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8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81화(382/412)
#381화. 추종자
일 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 시즌이 끝나는 날이라고 말했던 어떤 노 감독의 말처럼 평생 특별한 취미조차 없이 야구에 모든 것을 바친, 그럼에도 매일 매일 그라운드를 밟는 것이 즐거운 천상진에게도 어느새 세월의 무게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올해로 38세가 된 이 좌완투수는 지난 2039시즌 팀의 2선발로 180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55, WHIP 1.30, 11승 9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전성기 시절 팀의 에이스로서 매년 2점대의 평균자책점과 20승에 가까운 승수를 올렸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 조금씩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실감하고 있었다.
최고 142㎞/h까지 나오던 포심의 구속이 135㎞/h까지 떨어졌고, 그의 주무기라 할 수 있는 체인지업과 커브의 각도 전성기에 비해서는 턱없이 무뎌졌다.
지금 그를 버티게 해주는 건 지난 세월 동안 쌓아 올린 경기 경험과 상대타자에 대한 분석력,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한 치의 차이도 없이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는 완벽한 제구력이었다.
“상진아, 뭐 그렇게 늙은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냐. 이 형님 앞에서 지금 무게 잡는 거야?”
“아, 준영 형님. 그게 아니라…….”
“흐흐, 농담이야. 아무튼 이제 슬슬 등판 준비해야지.”
“형님은 어디 가시게요?”
“응, 팔꿈치가 또 시큰거려서 마사지라도 받아볼까 하고. 이거 이 상태면 내일 제대로 던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아무튼 그럼 수고.”
아주 잠깐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던 천상진이 누군가와 대화를 마친 후 다시 평상심을 되찾았다.
자신보다 여섯 살이 더 많은, 44살이라는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KBO 최고령 투수 임준영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든 것이다.
심지어 임준영은 전성기 시절 구속과 구위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전형적인 파워피처였다. 공의 위력을 잃은 그가 그 긴 세월, 마운드 위에서 버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천상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다. 나이 탓을 하기 자신은 아직 너무 젊었다.
공을 던지고 나면 왼손으로는 젓가락조차 들어올리기 힘들어지지만, 허리와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이겨내기 위해 매일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 하지만.
“선배님,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음, 그래. 동석아. 나도 잘 부탁한다.”
그럼에도 천상진은 야구가 너무 즐거웠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해주는, 매일 똑같은 훈련과 경기가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순간의 짜릿함에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천상진은 그렇게 매일 야구와의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언젠가 이 관계가 끝나는 순간이 오더라도 한 치의 후회조차 남기지 않을 거라 다짐하며, 그는 전력을 다해 또 한 번의 선발등판을 준비했다.
* * *
‘할 수 있다. 아니, 이 정도면 무조건 우승해야지.’
서울 라이벌 매지션스와의 개막 3연전에서 3전 전승을 기록한 서울 워리어스.
1선발 한수혁, 2선발 최마루, 3선발 호세 카를로스로 이어지는 막강 선발 마운드, 2차전과 3차전에 등판해 단 한 점도 내주지 않고 2세이브를 올린 새로운 마무리 에릭 바클리, 거기에 한수혁과 데릭 플레밍의 가세로 몰라보게 단단해진 공격력까지.
그런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어 3연승을 기록한 서울 워리어스는 부산으로 무대를 옮겨 타이탄스와의 3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번 우익수 데릭 플레밍
2번 중견수 한수혁
3번 3루수 안치욱
4번 1루수 장덕수
5번 지명타자 최재민
6번 포수 박동석
7번 유격수 유인철
8번 2루수 박경배
9번 좌익수 서준석
투수 천상진
라인업 용지를 채워나가던 조성오 감독의 입가에서 침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앗, 이런, 쓰읍……!”
지난 매지션스와의 3연전에서 팀 타율 4할을 기록한, 워리어스 전성기 시절을 연상시키는 막강 라인업에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규격 외의 용병 데릭 플레밍, 올 시즌에도 MVP급 활약을 기대하게 만드는 안치욱, 시범경기의 부진에서 벗어나 드디어 홈런포를 가동한 주포 장덕수, 매년 20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주는 최재민, 거기에 박동석과 유인철로 이어지는 강력한 하위타선까지.
비록 신인들로 채워진 2루수와 좌익수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괜찮다.
이곳은 메이저리그가 아닌 KBO다. 어떤 팀이든 저 정도 구멍은 안고 가는 법이다.
개막 후 고작 3경기 만에 모든 물음표를 긍정의 느낌표로 바꿔버린 워리어스.
이제 남은 걱정이 있다면 각각 38세, 44세 시즌을 맞이하게 된 천상진과 임준영, 이 두 명의 노장들이 4, 5선발 자리에서 어느 정도 버텨주냐 하는 것이다.
여차 하면 대체 선발로 투입될 수 있는 선수들이 대기 중이긴 하지만, 아직 그들은 배울 게 많은 신인에 불과하다. 중간계투로 뛰며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하는 애송이들이다.
‘조금만 힘내자. 준영아, 그리고 상진아.’
그들과 함께 현역 생활을 보냈던 조성오는 천상진과 임준영이 하루라도 더 현역으로 버텨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자신을 비롯한 여러 선배들이 모두 그라운드를 떠난 상황에서 끝까지 한수혁을 기다리며 자리를 지켜온 그들이 또 한 번 선수로서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길 원했다.
그것이 오랜 시간 그라운드에서 한수혁을 기다려온 이들에 대한 보답이 될 거라 생각했다.
벌컥
“자, 얘들아! 선발 라인업이다! 거기 안치욱, 바지는 제대로 입고 돌아다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 * *
‘드디어 내게도 이런 순간이……!’
한수혁이 한국을 떠나 있던 지난 10년간 가장 큰 변화를 가진 팀을 꼽으라면 역시 부산 타이탄스일 것이다.
출신 학교와 고향,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쳐 수십 년간 권력을 독차지해 온 카르텔들이 새로운 구단주의 취임과 함께 모두 쫓겨난 후,
부산 타이탄스는 워리어스 출신의 지도자, 프런트 직원들을 대거 스카웃하는 한편 워리어스의 운영 시스템을 그대로 벤치마킹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오랜 시간 최하위권에 처박혀 있던 부산 타이탄스는 꾸준히 가을야구에 얼굴을 내미는 중상위권 팀으로 도약했고, 급기야 지난 2039시즌에는 무려 40년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쾌거를 일궈냈다.
물론 한국시리즈에서 매지션스에 4연패를 당하며 광탈하긴 했지만.
어쨌든,
올 시즌 48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 나아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한 사상 첫 통합 우승에 도전장을 내민 부산 타이탄스.
그 부산 타이탄스의 핵심 선수 중 하나이자 한수혁 이후 유일무이하게 투타 겸업 도전에 성공한 박장열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지난 2039시즌 투수로서 140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78에 9승 8패를 기록한, 그리고 타자로서 타율 0.278, 출루율 0.355, 장타율 0.425, 17홈런 78타점을 올린 타이탄스의 간판스타 박장열.
오늘 그는 자신의 우상이자 정신적 스승인 한수혁을 상대로 선발등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열아, 어깨 상태는 어때? 아직도 통증이 느껴지냐?”
“아뇨, 괜찮습니다. 트레이너 님.”
“그래, 아무리 만성적인 거라고 해도 절대 그냥 넘기면 안 돼. 조금이라도 문제 있다 싶으면 바로 말하라고.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한수혁 등장 이후 전 세계 수많은 야구선수들이 투타 겸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국과 일본, 대만, 중국, 미국 등 프로야구가 존재하는 거의 모든 국가의 야구 유망주들이 한수혁을 롤모델로 삼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모두 폭망했다.
한두 해 정도 반짝 성적을 올린 선수는 있지만 그 누구도 다섯 시즌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누군가는 어깨 부상으로 투수를 접기도 했고, 또 심각한 타격 성적 때문에 반강제로 투수 전향을 강요당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부산 타이탄스의 박장열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투타 겸업 생존자였다.
비록 12시즌 동안 제대로 투타 겸업을 한 시즌은 다섯 번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 성적이나마 낼 수 있었던 건 박장열이 상당한 야구 재능의 소유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걸을 때는 최대한 보폭을 짧고, 빠르게, 왼쪽으로 살짝 무게추를 기울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그렇지… 잘한다, 박장열.’
박장열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광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한수혁을 연구하고 벤치마킹했다는 것이다.
단순한 롤모델을 넘어 한수혁을 정말 신으로 생각하는 박장열은 한수혁의 모든 것을 연구했고, 그것을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평소 식단과 훈련 방법 같은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걷는 법, 숨 쉬는 법, 말하는 법,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버릇 하나하나까지 모두.
그럼에도 뜻밖에 찾아오는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괜찮은 성적을 낸 시즌 다음 해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부상이 찾아왔고, 그렇게 한두 해 시즌을 망친 후에는 투타 겸업을 포기하라는 압박이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박장열을 포기하지 않았다. FA 계약 체결 시 투타 겸업 허용을 최우선 조건으로 삼을 정도로 의지를 불태웠고, 타이탄스의 구단주 역시 그를 팬으로서 지지한다며 선뜻 도장을 찍어주었다.
“오빠! 이쪽, 이쪽 봐요!”
덕아웃을 나와 그라운드로 발길을 옮기는 박장열을 향해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이번 시즌이 끝난 후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한 박장열의 예비신부가 1루 관중석에서 그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옆으로, 두 걸음 더, 오빠, 조금만 뒤로, 뒤로, 오케이! 거기 그대로!”
그런 예비 신부의 지시에 따라 그라운드 위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옮긴 박장열이 다 됐다는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지고 근사한 포즈를 잡으며 물었다.
“됐어? 확실하게 카메라 앵글에 들어가는 거 맞지?”
“맞다니까요, 오빠, 지금 자세 좋아요.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
잠시 후 예비신부의 카메라 플래시가 연이어 발광했다.
한참 동안 자세를 잡은 채 그대로 서 있던 박장열이 관중석과 그라운드 사이를 가로막은 안전망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어디, 어디, 빨리 보여줘봐.”
“잠시만요. 음, 이거 저번에 찍은 건데 안 지웠네. 넘기고, 넘기고, 오케이, 여기부터네요. 확인해 보세요.”
예비신부가 박장열을 향해 카메라 디스플레이를 내밀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방금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확인한 박장열이 어느 순간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라운드 위 멋진 자세를 잡고 있는 자신의 등 너머, 상대팀 덕아웃 앞에 한수혁의 모습이 함께 잡혀 있었다.
“민지야, 수고했다. 네 덕분에 내 버킷리스트 하나가 이뤄졌어.”
“근데 오빠, 이럴 거면 차라리 같이 사진 한 장 찍어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어허, 모르는 소리. 그건 너무 인위적이잖아. 그보다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각도에서… 그리고 괜히 사진 찍어달라고 했다가 수혁이 형 컨디션 망치면 어떻게 해? 그건 안 되지.”
상대 타자의 컨디션을 망치면 당신에게는 좋은 일 아니냐는 말이 예비신부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쑥 내려갔다.
둘이 사귄 지도 어느덧 5년, 박장열이 한수혁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살짝 한숨을 내쉰 예비신부 정민지가 박장열을 향해 말했다.
“이 사진들 전부 액자로 만들면 되죠?”
“어, 제일 크고 비싼 걸로. 그리고 원본은 내 메일로 좀 보내주고. 사이즈 줄이지 말고 고해상도 원본 그대로.”
“네, 오빠.”
마침내 경기 전 꼭 해야 할 일을 무사히 마친 박장열이 마운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경기 준비가 모두 끝나고, 오늘 2번 타자로 이름을 올린 한수혁이 대기 타석에 들어섰다.
그것을 본 박장열이 큰 소리로 외쳤다.
“선배님!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