릎 꿇고 때리기 있음?
﹂매) 저게 말이 됨? 약 한 거 아님? 저게 말이 됨? 약 한 거 아님? 저게 말이 됨?
﹂매) ㅋㅋ 올해 데뷔한 신인이 리그 폭파··· 씨발··· 인생 존나 불공평하네
﹂매) 지금이라도 다 없던 일로 하고 한수혁 메자로 보내자. 저 실력 갖고 왜 KBO에서 양학함?
﹂나 지금 잠실에 있는데 옆에서 민예린 누나 통곡하는 중이다;;;
﹂여신님이 왜 울어? 누가 울린 거임?
﹂몰라··· 그냥 밑도 끝도 없이 펑펑 우신다···
﹂아니 워리어스 이 새끼들은 여신님 VIP석으로 안 모시고 일반석에 둔 거냐?
﹂방금 전까지 치어리더들하고 같이 춤 추셨다··· 관계자석 못 감···
공이 맞는 순간 손목 힘을 이용해 그대로 배트를 뒤로 집어 던져버렸다.
공중에서 휘리릭 몇 바퀴를 회전한 배트가 마치 말뚝처럼 땅 위에 내려 꽂힌다.
음.
그동안은 가급적 배트 플립을 자제해왔는데 저 투수놈 눈빛이나 뒤에 포수놈 목소리가 영 신경을 거슬리기에 나도 모르게 그만.
어쩌면 라이벌전의 분위기가 내 흥을 돋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1루를 돌아 2루로, 베이스 옆에 있던 송기태 놈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노려보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뭐’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리 와! 이리 와! 이 미친 놈아!”
“너 진짜 한국인은 맞는 거야? 이리 와봐 DCA 검사 좀 해보자.”
“DCA는 민예린 님 팬클럽 이름이고, DNA에요. 형님.”
“이런 씨발, 수학이 너는 설마 내가 그걸 모를까봐! 됐고, 한수혁, 이리 오라니까!”
라이벌의 기를 한 방에 꺾어버린 거대한 홈런에 동료들이 미친 듯이 환호했다.
오랜 동안 매지션스에 눌려 있던 울화가 한 번에 터져 나온 거 같았다.
좋다. 온 몸에 고양감이 가득 차오른다.
처음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쳤을 때였다. 아마 선발투수 겸 7번 타자였나 그랬던 것 같다.
데뷔 첫 홈런을 치고 돌아온 날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에서 루키를 상대로 하는 흔한 장난 같은 거였는데 나는 그게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덕아웃으로 돌아와 털썩 주저 앉았다.
뒤늦게 내게 다가오려는 동료들에게 귀찮게 굴지 말고 꺼지라고 말해버렸다. 새까만 신인이기는 하지만 그날 선발투수였던 내 기분을 생각했는지 더 이상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 루틴이 되어버렸다. 홈런을 치고 돌아와 동료들의 환호를 무시하고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것 말이다.
나중에는 결국 아무도 내 홈런에 환호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환호를 하면서도 내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인터넷으로 경기 중계를 본 성훈이 형이 전화를 걸어와 별 일 없는 거냐고,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당연히 괜찮다고, 내게 동료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대답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제대로 미친 놈이었네.
쑤욱
“헉!”
“잘했어! 잘했구먼!”
장덕수 선배가 뒤에서 날 들어올리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헉 소리가 튀어나왔다.
평생 피지컬 면에서는 한번도 밀린 적이 없는 내가 깜짝 놀랄 정도의 엄청난 힘이었다.
또 한 번 동료들이 나를 둘러싸고 축하를 해주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겁다.
진작 이런 기분을 알았다면 지난 삶에서 나는 조금 더 나은 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
* * *
<2027시즌 잠실 라이벌전 첫 경기, 워리어스 10대 8로 매지션스 제압>
<3홈런 5타점 올린 한수혁, 라이벌 매지션스를 침몰시키다>
<한수혁에게 홈런 3개 내준 히메네스 “지독한 악몽을 꾼 기분이다”>
<시즌 12경기 만에 홈런 10개 기록한 한수혁, 잠실은 지금 축제 분위기>
<매지션스 주석도 감독, 한수혁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 선수는 음···” 뒷 말을 잇지 못하다>
–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뭘?
﹂한수혁이 신인왕하고 MVP 동시에 먹는 거
﹂그걸 뭘 예상씩이나 하고 있음? 이미 확정된 거 아님? 12경기 홈런 10개인데?
﹂야 이 미친 놈들아 신인왕은 그렇다 치고 MVP가 어디 개 이름이냐?
﹂한수혁 시즌 홈런 110개 페이스임. 이대로 가면 충분히 가능
﹂미친 ㅋㅋㅋ 방금 거는 좀 웃겼다
﹂야, 너희들 그거 아냐?
﹂뭐?
﹂우리 8승 4패로 1위임. 정확히 1558일만에 1위 찍은 거
﹂그렇게 오래됨?;;;
“수혁아, 너 진짜 후회 안 하냐?”
“뭘?”
“메이저리그 안 간 거 말이야. 너 진짜, 정말···”
“후회는 무슨. 내 구단 냅두고 가긴 어딜 가.”
“아니, 진짜 암만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 거 같아. 재능낭비도 정도가 있지. 나 솔직히 너 메이저리그 가도 몇 년은 마이너에서 썩을 거라 생각했거든. 근데 어제 새벽에 메이저리그 중계보는데 너보다 잘하는 놈이 하나도 없더라.”
“당연하지. 내가 시애틀 갔으면 아메리칸 리그 MVP는 내 거였을 걸.”
“하아··· 그렇게까지는 아니겠지만 암만 생각해도 이건 아닌데···”
어라, 안 믿네?
“됐고, 그보다 구단 운영은 어때? 괜찮아?”
“어, 아주 좋아. 약간 설레발일 수도 있는데 계획대로 하반기에 메인 스폰서만 잘 잡으면 올 시즌 흑자 볼 수도 있겠더라.”
“진짜? 그게 가능해? 최소 70억은 적자 볼 거라며?”
“일단 황성민, 송기태, 한진우, 정기호, 그 놈들 내보낸 게 컸고, 그리고 다른 것보다 관중 수입이 작년보다 엄청 늘고 있어.”
“그래? 성적이 잘 나와서 그런가.”
“그것도 있겠지만··· 민예린 씨가 나서준 것도 크게 한 몫 했지. 야, 그나저나 진짜야? 민예린 씨가 너희 옆집 사는 거 맞아?”
“어, 그 이후로 집에서는 한 번도 얼굴 못 봤지만.”
“뭐 그런 우연이 다 있냐··· 아무튼 민예린 씨 쪽에서 제안이 하나 들어왔는데 이게 너무 과분해서 받아들여야 할지 말지 고민중이다.”
“무슨 제안?”
“우리 구장 광고판에 무료로 모델 해주겠데.”
“광고판? 야구장 광고판 말하는 거야? 거기 어떻게 연예인이 무료 모델을 해? 기업들하고도 얽힌 건데?”
“기업 말고 우리랑 계약하겠다는 거지.”
“뭔 소리야, 그게 대체···”
“우리가 지정한 광고판 우측 상단에 자기 이미지랑 이름 마음대로 써도 된다네. 그 광고판에 들어오는 기업은 자동으로 민예린 효과를 누리게 되는 거지. 그 대가는 알아서 받아내라던데.”
“···대체 왜?”
“몰라. 워리어스가 너무 좋아 죽을 거 같다고. 자기도 뭐라도 돕고 싶다고.”
“흐음···”
“아, 그리고 조만간 민예린 씨 아버님 한국 들어오면 만나기로 했어. 원한다면 우리 구단 자금을 대신 관리해주겠다더라. 그것도 수수료 하나도 없이. 흐흐.”
알아갈수록 이상한 여자다.
어제 처음 알게 된 민예린, 아니, 옆집 여자의 정체.
처음에는 그저 무뚝뚝한 이웃이라 생각했다. 혼자 사는 딸이 불안해서 아버지가 자꾸 옆집하고 다리를 놓아주려는 거라 착각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알고 보니 워리어스에 미친, 무상으로 축하 공연을 하고, 커피차를 돌리고, 이제는 모델까지 하겠다고 나선 광팬이란다.
구단 운영과 관련된 일이야 성훈이 형이 알아서 하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번 해야 할 것 같다.
옆집에 살고 있으니 언젠가는 얼굴을 마주칠 날이 오겠지.
“아무튼 이렇게 되면 전반기 동안 적극적으로 트레이드 노려봐도 되겠는데? 잘하면 현금 트레이드도 가능하겠어.”
“박재철 단장이 좋아하겠네.”
“그러게, 안 그래도 트레이드 머니 좀 책정해 달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데, 이러면 나도 숨쉴 구멍이 좀 생길 거 같다. 아무튼 너도 자금 걱정 같은 건 하지 말고 경기에만 신경 써. 가끔 이렇게 너 만나서 구단 얘기하는 것도 그만해야지. 괜히 부담 주는 거 같네.”
음.
아직은 조금 이른 얘기이지만 만에 하나 구단 자금 사정이 안 좋아지면 메이저리그에 가서 몇 년 뛰고 올 생각까지 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는 그런 극단적인 생각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으니 다행이다.
“그나저나 오늘 경기도 자신 있는 거지?”
“당연하지. 매지션스 저 놈들 아주 숨도 못 쉬게 밟아줄 생각이니까 한 번 두고 봐.”
“흐흐, 그래. 파이팅이다.”
* * *
“볼!”
– 뒤져! 시발! 2선발이라는 놈이 신인한테 쫄아서 3연속 볼넷을 내주는 게 야구임?
﹂매) 이게 바로 작전야구라는 거다 이 미련 곰탱이 새끼들아
﹂작전야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신인한테 겁먹어서 볼질만 할 거면 그냥 기권을 하던지
“우우!”
“겁먹었냐! 투수 겁먹었냐고!”
매지션스를 잘근잘근 밟아주겠다던 내 약속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다.
상대 선발로 나온 용병투수가 세 타석 연속 볼만 던져 대는데 뭐 나라고 별다른 방법이 있을까.
어제 경기에서 쓴 맛을 제대로 본 매지션스는 내게 단 하나의 스트라이크도 던지지 않았다.
대신 내 뒤에 나란히 배치된 맥스와 안치욱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데 성공했다.
7회말 스코어는 1대 0, 매지션스가 한 점 앞선 가운데 선두타자로 나온 나는 또다시 볼넷으로 출루했다.
“도루 여부는 자네 판단에 맡기도록 하지.”
1루 주루 코치의 귓속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세 번째 볼넷이다. 내 뒤 맥스와 안치욱이 좌타자이기는 하지만 둘 다 발이 느리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병살타를 노리겠다는 작전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 시도가 잘 먹혀 들고 있었다.
우리 팀 선발로 나선 브룩스 파커는 7회초까지 단 한점만 내주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여기서 반드시 뒤집어야 한다. 우리팀 계투진을 생각하면 역전의 기회는 지금뿐이다.
척
헬멧을 고쳐 쓰는 척하며 덕아웃을 향해 도루 사인을 먼저 보냈다. 굳은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던 수석코치에게서 승낙이 떨어졌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도루만큼은 최대한 자제하려 했다. 아직까지 내 몸은 최적의 밸런스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여기서 또 병살타가 터지면 앞으로 우리를 상대하는 팀들이 대놓고 나를 피하려 들 것이다.
꾸욱
메이저리그에서 뛸 때 나는 한 시즌 도루 30개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은 선수였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말이다.
나이를 먹으며 피지컬은 계속 떨어졌지만 반대로 경기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했다. 투수 경험이 있어서일까, 마운드에 선 투수놈들의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사실 도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단순한 발 빠르기 같은 게 아니다. 그런 거였으면 육상 선수를 데려다가 대주자를 시켰겠지.
그보다 훨씬 중요한 건 현재 경기의 흐름과 상대 배터리의 의도, 우리 타자의 패턴 같은 복합적인 정보들을 파악하는 거다.
그것만 잘 읽어낼 수 있으면 도루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심지어 지금 내게는 스무 살의 싱싱한 육체가 있다.
탓!
망설일 필요 없다. 나는 상대 투수가 맥스를 향해 초구를 던지는 순간 2루를 향해 뛰었다.
병살타를 만들기 위한 체인지업이 거의 땅에 박힐 듯 뚝 떨어졌다. 공을 던질 엄두조차 못 낸 매지션스 포수가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더.
다시는 볼넷 작전 같은 건 엄두도 못 내게 만들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