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8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83화(384/412)
#383화. 오래된 친구
시즌 초반, 대권 도전을 위해 어떻게든 한수혁의 약점을 찾아내려 노력했던 KBO 구단들은 어느 순간 너무나도 당연한 진실에 봉착하게 되었다.
전 세계 스포츠계의 모든 자본과 핵심 두뇌들이 집중되어 있는 메이저리그에서조차 찾지 못한 한수혁의 약점을 자신들이 찾아낼 가능성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수혁에 대한 노골적인 견제가 시작되었다.
[인천 레인저스 3연전에서 12타석 연속 고의사구 기록한 한수혁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고의사구다. 하지만 내가 묶여 있어도 다른 동료들이 잘 해줄 것이라 믿는다.”] [2사 만루 상황에서 한수혁에 자동고의사구 지시한 인천 레인저스의 일본인 감독 나카무라 도모야키 “우리의 경쟁 상대는 같은 인간들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한수혁은 인간이 아니다. 2사 만루에서 자동고의사구가 너무하다고? 글쎄, 그러다가 만루 홈런을 맞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선발투수 한수혁을 상대할 뾰족한 방법은 없었지만, 타자 한수혁에 한해서는 어느 정도 쓸 만한 공략법이 존재했다.
한국에서, 메이저리그에서, 그리고 다시 한국에서 끝도 없이 시도된 바 있는 마지막 필살기, 고의사구.
한수혁의 타율이 4할 중반대를 넘어 후반대까지 치솟자 상대 팀들은 아예 한수혁을 없는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의 앞 타자인 데릭 플레밍이 0.450에 달하는 고 출루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 팀들은 망설임 없이 한수혁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다음 순번 타자들에게로 전이되었다.
안치욱과 장덕수, 최재민으로 이어지는 워리어스 중심타선에게로 말이다.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당시 한수혁의 뒤에는 타이 존슨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존재했다. 한수혁을 거르고 싶어도 거를 수 없게 만드는, 은퇴 후 첫 번째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최고의 타자가.
그가 은퇴한 후에는 데릭 플레밍, 제임스 테일러, 척 클락 등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타자들이 한수혁의 뒤를 지켰다.
그리고 지금, 워리어스에서 그 역할을 맡게 된 건 그의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 안치욱이었다.
2039시즌 타율 0.348, 출루율 0.420, 장타율 0.574, 23홈런 113타점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MVP와 3루수 골든글러브를 비롯 타율과 장타율, 타점, 3개 부문의 타이틀을 차지한 KBO 최고의 좌타자 안치욱.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한수혁에게로 쏟아지는 집중 견제를 막아내는 건 무리였다.
투수들은 한수혁을 피하고 안치욱에게 승부를 걸었고, 그런 일이 잦아지자 안치욱의 타격감에도 조금씩 문제가 발생했다.
따아악!
“아웃!”
– 아, 아깝습니다! 워리어스의 마지막 역전 찬스가 그대로 무산됩니다! 4-6-3으로 이어지는 병살타, 안치욱 선수가 친 타구가 병살타가 되고 맙니다.
– 너무 성급했어요. 루상에 나가 있는 데릭 플레밍과 한수혁 선수가 모두 발 빠른 주자인 걸 감안하면 조금 더 신중한 타격을 가져갔어야 했어요. 상대 투수 역시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었거든요. 조금 더 공을 지켜봤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 결정적인 찬스에서 병살타를 친 안치욱 선수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배트를 부러뜨립니다. 아, 저 선수가 저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네요.
– 최근에 한수혁 선수에 대한 노골적인 견제가 시작되면서 안치욱 선수에게 찬스가 가는 일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거든요. 제가 타자 출신은 아니지만 선수들에게 들어보면 저럴 때 참 기분이 더럽, 흠, 죄송합니다. 나쁘다고 하더군요. 부담도 되고요.
– 그럼에도 안치욱 선수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임에는 분명하겠죠?
– 맞습니다. 앞으로도 상대팀들은 한수혁 선수를 상대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미국에서 타이 존슨 같은 대선수들이 했던 역할을 이제 안치욱 선수가 해줘야 해요. 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광주 재규어스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 팀이 한 점 차로 뒤진 상황에서 맞이한 원아웃 1, 3루 찬스에서 끝내기 병살타를 치고 만 안치욱이 고개를 툭 떨군 채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오늘 패배로 워리어스는 33승 10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압도적인 1위였다. 하지만 안치욱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야, 안치욱. 고개 들어. 병살타 하나 쳤다고 세상 다 산 얼굴 할 거야?”
“죄송합니다. 코치님.”
후배, 동료, 그리고 코치들이 너도나도 안치욱을 격려했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한수혁이 미국으로 떠난 후 서형주와 함께 이 팀의 타선을 이끌어 온, 프로 10년차에 접어 들어서는 국내 최고의 좌타자로 불리게 된 안치욱.
리빌딩의 여파로 팀 성적이 수직 하락하는 가운데도 홀로 워리어스 타선을 이끌던 그는 한수혁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했다.
아주 오래 전 그와 했던 약속, 워리어스를 최고의 팀으로 만들어보자는 약속을 다시 한 번 떠올렸고, 세계 최고의 선수와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수혁은 안치욱에게 친구이기 전에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시발…….”
하지만 지금 이 꼴이 뭔가.
그의 뒤를 굳건히 받치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건만, 자꾸만 자신이 팀의 발목을 잡고 있지 않은가.
씁쓸한 표정으로 클럽하우스를 빠져나가는 안치욱, 그런 그의 어깨를 누군가 뒤에서 잡아챘다.
“…누구?”
“이놈은 또 이러고 있네. 야, 안치욱. 너 나 좀 따라와라.”
“한수혁? 따라오라고? 어딜… 야, 놓고 말해. 아, 무슨 힘이 이렇게 센데!”
안치욱의 팔을 잡아 끈 한수혁이 어딘가로 향했다.
두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 워리어스 팬들이 깜짝 놀라 그들을 바라봤지만 함부로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한수혁의 표정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 어! 한수혁 선수!”
“잘 계셨죠, 사장님? 저희 조용한 자리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그럼요. 물론이죠. 자, 이쪽으로… 이런, 오늘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좋은 안주 좀 준비해놓는 건데.”
“괜찮습니다. 간단한 안주거리하고… 야, 안치욱. 너 소주 마실래, 맥주 마실래?”
“술? 야, 방금 경기 끝났는데 술은 무슨…….”
“내일 휴식일이잖아. 그리고 내가 이 구단 주인이야. 넌 내 고용인이고. 됐고, 그냥 주는 대로 마셔라. 사장님, 여기 소주 두 병만 일단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
술집 안에 발을 디딘 안치욱은 그제야 이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오래 전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한수혁이 데리고 왔던 작은 술집.
다시 한 번 와보고 싶었지만 혼자서는 결국 위치조차 찾을 수 없던,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간판조차 찾기 힘든 작은 술집이었다.
“맛있게 드십쇼.”
“감사합니다.”
주문한 음식과 술이 나오고, 한수혁이 먼저 술병을 들어 안치욱에게 한 잔을 따랐다. 이어 안치욱도 한수혁의 잔을 채워주었다.
“음…….”
“야, 너 이틀 후에 선발등판인데 술 마셔도 괜찮은 거냐?”
“이 정도는 괜찮아. 내일 회복 훈련 열심히 하면 충분히 복구 가능하니까.”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나저나 여기 진짜 오랜만이네. 이런 데 있으니 내가 혼자서는 못 찾았지. 안 망하고 10년 넘게 버티는 게 진짜 용하다.”
“그런 건 됐고. 야, 안치욱.”
“어, 왜?”
“너도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웬만하면 그냥 지켜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거 나이만 먹었지, 여전히 어린애야.”
“내가 뭘 또, 넌 왜 나만 보면…….”
“안치욱, 내가 예전에 너한테 했던 말 기억 나냐? 처음으로 내 연습장 데려간 날.”
“연습장? 아… 기억나지. 대뜸 내 몸 쪽으로 160 꽂은 날? 시발, 그때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하네. 야, 그때 그거 나 기 살려 주려고 한 거 맞아? 혹시 완전히 기 죽여서 은퇴시키려고 한 건 아니고?”
“헛소리 말고. 내가 그때 너한테 뭐라고 했냐?”
“멍청이? 모지리? 욕을 하도 들어서 그것 말고는 기억도 안 나네.”
“…그거 말고, 내가 그랬잖아. 혹시나 내가 KBO에서 타이틀을 뺏기게 되는 불상사가 생기면 높은 확률로 너일 거라고.”
“뭔가 표현이 많이 다른 것 같지만 대충 기억은 난다. 맞아. 그랬지.”
사실 기억난다 정도가 아니었다. 그날 그 사건은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던 안치욱이 독하게 마음을 먹은, 모든 걸 잊고 온전히 야구에 집중하게 만들어준 중요한 분기점이었으니까.
다만 안치욱은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우상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조금 부끄러웠을 뿐이다.
그런 안치욱의 속내를 읽은 것인지 한수혁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어?”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최고야.”
“…또 잘난 척이냐.”
“그냥 최고도 아니고 세계 최고, 그리고 역사상 최고지.”
“그래… 너 잘났다. 잘난 거 아니까 술이나 마셔라.”
허탈한 표정이 된 안치욱이 앞에 놓인 잔을 들이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제자리에 머무는 사이 친구는 한국을 넘어 미국, 아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구선수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선수와 한 팀에서, 그것도 한국 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 안치욱을 말없이 바라보던 한수혁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안치욱, 내가 보기엔 넌 아직 멀었어.”
“그래, 나도 야구 못하는 거 아니까 그만해라.”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남아 있는 포텐이 있다고.”
“…뭔 소리야. 야, 나도 이제 프로 14년차야. 포텐은 고사하고, 지금 기량을 유지하는 것도 벅…….”
“시끄럽고,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너랑 형주는 딱 반반씩 섞어놔야 해. 어쩜 이렇게 하는 짓이 정반대냐.”
“뭔가 욕으로 들리는데.”
“됐고, 너 내일부터 다시 내 연습실로 나와. 제이콥에게 말해놓을 테니 그 사람이 주는 프로그램 확실하게 따르고.”
“뭐?”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니까 잘 들어. 야구선수로서 종합 능력치는 몰라도 타격만 놓고 보면 네 재능이 형주보다 나아. 문제는 네 그 소심한 마인드지. 툭하면 움츠러들고, 압력이 가해지면 자꾸 쭈그러들고. 예전에야 어려서 그랬다 쳐도 이제는 아니지. 야, 안치욱. 그냥 지금처럼 그만저만한 선수로 남아서 대충 돈이나 벌다 은퇴할 거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그게 아니고, 내 발뒤꿈치라도 따라오고 싶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이해했냐?”
“…….”
“대답.”
“…알았다고. 젠장, 너 미국 가더니 은근히 말이 많아졌다.”
“시끄럽고, 내가 확실하게 네 목표를 정해주지. 무슨 수를 써서든 내 뒤를 따라와. 나 빼고는 그 어떤 타자에게도 지지 마. 그리고 시즌 끝나면 미국 갈 준비해.”
“미국? 갑자기?”
“구단주로서 말하는 건데 워리어스는 너에게 FA계약 제안 안 할 거야. 대신 매리너스에서 너에게 오퍼를 넣을 거다. 단, 네 이름 앞에 한수혁을 제외하면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KBO 최고의 타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때에 한해서.”
“…….”
“네가 워리어스 지키겠다고 해외 진출 꿈 접어둔 거 아는데, 이제 됐어. 여긴 내가 지킬 테니 미국 가서 형주 그놈하고 놀아. 그 김에 내 아파트도 좀 비우고.”
“…내가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될까라고 물어봐야지.”
“그래,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이미 말했잖아.”
“뭘?”
“내 뒤를 따르라고. 앞으로 1년 동안 나한테서 가져갈 수 있는 걸 다 가져가라고. 이제 이해했냐?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저 마시고 집에 가자.”
고개를 푹 떨군 안치욱이 말없이 술잔을 연거푸 기울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한수혁이 본인의 감정을 내비치는 데 얼마나 인색한 사람인지, 그럼에도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자신을 그만큼 아끼기 때문이라는 걸.
두 번째 FA 취득, 그리고 미국 진출.
오랜만에 돌아온 소중한 친구가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목표를 제시해 주었다. 더불어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안치욱은 생각했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행운은 워리어스의 지명을 받은 걸 거라고, 그리고 그곳에서 이 세계 최고의 선수이자 친구를 만난 걸 거라고.
“…고맙다. 한수혁.”
“됐고, 그나저나 너 진짜 이사 안 갈 거야? 나 돌아왔는데 아직도 내 집에서 비비적거릴 거야? 그럴 거면 차라리 그 집을 사든지.”
“어차피 그 층에 있는 집들 다 너랑 민예린 씨 거잖아. 야, 그러고 보니 요즘 민예린 씨 안 보이네. 싸웠냐?”
“싸우긴 무슨. 이상한 데로 말 돌리지 말고 집 비우라고. 돈도 많이 버는 놈이.”
“한국 개인 자산 순위 3위 안에 드는 놈한테 돈 많이 번다는 소릴 들으니 기분이 묘한데.”
“하, 이 놈 안 보는 사이에 꽤나 뻔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가게 주인이 영업종료 팻말을 내 걸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작은 술집.
한수혁은 밤이 깊어가는 것도 모른 채 10년 만에 만난 친구와 오랜 대화를 나눴다. 오늘은 그가 태어나 가장 많은 술을 마신 날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