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39)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38화(39/412)
#38. 홈 승부
나는 도루를 즐겨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 플레이 자체는 꽤 좋아한다.
다른 플레이와 달리 도루는 몸 상태가 완전치 않아도, 슬럼프가 찾아와도, 언제든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대 최고의 리드오프 중 하나인 리키 핸더슨이 39세의 나이에 도루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도루 성공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건 피지컬이 아닌 경험이다.
경기 상황에 따른 상대 배터리의 볼 배합, 벤치의 사인, 수비 포메이션, 현재 투수의 심리상태, 그라운드의 상태, 관중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 등등.
나처럼 오랜 시간 야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을 읽는 눈을 가지게 된다.
루상에 나가 상대 투수의 뒤통수를 보다 보면 그들의 심리 상태가 자연스럽게 내게로 전해진다.
그래서 가끔은 도루가 너무 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심지어 내가 생각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반응하는 이런 육체를 갖고 있다면 더더욱.
슈웅
생각지도 못한 도루에 반쯤 넋이 나가 있던 투수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맥스를 향해 2구를 던졌다.
보나마나 뻔하다. 이번에는 몸 쪽으로 붙이는 투심이겠지.
탓!
“세이프!”
예상대로다.
지금 저 상황에 저 투수가 던질 공이라는 게 뻔하지.
몸 쪽으로 붙는 투심에 맥스가 큰 헛스윙을 했고, 매지션스 포수 박수길이 전력을 다해 송구했지만 이미 나는 3루에 도착한 상태였다.
매지션스 포수가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길래 콧방귀를 한번 껴줬다.
“우와···”
“한수혁 쟤는 진짜···”
“저렇게 설렁설렁 뛰는데 왜 빠른 거지?”
“진짜 왜 메이저리그에 안 간 거래?”
“워리어스 우승시키고 싶었다잖아.”
“그게 진짜였어··· 미친, 나 같으면 무조건 메이저리그지.”
워리어스 덕아웃에서 나즈막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대기타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치욱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런 모습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다.
말도 안 되는 장타력으로도 모자라 단숨에 2루, 3루 도루를 성공시키는 기동력까지.
아무리 의식 안하고 자신만의 길을 가려 해도 입단 동기의 활약을 볼 때면 자신이 초라해진다.
‘치잇’
그래, 나는 저 놈의 괴물 같은 능력을 따라잡기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뿐이다.
인정한다. 한수혁이라는 선수는 내가 감히 도전하기 힘든 괴물이다.
하지만 단 하나. 안타 하나만큼은 저 놈만큼 쳐내고 싶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따악!
“아웃!”
안치욱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맥스 워커가 친 타구가 좌익수 정면으로 날아갔다.
비거리가 짧은 탓에 3루에 있던 한수혁이 태그업을 포기하고 한숨을 푹 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주장인 조성오 선배가 가벼운 근육통으로 라인업에서 빠졌다. 어떻게든 내가 이 상황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하자. 지금 내가 할 일은 저 놈을 홈으로 불러들이는 거다.
모처럼만에 머리속이 깨끗해진 안치욱이 타석에 들어섰다.
“야, 너도 인사 안 하냐? 아무튼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버르장머리 하고는.”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분이 안 좋은 건지 매지션스의 고참 포수가 인상을 쓰며 시비를 걸어왔다.
한수혁이 가르쳐준 대로 굳이 대답하지 않고 무시했다.
괴물 같은 동기놈이 말해줬다.
야구를 하면서 친절하게 대할 대상은 팬과 동료 선수 외에는 없다고. 만약 누가 괴롭히면 자신이 대신 때려줄 테니 쫄지 말라고.
웃긴 놈이다. 지나 나나 같은 신인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등 뒤에서 포수가 또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지만 애써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대신 온 신경을 상대 투수에게 집중했다.
‘150 가까운 투심, 체인지업, 슬라이더··· 삼진을 노릴 때는 주로 슬라이더를 던진다고 했지’
오늘 몇 번 상대하기는 했지만 다시 한 번 상대 투수의 특징을 되짚어 본다.
그래, 지금 투수는 1대 0 리드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나를 삼진으로 잡으려 할 거다. 여기서 외야 플라이나 내야 땅볼이 나오면 발 빠른 한수혁이 홈으로 파고 들 테니까.
이럴 때 좌투수가 좌타자를 상대로 던질 공은 단 하나.
존 밖으로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볼!”
보더 라인을 타고 존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공을 차분히 기다렸다.
볼 카운트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승부다.
상대 투수가 천천히 투구를 시작했다. 3루에 있는 한수혁은 당장이라도 홈으로 뛰어들 것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며 투수를 괴롭혔다.
슈웅!
그 순간 상대 투수의 손에서 튀어나온 공이 안치욱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게임을 하듯, 그 공이 앞으로 그려 나갈 궤적이 눈에 들어왔다.
‘흡’하고 숨을 한 번 들이마신 안치욱이 팔꿈치를 몸통에 딱 붙이고 임펙트를 한 번 준 후 강하고 빠르게, 아무런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스윙을 시작했다.
한때 한수혁조차 질투했던 그 아름다운 스윙의 궤적이 공과 만났다.
따아악!
분명 배트에 공을 맞췄건만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얼마나 큰지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다. 매지션스 포수가 또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내가 치긴 친 건가? 그런데 왜 타구가 안 보이지?
그때였다. 3루에 서 있던 한수혁이 천천히 홈플레이트로 들어오며 크게 소리쳤다.
“뭐해? 1루로 안 가고?”
“응?”
“역전 홈런 친 놈이 왜 거기 서 있어? 빨리 안 뛰고.”
“홈런이라고? 내가?”
한수혁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진 안치욱이 허둥지둥 1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매지션스 1루수가 기분 나쁜 듯 노려봤지만 눈에 막이 낀 것처럼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2루를 밟고, 다시 3루를 밟고 홈플레이트로 향했다. 그리고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베이스를 밟는데 성공했다.
“안치욱! 이 새끼 이리 와!”
“여기서 신인이 역전 홈런이라니! 야! 오늘 얘보다 못한 놈들은 다 특타다!”
“잘 했어! 잘 했어!”
덕아웃에 있던 동료들이 뛰어나와 안치욱을 둘러쌌다. 그 한 발 뒤에서 한수혁이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나쁜 놈이다. 입단 동기인 주제에 가끔은 자신을 철부지 어린 동생처럼 쳐다본다.
그래도 뭐, 오늘 홈런의 지분 절반 이상은 저 놈 덕인 걸 알고 있다.
“우와와!”
“안치욱! 안치욱! 안치욱!”
전광판에 2라는 숫자가 새겨지는 순간 관중석이 터져 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 이렇게 한 발, 한 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저 괴물의 뒷꿈치라도 따라갈 수 있겠지.
아니, 저 놈이 그토록 소원한다는 워리어스 우승에 한 손이라도 보탤 수 있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끄아아!”
안치욱이 가슴 속에 뭉쳐 있던 무언가를 토해내듯 포효했다.
고참 선수들이 그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모른 척 고개를 돌려주었다.
드래프트 9라운드로 입단해 주전 3루수로 발탁된 안치욱은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 *
“Fuck!”
안치욱에게 역전 투런홈런을 맞고 강판당한 용병투수가 덕아웃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았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석도 감독이 타격코치에게 지시를 내렸다.
“총력전이다. 컨디션 좋은 애들 다 대기시켜.”
“네, 감독님.”
생각지도 못했던 타자에게 일격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아직 7회말 한점 차다.
10개 구단 중 최약체인 워리어스 뒷문을 생각하면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더군다나 매지션스의 타격은 10개 구단 중 최고로 평가받고 있지 않은가? 다른 팀에 가면 당장 주전으로 설 선수들이 대타로 나서기 위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주석도 감독의 생각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
8회초 매지션스의 공격. 워리어스의 필승조 홍영식이 볼넷 2개를 연거푸 내줬다.
이어지는 더블 스틸. 허를 찔린 장덕수는 아예 반응도 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노아웃 2, 3루 상황이 만들어졌다.
희생 플라이만 쳐도 동점, 안타 한 방이면 역전까지 가능한 상황이다.
매지션스 응원석이 한껏 달아올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웃!”
“아웃!”
“아웃!”
유격수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직선 타구를 향해 한수혁이 점프했다.
마치 농구선수를 연상시키는 엄청난 서전트 점프였다.
무조건 외야로 빠져나갈 거라 생각하고 스타트를 끊었던 2루 주자와 3루 주자가 미처 귀루하지 못하고 아웃되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성급하게 몸의 중심을 이동시켰던 3루 주자에게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이런 진짜 미친.”
트리플 플레이. 프로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진귀한 광경이 펼쳐지고 말았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만들어낸 상대팀 신인 유격수가 별 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덕아웃으로 향하고 있었다.
“허어···”
어제와 오늘 경기 내내 그 신인 유격수에게 시선을 집중해온 주석도 감독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한수혁 저놈은 뭔가 이상하다. 저건 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괴물인 놈들은 종종 보아 왔으니까.
그보다는 태도에 대한 문제다.
저런 엄청난 플레이를 해내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분명 기뻐하는 것 같기는 한데 뭔가 시큰둥한 느낌을 동시에 준다. 정말 별 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다.
‘저 새끼 저거 진짜 뭐지···’
마치 은퇴를 앞둔 최고의 베테랑에게서나 풍기는 그런 기운이 한수혁에게서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일까.
이 프로야구 판에서 수십년을 굴렀건만 이상하게 저놈만 보면 가슴이 쪼그라든다.
“휴우···”
주석도 감독이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진정하자.
저런 말도 안 되는 플레이를 당했지만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실 라이벌 전에서 2연패를 당할 수는 없다.
“이 새끼들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아직 안 끝났어! 미리 포기하는 놈은 내가 이천으로 내려 보낼 거다! 고개 들어!”
큰 목소리로 선수들을 다독였다. 감독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 매지션스 선수들이 다시 한 번 전의를 불태웠다.
8회말 공격에서는 다행이 타석이 한수혁까지 가기 전에 수비를 끝낼 수 있었다.
2번 타자 최민석을 잡아낸 매지션스 불펜 투수가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마운드를 내려오고, 대기타석에서 있던 한수혁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물러섰다.
마치 먹이감을 놓치고 물러나는 숫사자 같은 표정이다.
어질어질해지는 머리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대타를 준비시켰다.
“홍철이 대타 나가!”
“네! 감독님!”
한진우가 이적한 후 워리어스 마무리를 맡게 된 최정수.
구위 좋고 변화구 각도 제법 쓸 만하지만 저 놈이 좌타자에게 약하다는 건 세상이 다 안다.
그리고 매지션스 덕아웃에는 당장이라도 출격할 준비가 끝난 좌타자들이 줄줄이 대기중이다.
따악!
따악!
풀카운트 접전 끝에 첫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최정수가 이어지는 매지션스 포수 박수길, 그리고 송기태에게 연속으로 안타를 얻어맞고 말았다.
이번에는 워리어스 이대준 감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급하게 다음 불펜 투수를 준비시켰지만 일단 이번 이닝은 최정수가 막아줘야 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따악!
매지션스 9번 타자가 때린 기가 막힌 타구가 1루수 옆으로 총알같이 날아갔다.
끝내기 안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워리어스 팬들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그때 이 팀의 내야를 10년 넘게 지켜온 베테랑 조성오가 팀을 위기에서 건져 올렸다.
가벼운 부상으로 라인업에서 빠졌다가 이번 이닝부터 대수비로 투입된 워리어스의 캡틴.
타앗!
“아웃!”
1루 베이스 옆으로 완전히 빠져나가는 직선 타구를 조성오가 다이빙 캐치로 건져냈다.
몸의 중심을 완전히 잃은 탓에 주자까지 잡아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막아낸 것 자체가 엄청난 플레이였다.
만약 그게 빠졌더라면 역전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광경을 본 매지션스 팬들이 탄식했다.
워리어스 팬들은 자신의 응원팀을 지탱해온 캡틴의 분전에 미칠 듯한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2사 주자 1, 2루 상황.
매지션스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타임! 대타!”
어제와 오늘 계속 부진했던 2번 타자를 빼고, 대신 부상으로 인해 2군에서 타격감을 조율해온 베테랑 고철환을 대타로 내보낸 것이다.
워리어스 마무리 최정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난 시즌 고철환에게 만루 홈런을 맞은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이 결국 적중하고 말았다.
따아악!
고철환이 때린 타구가 1-2루간을 총알같이 가르며 외야로 나갔다. 내야수들이 꼼짝도 못할 정도의 빠른 타구였다.
2루 주자 박수길이 3루를 돌아 홈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1루 주자 송기태도 질주하기 시작했다.
“흐압!”
우익수 맥스 워커가 타구를 잡더니 기합을 내지르며 홈으로 송구를 뿌렸다.
홈 승부다.
주자 박수길이 전력을 다해 달려들고 있는 홈플레이트.
거기에는 굳은 표정을 한 장덕수가 강철 같은 육체를 단단히 고정한 채 홈승부에 대비하고 있었다.
잠실야구장을 가득 메운 25,000명의 관중들이 숨소리조차 멈춘 채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 *