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89)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88화(389/412)
#388화. 그를 위한 헌정 경기
“잘 들어라. 아무리 한수혁이라고 해도 모든 공을 다 쳐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데이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몸 쪽과 바깥 쪽 낮은 코스 공에 대한 타율이 한가운데 공에 비해 무려 0.028이나 떨어진다. 중요한 건 결코 꺾이지 않는 마음, 그래, 기백이다. 내 말 알아들었나!”
“에,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요. 기백, 음, 기백을 스페인어로는 어떻게 옮겨야 하지? 잘 모르겠군요. 어쨌든 그렇게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라파엘 선수, 방금 감독님이 뭐라고 했냐 하면…….”
감독의 입에서 나온 일본어가 통역을 통해 한국어로, 다시 또 다른 통역을 통해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투수에게로 전달되었다.
인천 레인저스가 이중 통역이라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본인 감독을 영입한 건 최근 5년간의 성적 부진이 기량보다는 선수단의 기강 해이에 있다는 구단주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에서 3개 구단의 지휘봉을 잡으며 두 차례의 재팬시리즈 우승을 일궈낸 나카무라 도모야키.
올해 80대에 접어든 노장 중의 노장이 엄청난 연봉을 보장받고 한국 땅을 밟았다. 자신의 야구 철학인 정신력과 기백, 그리고 선수단의 질서를 실현하기 위해.
“잘 들어라. 용병이라고 해서 특혜는 없다. 조금이라도 해이한 모습을 보일 경우 곧바로 2군에 처박아버릴 거다. 마운드에서는 머리를 비워라. 모든 사인은 내가 직접 내릴 것이다. 너는 그냥 사인에 맞춰 공만 제대로 던지면 된다는 뜻이다. 알아들었나, 라파엘?”
“이봐, 지금 저 영감이 뭐라고 하는 거야?”
“잠시만, 음, 그러니까 벤치에서 상황별로 적절한 사인을 내려줄 테니 마운드에서 그걸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오늘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다. 혹시나 몸에 이상이 있으면 미리 말해라. 2군에 잠깐 내려가서 밸런스를 조정할 시간을 주겠다, 뭐 이런 말이야.”
“그래? 뭔가 표정하고 말이 매치가 안 되는데? 그나저나 이 데이터는 왜 보여주는 거야? 가운데 코스 타율이 0.499, 바깥쪽 낮은 코스 타율이 0.471. 여기 동그라미 친 건 뭔데? 여기로 던지면 된다는 뜻인가?”
팀 내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자신과 말이 통하는 스페인어 통역, 그를 향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것저것 묻던 오늘의 선발 투수 라파엘 로드리게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는 이쯤 하고 가서 경기 준비해야 한다고 전달해줘.”
“자, 잠깐 라파엘, 에… 그러니까 지금 이 친구가 뭐라고 했냐 하면 말이죠. 오늘은 몸을 좀 일찍부터 풀어야 해서 본의 아니게 회의를 마쳐…….”
두 명의 통역을 사이에 두고 오간 감독과 선수 간의 대화가 그렇게 끝났다.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라파엘의 뒤통수를 쏘아보던 나카무라 감독이 자신의 일본어 통역에게 말했다.
“내 뜻은 확실히 전달된 거겠지?”
일본어 통역은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 감독이 말한 그대로 스페인어 통역에게 말을 전했지만 그 사람이 선수에게 뭐라고 했는지 내가 어찌 알겠냐고.
하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에 적어도 1년은 든든한 수입원이 되어줄 통역 일을 맡게 된 남자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그에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감독님, 잘 알아들었을 겁니다.”
“흠.”
* * *
KBO에서 뛰는 용병들을 크게 두 그룹으로 분류하자면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며 경험을 쌓은 부류와 메이저리그 입성 문턱에서 매번 좌절을 겪은 끝에 더 이상의 도전을 포기하고 한국행을 선택한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갖고 있는 용병들을 한국에서 뛰게 하기 위해서는 연봉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여러 가지 옵션들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연봉에 포함되지 않은 각종 인프라 제공과 국내 선수와 차별화되는 특별대우 등.
그런 대우를 받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콧대가 올라가게 되고, 다른 팀 선수들뿐만 아니라 같은 팀 선수들까지도 은근히 깔보게 되는, 쉽게 말해 어깨에 뽕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2040시즌, KBO에서 뛰고 있는 용병선수들은 그런 일반적인 법칙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한수혁 때문이었다.
지난 10년간 메이저리그를 완전히 평정한, 그리 길지 않은 플레이 타임에도 불구하고 야구의 신이라 불리게 된 절대 강자.
그런 그가 한국에서 뛴다는 것에 용병 선수들은 경악했다.
메이저리그 경력이 많은 선수들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강했다.
자신들이 메이저리그 언저리에서 눈치를 보며 데굴데굴 구르던 당시 그 무대를 완전히 박살 내버린 대선수가 눈앞에 있는데 어찌 거드름을 피울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대부분의 용병 선수들에게 한수혁은 롤 모델이자 우상이기도 했다.
오늘, 나카무라 감독의 특명을 받고 마운드에 오른 3위 팀 인천 레인저스의 에이스 라파엘 로드리게스도 그 중 하나였다.
‘음.’
아주 오래전 자신이 미네소타 트윈스의 유니폼을 입고 처음 메이저리그 무대에 발을 디뎠을 때가 떠올랐다.
도미니카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평생 빅리거의 꿈을 품고 안고 살아온 그에게 메이저리그 콜업은 그야말로 꿈이 현실이 되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마이너 시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우와 빅리그 선수들에게만 주어지는 갖가지 특혜들.
하지만 달콤한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베테랑들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어깨를 잡고 고함을 질러대는 감독의 기분을 맞춰주며 불펜투구를 이어갔지만 그가 바라던 데뷔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팀은 최하위를 맴돌고, 뉴스에서는 매일 팀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이 나돌고,
그러던 어느 날, 미네소타 트윈스는 리그 최강팀이라 불리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경기를 갖게 되었다.
따아악!
따악!
따아악!
강했다.
시애틀은 정말 강했다.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베테랑 투수들이 시애틀의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무너졌다. 급기야는 팀의 10연패를 막기 위해 팀 내 최고의 구위를 가진 마무리 투수가 조기에 등판하기까지 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마운드에 오르는 구원투수.
불펜 투구를 잠시 멈춘 라파엘 로드리게스가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시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팀의 주전 마무리 투수.
그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지이이잉!
귀청이 떨어질 듯한 강렬한 베이스 연주음과 함께 누군가 타석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한수혁.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이며 동시에 최강의 투수인,
짧은 커리어와 동양인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라 불리게 된 야구의 신.
평소 루키들 앞에서 잔뜩 무게를 잡던, 그리고 그만큼의 실력을 갖췄던 미네소타의 마무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뿌렸다.
그리고,
따아아아아아악!
난생 처음 들어보는 거대한 타격음이 울려 펴졌고, 투수가 마운드 위에 그대로 무너졌다.
그날, 라파엘 로드리게스는 알게 되었다.
한수혁이 왜 야구의 신이라 불리게 된 것인지, 전 세계 야구선수의 정점에 서 있는 선수가 어떤 플레이를 할 수 있는지.
그때부터였다.
라파엘이 한수혁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게 된 것이.
‘약점을 공략하라고? 신성모독이군. 신에게 약점 따위가 있을 리 없지.’
투구를 앞둔 라파엘이 감독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통역 두 명을 끼지 않으면 대화조차 불가능한 감독은 말했다.
한수혁에게도 분명 약점은 있다고. 그곳을 집중 공략하면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글쎄,
이번 시즌 11번의 선발 등판에서 평균자책점 2.89, 6승 3패의 호성적을 기록 중인 라파엘이지만 단 한 번도 한수혁을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오늘 이 경기는 승부가 아닌, 자신의 우상 한수혁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 경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래전 메이저리그에서 만났던 풋내기가 이만큼 성장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그래서 저 야구의 신에게 아주 약간의 인정이라도 받아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인천 레인저스의 에이스 라파엘 로드리게스에게 오늘 경기는 그런 의미였다.
“플레이!”
경기 개시 사인이 울리고, 워리어스의 리드오프가 타석에 들어섰다.
데릭 플레밍, 야구의 신과 함께 전성기를 보낸, 그리고 무적 시애틀 매리너스 함대를 이끈 주역 중 하나인 최고의 타자.
누군가는 저런 커리어를 가진 선수가 왜 KBO에서 뛰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말하기도 하지만,
글쎄,
다른 사람도 아닌 한수혁이, 야구의 신이 부르는데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 누구보다 데릭 플레밍의 선택을 이해하고 응원하는 라파엘 로드리게스가 타자의 몸 쪽 낮은 코스를 향해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을 뿌렸다.
그리고,
따아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가 만들어졌다.
‘음.’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라파엘의 표정에는 약간의 미동도 없었다.
아니, 그런 걸 생각할 여력조차 없었다.
[2번 타자 중견수 한수혁]그가 타석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자신이, 아니, 전 세계 야구선수들이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그가 타격을 위해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버지, 지켜봐 주세요. 당신의 아들이 야구의 신과 한 무대에서 뛰고 있습니다.’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에게 마음 속 인사를 올린 라파엘 로드리게스가 천천히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1루 견제 따위는 필요 없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하나,
야구의 신에게 자신이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에게 인정받는 것.
오늘을 위해 피땀 흘려 갈고 닦은 멋진 투구 폼,
그의 손끝에서 하얀 공 하나가 떠올랐다.
순간 라파엘은 깨달았다.
지금 이 공이 평생 자신이 던져온 수만 개의 공들 중 가장 완벽한 공이라는 걸.
하지만,
따아아아아아아악!
아주 오래 전 어딘가에서 들었던 그 거대한 타격음이 또 한 번 재현되었고,
“우아아아아아아!”
“간다아아아아아!”
“한수혀어어어억!”
이곳이 홈인지 원정인지 헛갈리게 할 정도의 엄청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훗… 결국 이런 거겠지.”
투런 홈런을 허용했지만 라파엘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타구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라파엘이 대신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타구를 감상하고 이제야 천천히 1루를 향해 나갈 준비를 하는 야구의 신.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라파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한수혁의 표정에서 방금 전 자신이 던진 공이 제법 괜찮았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자신의 우상에게 인정을 받았단 생각이 들자 라파엘의 입가에 맺힌 웃음이 더욱 선명해졌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지금 이 순간 중계 카메라가 자신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있었음을.
– 아, 뭐죠?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투런 홈런을 허용한 라파엘 로드리게스 선수가 활짝 웃고 있네요?
– 정말 그러네요? 인천 덕아웃에서는 감독이 노발대발 난리가 났는… 흠, 혹시 너무 큰 홈런을 맞아서 넋이 나가기라도 한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